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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초기 ‘강부자 정권’이란 비아냥을 들었던 이명박 정권은 감세나 반값 아파트, 친서민 등 실제 서민들에게는 별다른 이익을 주지 않는 보수적인 정책들을 친근감 있는 언어로 포장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이른바 '무늬만 친서민' 프레임이다.

‘대안없는 진보’. 이것 역시 잃어버린 10년을 외쳤던 보수진영이 정해놓은 프레임이다. 진보진영 내에서도 이에 일정부분 수긍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오마이뉴스>는 몇 회에 걸쳐 우리시대 진보의 대안을 만들고 있는 싱크탱크들의 활동을 소개한다. [편집자말]
용산의 위치한 '연구공간 수유+너머'. 이 곳에 수유너머 남산과 수유너머 R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용산의 위치한 '연구공간 수유+너머'. 이 곳에 수유너머 남산과 수유너머 R이 자리를 잡고 있다.
ⓒ 조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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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양심이고 싶다. 그러자면 '깨어있는' 시민이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고민해보지만, 삶에 매몰되어 흘러가다 보면 어느새 아득해지는 다짐이 있다. '공부를 하고 싶지만,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갈 곳 잃은 열정이 있다면, '생활밀착형' 공부가 가능한 곳, '수유+너머'를 넌지시 권해본다.

'수유 연구소'의 고전 평론가 고미숙, '서사연(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이진경, 고병권 등이 의기투합해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만든 지도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수유+너머는 공부와 삶의 일치를 표방하는 '코뮨'으로 출발했다. 이곳에선 다양한 전공분야의 연구원들이 공부와 삶을 공유하고, 고전, 철학,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분야의 강좌를 열고 세미나를 함께 한다. 각종 매체에 글을 기고하거나, 무료 강의를 열고 책을 내는 것도 주요 활동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친다면 공부와 하나 되는 삶을 논할 수 없을 것. 같이 밥도 지어먹고, 등산도 가고, 국토 대장정을 하는 등 사람들 간 관계를 맺고 생활을 함께하는 일도 중요하다.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는 곳, 나이도 학벌도 중요치 않은 '공동체'이고자 했던 수유+너머는 최근 '코뮨들의 네트워크'라는 새 이름표를 달았다. 비대해진 조직을 잘게 나누고,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해 내외적으로 사람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는 '분리 실험'이 한창이다.

'분리 실험' 통해 대중 곁으로 더 가까이

수유너머 구로에서 권용선의 '발터 벤야민, 판타스맘고리아의 베일을 벗기는 시간' 강좌가 진행중이다.
 수유너머 구로에서 권용선의 '발터 벤야민, 판타스맘고리아의 베일을 벗기는 시간' 강좌가 진행중이다.
ⓒ 조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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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 서거 등, 일련의 사회 상황들이) 수유+너머 성장 동력에 영향이 아예 없진 않아요. 많은 분들이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크고, 생활인으로서 살아가면서도 공부로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는 분들이 종종 찾아오고."

수유+너머 남산에서 10년간 고전을 공부하다 최근 수유+너머 구로로 자리를 옮긴 오선민씨의 말이다. 7일 저녁, 수유+너머 구로에 들어가자 여느 가정집과 같은 내부에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쪽 방은 세미나실1, 건너편 방은 세미나실2 이런 식으로 꾸며졌고 거실이 곧 강의실이다. 공간 탓인지, 엄청난 규모의 대가족을 방문한 듯한 느낌을 준다.

"10년 전에는 계절 강의에 한 사람만 등록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2000년 가을엔 강의를 저 혼자 듣고. 밥해서 같이 먹자 했는데 2~3명뿐일 때도 있었고, 공간을 지킬 사람이 없어서 고민한 적도 있었죠."

현재 구로에는 세미나 회원으로 50여 명, 강좌엔 20여 명, 청소년 활동엔 30여 명 정도가 찾아온다. 주로 지역 사회의 학생들, 구로 디지털 단지의 노동자들이나 남산이 멀어서 찾아가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많다. 연구원들이 "우리보다 더 똑똑하다"고 입을 모으는 초등학교 4학년생은 6개월 된 아기에게 수유+너머 구로의 최연소 회원 자리를 아쉽게 빼앗겼다. 지역 학교의 선생님들도 이곳을 찾는다.

1년 이상 저소득층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부방을 운영하던 김현식 선생님의 합류 덕분인지, 구로엔 청소년을 위한 강좌가 유독 많다. 아이들은 "이건 왜 공부하는 거예요?"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연구원들을 바짝 긴장하게 한다. 오 연구원은 "시혜심이 아니라, 아이들과 같이 공부해보고 싶었다"며 "그게 도움이 된다는 사람들이 자기 지식을 점검하고 재구성해보자는 이유로 결합했다"고 구로가 탄생한 계기를 밝혔다.

사회를 향한 실천적 고민 "소외되는 대중을 말한다"

수유너머R에서 열리는 '정신분석과 혁명' 세미나 현장.
 수유너머R에서 열리는 '정신분석과 혁명' 세미나 현장.
ⓒ 조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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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넷 수유+너머의 본진, 수유+너머 남산이 있는 용산 건물 2층엔 최근 수유+너머 R이 둥지를 틀었다. 지난 6일은 R에서 '정신분석과 혁명' 세미나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세미나를 위한 간식을 준비하고 있던 박정수 연구원에게 R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 달 전쯤 4층에서 2층으로 독립했어요. 수유+너머 R 뿐만 아니라, 강원도, 구로에도 생겼고, 수유+너머 길, 아현동의 N도 있고요. 각자 색깔이 다 있죠."

R은 '우리 삶과 세계를 바꾸는 배움'을 지향한다. 지금까지 세 권의 부커진 R(부커진은 book과 magazine의 합성어로 책의 깊이와 잡지의 시사성을 동시에 담으려는 시도)을 발행했다. 2007년 대추리와 새만금을 잇는 대장정을 통해 자본과 국가에 의해 추방당한 대중과 그 현장을 만나려 했던 시도를 1호에 담았다. 1.5호는 1호의 연장선에서 '대중의 소수화'를 주제로 회원들이 고르고 번역한 논문들로 채워졌다. 2호에선 사회구성체론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고찰하고, 비정규직 문제와 촛불시위 등 사회 현안을 다뤘다.

"내년 초쯤 (다음 호) 발행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주제는 '다시 맑스 읽기'로, 회원들 중심으로 글을 쓰고 외부에 청탁도 할 생각이고요. 맑스의 중요 저서를 선정하고, '왜 지금 맑스를 읽나?'에 대한 답과,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하고, 용산문제도 다룰 생각이에요."

이들은 "최근의 금융위기와 장기침체, 세계적인 대중 봉기의 흐름 속에서 자본의 운동 메커니즘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코뮨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다시 맑스를 꺼내 들었다. 그동안 촛불집회에서 길거리 강연을 여는 등 시대와 함께 호흡하려 했던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이날 십수 명의 사람들이 몰려 성황을 이룬 '정신분석과 혁명' 세미나에서도 지식과 삶을 연결하려는 고민이 묻어 나온다. '개인'에 천착했던 기존의 해석과 달리, 개인의 내밀한 욕망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세미나는 프로이트와 니체, 라캉 등을 넘나들지만 딱딱하지만은 않다. 영화 <해변의 여인>에서, 여자의 과거가 담긴 말 한 마디에 집착하는 '찌질한' 한국남자가 텍스트가 되기도 하고, "'과일 먹을래요?'란 말을 '과사(과일+사과) 먹을래요?'라고 말한" 회원의 일상이 예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만들어 가는 소박한 조직은 "궁핍하지 않다"

여태까지 발행된 세 권의 '부커진 R'
 여태까지 발행된 세 권의 '부커진 R'
ⓒ 조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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앳된 얼굴의 대학생부터 빛바랜 머리를 곱게 단장한 중년 여성까지, 여럿이 머리를 맞댄 세미나에서는 '공동체의 힘'이 여지없이 발휘된다. 발제 중이던 박 연구원이 "이 단어 어떻게 읽는 거죠?"하자, 한 회원이 유창한 발음으로 독어를 읽고 자세한 해석까지 덧붙여 준다. 그러자 "역시 여럿이 모이면 좋군요"하며 웃음이 터진다. 여론에 귀를 닫은 정권,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사회와 자본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대중을 공동체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은 이렇게 생각보다 쉽고 즐거웠다.

수유+너머는 연구원들의 회비, 특별회비와 선물들, 강좌 수강료, 세미나 회비, 주방과 카페 수익 등으로 운영된다. 남산의 경우 월세가 1000만 원이나 되지만 R의 박정수는 "지금까지 월세 밀린 적은 없다"며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삶을 살고자 하면 절대 궁핍하지 않다!"고 힘주어 말했다. 오선민도 "다른 시민단체와 달리 (지원금 등 없이) 재정이 자립해 있고, 경제적으로도 소박하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다"며 "세파에는 덜 시달린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수유+너머는 규모를 키우고, 돈을 많이 들여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능동성을 통해 운영된다. 직접 참여하여 관계를 맺으며 삶을 고민하고, 공부에 녹여내는 이 공간이 궁금하다면, 우리 집에선 어디가 가장 가까운지 '코뮤넷 수유+너머'에서 찾아보자. 참고로 전화나 이메일로 해결하려 하기 보단 직접 찾아가길 권한다. 수유+너머는 현장에서, 당신과 얼굴을 맞댈 준비가 되어 있다.

덧붙이는 글 | 현재 수유너머는 수유너머 남산, R, N, 구로, 길, 강원 등으로 나뉘어 각지에서 활약 중이다. 진행중인 강의나 세미나 안내, 기타 더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 참조. (http://www.transs.pe.kr)



태그:#진보싱크탱크, #수유너머, #수유너머 구로, #지식공동체, #코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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