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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젊은이들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꿈꾸는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우시만보)' 시리즈.
 '평범한 젊은이들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꿈꾸는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우시만보)' 시리즈.
ⓒ 김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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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문화 기사 한 편이 기자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고은(77) 시인의 <만인보>(萬人譜)가 완간을 앞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만인의 삶을 기록한다'라는 뜻의 <만인보>는 시인이 평생 동안 만난 사람들을 기록한 연작시로서 한마디로 '시로 쓴 인물사전'이다. 1986년 첫선을 보인 이래 2007년까지 26권을 출간한 고은 시인이 2월말께 마지막 4권을 세상에 내놓으며 '필생의 대작' <만인보> 시리즈(3800여 편, 30권)를 완간한다는 것이 기사 내용이었다(이 글을 쓰는 3월 14일까지는 완간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지만, 완간 <만인보>를 만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기자는 '<만인보> 완간 코앞' 기사를 보며 책방 한구석에서 마주쳤던 또 다른 '만인보'를 떠올렸다. 2009년 4월 세상에 나온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도서출판 텍스트, 아래 '우시만보')다. '우시만보' 시리즈는 20~30대 젊은이들이 자기 삶의 이야기를 직접 풀어낸 자서전 형식이다.

24년 대장정의 종착역을 앞둔 <만인보>와 대양을 향한 출항의 돛을 올린 '우시만보'. 이 두 시리즈는 이름도 비슷하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그렇지만 강산이 두 번 넘게 변한다는 23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나는 만큼, 그 기간 동안 이뤄진 한국 사회의 변화가 <만인보>와는 다른 '우시만보' 기획에 담겨 있지 않을까. 그 실체를 밝혀보고자 지난 11일 서울 종로에 있는 도서출판 텍스트 사무실에서 김용필(46) 대표와 마주 앉았다.

'필터' 없이 젊은이들 스스로 말하는 삶의 이야기

김용필 텍스트 대표.
 김용필 텍스트 대표.
ⓒ 김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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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시만보'라는 명칭에 대해 물었다. 처음부터 <만인보>를 염두에 두고 정한 이름일까?

"그렇지 않다.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 그대로 '만 사람의 걸음'(萬人步)이라는 뜻이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와 비교하고 견주겠다는 의도로 지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시리즈는 닮은 점이 매우 많은 게 사실이다. '우시만보' 기획자가 생각하는 두 시리즈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점은 분명히 공통적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만인보>에는 고은 시인이라는 필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만인보>를 통해 보는 것은 시인의 눈에 투영된 시대의 풍경이다. 이와 달리 '우시만보'의 특징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당사자들이 직접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직접성 부분이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물론 <만인보>는 고은 시인이 당대가 부여한 사명을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1980년대와 2000년대의 지식인-대중 관계 및 글쓰기 문화의 차이와 '우시만보'의 관계다. 자신들을 '대변'해주기를 바라며 지식인들의 입을 바라보는 대신 글을 통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러한 이들이 발언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을 비롯한 공론장이 다양해졌다는 점이 '우시만보'의 등장과 궤를 같이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 김 대표는 "개인의 부각, 민주주의의 확산, 지식인-대중 관계의 변화 등이 '우시만보' 기획에 당연히 영향을 줬을 것"이라면서도 "그러한 사회적 변화와 '우시만보'의 관계를 현재 시점에서 딱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 부분은 텍스트 출판사 외부에서 보고 판단해줬으면 한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어 "처음 기획할 때 걱정했던 것 중 하나가 '젊은 세대가 자기 이야기를 스스로 쓰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할까'하는 것이었는데 우려했던 것보다는 훨씬 잘한다, 경험은 적지만 자기 삶의 기록을 잘 정리하더라"라고 말했다.

직접 이야기하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근래 한국 사회를 풍미한 '88만 원 세대론'과도 관련 있다.

"이 기획에서 88만 원 세대론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우시만보' 저자 중엔 20대만이 아니라 30대 후반도 있지만, 중요한 건 젊은이들의 삶이 동시대에서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진솔하게, 스스로 말해보게 하자는 것이다. 당대의 고민을 담되, 거대 담론이 아니라 각자 자기 목소리로 말하는 동시대 이야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다."

'우시만보' 각 권의 끝에 있는 '릴레이 인터뷰'라는 코너도 주목할 만하다. 편집부에서 개입하는 대신, 앞 권 저자가 다음 권 저자를 직접 인터뷰하는 독특한 형식이다.

"만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만으로는 뭔가 조금 모자라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그러한 소통을 지면에서 직접 구현해 보자는 취지에서 이 코너를 기획했다."

출판 시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우시만보' 기획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평전의 홍수'라고 할 만큼 평전들이 쏟아지지만 위대한 사람의 훌륭한 삶이라는 식으로 정리되는 평전은 너무 멀게 느껴진다. 이와 달리 자서전은 출판 자체가 평전에 비해 빈약할 뿐만 아니라, 다소 허황되게 느껴지는 성공담 위주가 많다. 이런 괴리를 메울 수 있는 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삶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시만보'는 각 권이 200쪽 안팎으로 한 손에 쏙 들어가는 전형적인 페이퍼백(문고본) 형태다. 페이퍼백을 택한 것도 출판 시장의 현황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한국 출판 시장엔 고급 양장본이 너무 많다. 그래서 거품도 빼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젊은 층이 가볍게 쓰고 읽을 수 있는 형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작된 '우시만보'는 1년도 안 돼 10권의 책을 선보였고, 이번 봄에 세 권이 더 나올 예정이다. 변두리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레게머리 보좌관'(신민영, <신호등 건너기 게임>), '안티조선' 고교생으로서 활동을 시작한 88만 원 세대(한윤형,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 프로레슬러에서 빵집 사장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삶의 무대를 누비는 '파이터'(김남훈, <멜로드라마 파이터>), 서울시장 최연소 후보(김종철, <출발 3%>), 아마추어 동네 밴드 기타리스트이자 게임 마니아인 21세기형 좌파(김민하,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지독한' 헌책 애호가(최종규, <책 홀림길에서>) 등 각자의 영역에서 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젊은 저자들 각각의 소소한 개인사를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시대의 고민과 맞닿은 소소함이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은 이야기들이 모이면 우리 시대의 풍경이 나올 것이라고 본다. 고은 선생의 시 한 편만으로는 그 시대의 전체적인 풍경을 드러낼 수 없지만 시가 한 편, 한 편 쌓여 <만인보>가 되면 시대의 속살을 담은 삶의 이야기가 되듯이 이 시리즈 역시 개별이 쌓이면 큰 그림이 보일 것이고 '우시만보'의 의의도 그때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서출판 텍스트 사무실 풍경.
 도서출판 텍스트 사무실 풍경.
ⓒ 김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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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익숙하지 않아도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우시만보'를 꿈꾼다

김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자신의 삶을 글의 형태로 스스로 정리할 수 없는 이들을 어떻게 '만인'에 포함시킬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지식인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말하게 하자는 취지가 퇴색하는 건 아닐까?

"예컨대, 막노동하는 사람이 자기 삶을 몇 백 매의 글로 정리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이 문제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가 이 기획의 근본 문제이자 처음부터 가장 고민했던 지점이다. 그런 이들의 목소리가 빠진다면 '우시만보' 자체가 공허해질 수도 있다. 텍스트 편집부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바로 '우시만보'가 젊은 인텔리들만의 이야기로 협소화할 가능성이다."

김 대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구술+정리' 형식(당사자의 구술을 다른 이가 글로 정리)의 '우시만보'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나온 10권은 '자서전' 형식이었지만, 그러한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말하게 하자는 것'이라는 뜻이다. "글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누구나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우시만보'", 궁극적인 구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문제는 지극히 세속적인 지속가능성이다. 침체된 출판 시장에서, 그것도 유명인과는 거리가 먼 이들의 이야기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판매가 전도양양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처음부터 짐작했던 사항이다. 그렇지만 이 시리즈는 오래 버틸수록 성공할 수 있는 기획이라고 보고 있다. 1~2년을 보고 시작한 게 아니다. 내부에서 농담으로 '<만인보>보다 한 명 더 하자'라고들 한다. 애초 큰 낙관으로 추진했고 느긋함, 배짱 같은 게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며 문득 <오마이뉴스>의 '사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10년 전엔 이름조차 낯설었던 '사는 이야기'는 이젠 기사의 지평을 넓히고 보통 사람들이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용한 통로로 자리 잡았다. 평범한 젊은이들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꿈꾸는 '우시만보'가 10년 후 어떤 평가를 받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만인보 완간 개정판 1.2.3 - 만인보 완간 개정판 전집 1

고은 지음, 창비(2010)


태그:#만인보, #우시만보,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텍스트,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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