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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걸어서 길이 되었습니다. 부디 편히 가십시오."라고 썼다. 지난 5월 27일 대전 합동 추모제때였다. 국민들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노랑 리본이 오밀조밀 줄줄이 늘어섰다.

 

분향소에서 신발을 벗고 국화를 영정에 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냥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명백한 죄의식에 젖었다.

 

소년 한 명이 그가 남긴 유서를 읽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순간 또 눈물이 나왔다. 아직은 정의와 진실이 뭔지 모르고 있을 소년에게 유서의 행간이 어떻게 읽혀질까?

 

폭격으로 숨진 부모 시신 앞에서 한 아이가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전쟁 사진이 생각났다. 아아, 그러나 그는 소녀를 자전거에 태운 채 활짝 웃고 있지 않은가! 

 

백 개 만장이 휘날리고 남녀노소 6천 시민이 모였다. 넋을 위무하는 의식과 대금 연주와 붓사위 퍼포먼스와 추모사가 이어졌다. 많은 분들이 울었다. 통곡도 오열도 아니지만 볼을 타고 흐르는 은밀한 눈물이 손수건을 적셨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김소월의 '초혼(招魂)' 한 구절이 바람에 휘날렸다. 이승과 저승이 너무 멀어서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람. 그는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심금을 울리는 언행을 남긴 채 아주 멀리 떠났다.

 

그래서 설움에 겹도록 불러보지만 그는 대답 한 마디 없이 그저 우리 가까이에서 웃고만 있다. 그토록 멀리 갔으면서 이렇게 가까이 우리 곁에 있다. 갔지만 가지 않은 참 좋은 당신!

 

그의 시신이 경복궁에서 시청으로 국민 곁에 머물다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됐다. 통곡과 오열이 진동했다. 의연하듯 버티던 유가족의 오열이 심금을 울렸다. 텔레비전 앞에 선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지켜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 말 앞에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았다. '보내고 나니 뜻을 알았다'는 후회와 '죽음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섞여 너무나 자연스럽게 조문행렬에 동참했다. 

 

그가 한 줌 재가 되어 봉하마을 정토원에 머물고 난 다음 날, 나는 우연히 하늘을 보았다. 정확히 5월 30일 정오였다.

 

절묘한 구름이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후광까지 내리비치고 있었다. 신속하게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기 전만 해도 구름은 지도에서 바라보는 한반도 그 자체였다.

 

나는 그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있는 거라고 믿었다. 그는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 또한 우리를, 우리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있다고 은밀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가 걸어서 길이 되었다.


태그:#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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