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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을 최초로 쌓고, 왜구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우며, 영의정에 추증된 낙안군 낙생동(현 순천시 낙안면 옥산마을) 출신, 김빈길(?-1405년) 장군에 대해 최근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바로 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다.

 

사실, 김빈길 장군은 지역과 나라에 뚜렷한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민들부터 관심을 두지 않고 소홀했었다는 것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재조명을 통해 행적을 추적해 보고 '현창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뜻을 모으겠다는 그들의 의지는 의미 있는 일로 평가받고 있다.

 

김빈길은 어떤 인물인가?

 

태어난 연도는 정확치 않지만 김빈길은 고려(918년-1392년)말에 낙안군 낙생(=온야)동(현, 순천시 낙안면 옥산마을)에서 태어났다. 국가적으로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시작되던 시기이며 낙안군의 치소가 현, 고읍리(벌교)에서 현, 낙안면(낙안)으로 옮기던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기록을 근거로 살펴보면 김빈길이 지역의 인물로 부상한 것은 조선 태조 3년(1394년) 3월에 '왜구가 대거 침입하여 남해연안의 여러 고을이 무너지고 낙안군계에까지 침입하니 민심이 일시에 흉흉해지고 모두들 도망쳐 흩어지니 낙안태생인 김빈길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백의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웃 군민들까지 그 규모가 커지고 그 세력이 강화되니 조정에서 '전라도수군첨절제사'에 임명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김빈길은 장수가 돼 이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를 바다와 육지에서 여러 차례 막아 큰 공을 세워 임금으로부터의 하사품을 받은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육지에서는 멸악산(현 오봉산) 아래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쳤고 그 영향으로 왜구의 원혼이 낙안읍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낙안읍성 앞에 석구를 세웠다는 얘기도 있다.

 

그의 공적으로는 1397년,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최초로 낙안읍성을 쌓았던 것과, 조정에 건의해 도내 요해처(要害處)에 만호(萬戶-진)를 두고 병선을 나누어 정박시켜 효율적인 군사작전이 가능하게 한 것과,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설치해 군량미를 자체 조달토록 해 국고에서 주는 것만 바라는 폐단을 없앤 점은 크게 평가받고 있다.

 

또한, 김빈길 장군의 행적과 공로가 지역사회와 국가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으면 그의 주검 앞에서 사헌부(司憲府)가 임금께 상소를 올려, '항상 물 위에서 나라의 장성이 되어 해도를 막고, 집에서 생업을 다스리지 못한 지가 30여년인데 마음은 항상 보국에 달려있어 도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으로 책임을 삼아 음식과 의복의 좋고 나쁜 것까지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이른바 나라뿐이고 집은 잊어서 충성이 사직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역시 국가의 예장과 사시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특별히 물건을 주어 상을 돕는 은혜를 내리시었으나 이것이 어떻게 구천에 있는 충혼을 위로할 수 있습니까?'라고 해 국장과 사시의 법을 고칠 정도였다.

 

김빈길 장군의 출생지 마을은 어디며 왜 사라졌을까?

 

김빈길 장군은 약 600여 년 전에 낙생동(현 낙안면 옥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옛 낙안군의 치소였던 낙안읍성과 2킬로미터 남짓 떨어져있고 나지막한 옥산(고도 63m)이 자리한 곳이다. 현재 6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 자리하고 있는 옥산마을은 정확히 김빈길 장군이 태어났던 낙생동은 아니다. 그저 현, 옥산마을이 낙생동의 터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그 얘기는 김빈길 장군이 태어났던 마을은 1735년경 하동 정씨가 들어와 살기 이전 약 300여 년 동안은 빈 공간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주변에서 다량의 고인돌이 발견될 정도로 선사시대부터 이미 안정된 주거환경인데 '왜 1400여년 경부터 1700여년까지 적어도 300여년의 세월 동안 마을이 존재하지 않은 공백 상태였을까?' 그것은 천재지변이라기보다는 왜구에 의한 것으로 김빈길 장군의 행보와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먼저, 김빈길 장군은 왜구가 우리나라를 침입하기 시작하던 조선시대 초기에 '전라도수군첨절제사'로 수많은 왜구를 물리쳤던 장군인데 이 지역을 노리던 왜구들에게 있어 김빈길 장군은 반드시 제거해야만 할 대상이었다는 점.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몰라도 1400여년경, 관직에서 물러난 김빈길 장군이 군사적 힘을 잃고 민간인 신분이 돼 그의 고향인 현 옥산마을로 들어와 옥산 위에 망해당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초야에 묻혀 살게 됐다는 점.

 

이후, 왜구의 침입은 김빈길 장군이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이 지역을 괴롭히기 시작했는데 군사적 힘이 없는 그가 가족과 친지를 이끌고 50리 밖인 전북 고창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그가 떠난 마을은 왜구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을 것이라는 얘기다.

 

김빈길 장군의 흔적은 어디에 남아있고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김빈길 장군에 관한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그의 출생지인 순천시 낙안면 땅에는 낙안향교옆 충민공 임경업 장군 사당에 그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는 것과 전북 고창군 고수면에 있는 그의 묘소가 유일하다.

 

그가 태어난 마을이나 생가도, 그의 정자인 옥산 위의 망해당도, 조선말까지 있었다던 그의 사당인 삼현사(낙안향교옆)도 흔적 없이 모두 사라지고 그동안 복원하려는 움직임도 없다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현재 움직임을 갖고 있는 지역민들은 김빈길 장군이 태어났던 마을에 기념비를 세우고 그의 생가를 추정해 복원하고 그의 정자인 망해당을 옥산 위에 재건립하는 문제와 그의 사당인 삼현사를 복원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가 최초로 쌓았던 낙안읍성에서 그를 기리는 작업과 함께 최초로 성을 쌓은 날을 역 추적해 행사를 갖는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김빈길 장군 또 하나의 유산 낙안(군)팔경 바로세우기

 

김빈길 장군이 밀려드는 왜구에 맞서 지역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일에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은 드러난 일이다. 하지만 지역의 진정한 아름다움인 명경관을 발견해 세상에 알려놓은 낙안(군)팔경은 아직도 묻혀있고 심지어 왜곡까지 돼 있다.

 

김빈길 장군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들어와 백이산 아래인 옥산 정상(伯夷山下玉山之上)에 정자인 '망해당'을 지었다. 이곳은 들판 가운데 있는 63미터의 작은 산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그 아래로 낙안천이 흐르는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백리풍광(당시 낙안군 면적)의 낙안(군)팔경을 노래했는데 그 내용은 현재 알려진 낙안팔경이 현 행정구역인 순천시 낙안면 지역에 한정한 것과는 거리가 있고 당시 낙안면 지역까지 강 규모의 하천이 있었는데 그곳에 뗏목이 나다니는 아름다움까지 노래한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伯夷淸風(백이청풍) - 백이산에서 불어오는 맑고 청명한 바람

寶嵐明月(보람명월) - 보람산(현, 제석산) 위에 떠 있는 둥근 보름달

玉山翠竹(옥산취죽) - 옥산의 새 꼬리 형태의 대나무 군락

金崗暮鍾(금강모종) - 금강암에서 해질 무렵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

澄山宿露(징산숙로) - 징광산속에 새벽까지 남아있는 아침 이슬

平地浮槎(평지부사) - 낙안들(가운데 흐르는 천)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뗏목

斷橋魚火(단교어화) - 단교(홍교)에서 반짝이는 고기잡이 불빛

遠浦歸帆(원포귀범) - 먼 포구(진석)로 돌아오는 고깃배의 원경

 

현재, 지역민들은 김빈길 장군의 알려진 업적은 업적대로 현창사업으로 이어나가고 그가 옥산 정상의 망행당에서 지역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낙안(군)팔경은 그것대로 복원하고 알려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계획이다.

 

역사는 바로 기록하고 바로 세워야

 

낙안읍성을 임경업 장군이 도술을 부려 하루아침에 만들었다고 하는 얘기나 낙안팔경은 선조 때부터 내려왔는데 이런 내용이라고 1960년대 말 당시 행정구역내의 지역만을 국한시키면서 정설을 만들어 버린 것은 어처구니없는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지역민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김빈길 바로 세우기 현창 사업'은 지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이며 역사 기록에서 무엇이 진실인가를 확연히 보여 줄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 기대된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낙안군, #김빈길, #현창사업, #망해당, #낙안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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