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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74년 72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 출신 월파 서민호 선생은 1928년경에 자기 고향도 아닌 보성군 벌교읍에 가정 형편이 여의치 못해 학교에 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나이에 상관없도록 야학당격인 송명학교를 세웠다.

월파 서민호 선생은 누구인가?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 태생인 월파 서민호 선생, 사진 하단 우측은 그의 형님이 살았다는 집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 태생인 월파 서민호 선생, 사진 하단 우측은 그의 형님이 살았다는 집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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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호 선생을 후대는 독립 운동가며 진보주의 정치가라고 표현한다. 3·1운동이 전개된 후 "반도목탁(半島木鐸: 독립선언의 내용을 담은 지하신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6개월 형을 마쳤고, 조선어학회 사건에 가담한 죄로 1년의 옥고를 치렀던 점은 그를 독립운동가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1950년 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 거창양민학살사건 국회조사단장으로 활약했고 1965년 민중당 최고위원, 1966년 민주사회당 창당, 대표최고위원,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하고 통일문제연구소를 창설한 점에서는 진보주의 정치가다.

서민호 선생은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주(州) 웨슬리언대학을 거쳐 1926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정치사회학부를 수료하였는데 이런 학력 뒤에는 벌교라는 지역이 있었다.

그의 태생지인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은 보성군 벌교읍과 차로 10여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말이 고흥군이지 벌교읍과 지척의 거리에 있다. 그런 이유로 어려서부터 벌교에 나가 신학문을 배웠고 후에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됐다.

서민호 선생을 얘기할 때 송명학교 설립과 함께 빠지지 않는 부분은 1950년 현역 대위 살해사건을 들 수 있다. 그는 이 사건으로 8년의 옥고를 치렀는데 이는 이승만 정권과의 대립에서 비롯된 슬픈 역사다.

몰락과 폐가, 서민호 선생 생가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 노산공원앞의 제각과 서민호 선생 부친 생가는 후손들의 몰락으로 폐가가 되다 시피했다.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 노산공원앞의 제각과 서민호 선생 부친 생가는 후손들의 몰락으로 폐가가 되다 시피했다.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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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호 선생은 한글을 빛낸 인물로, 자랑스러운 고흥인으로 선정되기도 한 인물이다. 또한, 지역을 넘어서 후대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관계와 정계에서도 오랜 세월 활동하던 인물이다. 그가 옛 낙안군 지척에서 낙안군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것은 큰 호기심이었다.

필자는 지난 3일, 죽산마을에 있다는 서씨 문중의 제각과 함께 서민호 선생의 생가를 설레는 마음으로 찾았다. 하지만 폐가나 다름없는 제각과 집을 보면서 지역 인물의 역사적 흔적들에 관한 지역사회의 무관심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산공원 입구에 있는 서씨 제각은 수년째 관리하지 않은 모습으로 잡초가 무성하고 건물들은 낡아 허물어진 곳들이 많았고 서민호 선생 부친 서화일씨의 집이라고 알려준 곳은 계단 50여개가 있는 언덕에 전통 한옥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이 또한, 집기류가 어지럽게 흩어져있고 건물도 군데군데 무너져 내려 폐가나 다름없었다.

다만, 마을 중간에 있는 서민호 선생 형님 집은 후손들이 살고 있기에 사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지만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주민은 "집안이 몰락해서 관리가 되지 않아 폐가나 다름없어졌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문득 우리 사회에서 독립운동가나 진보주의 정치인중 하나만 해도 후손들의 삶이 쉽지 않은데 서민호 선생은 둘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니 후손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그의 사상만큼은 꽃피워보자

(좌측) 벌교읍 회정리의 회정교회, 소설 태백산맥에서 서민영이 야학당을 운영하던 장소로 묘사된 곳이다. (우측) 서민호 선생이 세웠던 송명학교 자리, 지금은 벌교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좌측) 벌교읍 회정리의 회정교회, 소설 태백산맥에서 서민영이 야학당을 운영하던 장소로 묘사된 곳이다. (우측) 서민호 선생이 세웠던 송명학교 자리, 지금은 벌교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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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서민호 선생의 고향에서 물리적으로 남겨놓은 곳은 피폐해졌고 또 아이들 교육을 위해 세웠다는 송명학교도 없어져 지금은 벌교성당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가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교육을 시키고자 했던 정신은 살려야 할 듯 보인다.

이런 안타까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정래 선생은 소설 <태백산맥>에서 서민호 선생을 서민영으로 재 탄생시켰는데 소설 속에서 서민영은 지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동경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자신이 소유한 논을 소작인들이 공동으로 공유하게 한 후, 협동농장(協同農場)을 만들어 경영하게 함으로써 이상적인 농촌 건설에 앞장서기도 한다.

또한, 회정리 교회에서 서민영은 야학을 열기도 하는데 조정래 작가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저 민중의 편에서 그들의 질곡된 삶을 통해 역사를 복원하려고 노력했을 따름이다. 작품 가운데 내가 지향하는 인물은 없지만 굳이 어느 한 인물을 지적하라면 서민영 같은 사람이다"고 말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후손들의 삶이 버거워 그가 살았던 세월의 흔적을 바로 세우지는 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월파 서민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1960년대 대중당을 창당한 후 한국 진보주의의 맥을 이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일 것이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낙안군, #남도TV, #벌교, #고흥, #서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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