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WBC(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라운드에서 한국팀이 8강전을 치르고 있는 펫코 파크(PETCO Park,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홈구장)는 우리나라 기자들이 너도 나도 입을 모아 합창을 하고 있는 '투수친화적 구장(pitcher-friendly ballpark)'에 해당한다. 언제부터인가 '환경'이 하나의 키워드로 자리 잡으면서 '환경친화적(environmentally-friendly)'이란 신종 유행어에 재미를 붙였는지 다들 '-friendly' 가 붙으면 '-친화적'으로 해석하기 바쁘다.

하지만 어딘가 어색하다. '환경친화적' 만큼이나 가슴에 이 표현이 와 닿지는 않는다. '투수친화적 구장'이란 '펫코 파크', '세이프코 필드(시애틀 매리너스 홈구장)'와 같이 경기장이 넓고 홈런이 나오기 힘든 구조 때문에 투수들에게 유리한 야구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pitcher-friendly를 그냥 '투수에게 유리한' 정도로 해석해도 부족함이 없다. '-친화적'을 가져다 붙이면 뭔가 있어 보일지는 몰라도 그다지 적절한 풀이는 아니다.

한때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몇 년 '먹튀' 시절을 보내던 박찬호가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국내 팬들이 환영의 메시지를 보냈다. 새로운 홈이 될 '펫코 파크'가 '투수친화적(다들 '친화적'이라고 하니까 편의상 이렇게 표현하고자 한다)'인 구장이기에 홈런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박찬호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우호적인 분석이 뒤를 이었다. 누가 최초로 '투수친화적'을 언급했는지는 모르지만 마치 전염병 번지듯 이 신문 저 신문 '투수친화적'으로 돌변했다. 방송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펫코 파크에서도 박찬호는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지만.

'투수친화적'이란 표현은 어떤 의미에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박찬호 혼자에게만 유리한 것이 아니라 상대팀 투수 역시 펫코 파크의 이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메이저리그 모든 투수들에게 펫코 파크는 'pitcher-friendly ballpark'로 존재하는 것이다. 경기장 규모가 커서 상대적으로 홈런이 잘 양산되지 않으니까 실점 확률이 줄어들지는 몰라도 그것이 곧 투수의 승리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당시 국내 언론은 [펫코 파크 → 투수(박찬호)친화적 구장 → 실점 확률 감소 → 박찬호 승리]와 같은 필승공식을 만들어서 자주 지면을 물들이곤 했다. 이러한 미디어의 보도에 둘러싸인 국내 야구팬들의 기대치는 15승 기본에 20승은 선택이요, 기분 좋으면 25승까지 '파워업'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울러 투수친화적 구장은 타자들에게도 모두 공평하게 그 기회를 부여한다. 박찬호를 상대로 상대팀 타자들이 홈런을 치기 힘든 만큼 파드리스 타자들 역시 공을 펜스 위로 날려보내는 것이 쉽지 않다. 즉 점수를 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이 경우에 '타격(공격)'의 관점에서는 두 팀 모두 큰 혜택을 얻는 것은 없다. 결국 투수력과 수비력, 그리고 기동력이 강한 팀에게 투수친화적 구장이 진정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투수친화적 구장에 대해서 일부 야구팬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즉 홈런이 잘 터지지 않는 것을 점수가 나지 않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물론 홈런을 맞지 않으면 그만큼 실점할 확률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접근을 해보자.

사실 야구장이 크다는 것은 타자들이 홈런을 쳐내기 힘들다는 말이지 장타(2, 3루타)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형구장의 경우 장타가 나올 확률이 더 크다. 특히 이종욱, 이치로와 같이 발 빠른 선수들이 많이 포진한 팀의 경우, 투수들은 물론이요 타자들에게도 유리한 구장이 바로 펫코 파크와 같은 'pitcher-friendly ballpark'이다. 반대로 아덤 던, 가르시아처럼 덩치 큰 선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는 팀의 경우엔 빠른 발에 의한 장타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구장이기도 하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박찬호가 파드리스 유니폼을 입고 펫코 파크 마운드에 섰다고 해도, 상대팀에 비록 홈런타자는 없지만 발 빠른 중장거리 타자들이 많이 등장한다면, 반대로 자신의 팀엔 느림보 장타자들이 많다면? 이 경우엔 펫코 파크가 오히려 타자에게 유리한(hitter-friendly) 구장이 될 수도 있다. 야구장의 크기, 물리적인 구조 때문에 투수가 실점할 확률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기동력'을 비롯한 다양한 환경적 변수가 맞물리면서 박찬호의 승리 가능성까지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꽃범호 1점 폭발 16일 오후(한국시간)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 2라운드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에서 한국의 이범호가 2회말 1사 상황에서 1점홈런을 친 뒤 류중일 3루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16일 오후(한국시간)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 2라운드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에서 한국의 이범호가 2회말 1사 상황에서 1점홈런을 친 뒤 류중일 3루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한국은 이날 '투수친화적'이라는 펫코파크에서 홈런 3개를 뽑아냈다. ⓒ 연합뉴스 황광모


정반대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기 위해 시계바늘을 2002년으로 되돌려 보자. 당시 박찬호가 F.A. 대박을 터뜨리며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대했을 때 팬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레인저스의 홈구장인 '아메리퀘스트 필드'는 대표적인 타자친화적(hitter-friendly) 구장, 즉 투수에게 불리한 야구장이다. 홈런이 뻥뻥 쏟아진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잃어버린 승수를 '대박의 땅' 텍사스에서 되찾아주고 싶은 팬들의 열망에 화답이라도 하듯 장밋빛 미래로 도배된 기사가 스포츠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무리 '제프 쇼'의 찬호맞춤형 방화에 모두들 노이로제가 걸려있었기에 오죽했으랴. 당시 언론에서는 아메리퀘스트 필드가 '타자친화적' 야구장이란 사실은 애써 외면하며 'ChanHo-friendly' 기사를 남발했다.

다저스가 포함된 내셔널리그(NL)에서 레인저스가 속한 아메리칸리그(AL)로 이주한 것을 놓고서 박찬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분석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한 분석의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지명타자(DH) 제도였다. 즉 "텍사스 레인저스가 속한 아메리칸 리그에서 투수생활을 할 경우 박찬호가 타석에 들어설 필요가 없으므로 타격 부담이 없다. 따라서 편하게 공을 던질 수 있고 승수를 따낼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였다. 물론 알렉스 로드리게스로 상징되는 텍사스 강타선도 기꺼이 '찬호 도우미'의 목록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이 분석도 동전의 한쪽 면, 아니 다각형의 한 면만 바라다본 것에 불과하다. 투수가 비록 타석에 들어설 일이야 없겠지만, 대신 '데이빗 오티즈' 같은 무시무시한 지명타자와 매 게임 상대해야 한다. NL처럼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그냥 쉬어가던 일도 없을 뿐더러 이름난 홈런타자, 강타자와 힘겹게 맞짱을 떠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 투수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결국 지명타자 제도가 투수에게 반드시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음에도, 기자들은 [박찬호 아메리칸리그 이동 → 타격 부담감 사라짐 → 투구에만 전념 → 더 높은 승수 확보]의 흐름도를 작성해내며 야구팬들로 하여금 찬호박 '승수 쌓기'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도록 부채질 했다.

만약 2009 WBC를 마치고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파드리스에 입단한다면 과연 언론에서는 어떠한 분석을 내어놓을까. 여전히 '투수친화적'을 '전가의 보도'로 삼아 류현진에게 유리하니까 쉽게 승리를 따낼 것이란 분석 일색일까. 반대로 레인저스와 계약을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타격 부담이 없으니까 류현진이 승수쌓기에 유리할 것이라고 집중보도할까. 한번 의문을 던져본다.

16일 WBC 2라운드 1차전에서 한국팀은 멕시코를 맞아 8:2 대승을 거두었다.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이 가장 나오기 힘들다는 '투수친화적' 구장의 대명사 '펫코 파크'에서 무려 3방의 대포를 쏘아 올려 멕시코 마운드를 초토화 시켰다. 한국팀이 1라운드 아시아예선에서 기록한 홈런개수는 모두 4개에 불과하다. 홈런공장으로 불리는 도쿄돔에서도 예선 4경기를 통틀어 4개 밖에 쳐내지 못했던 홈런을 펫코 파크에서 하루에 3개씩이나 때린 것이다.

지역 예선에서 12방을 터뜨린 멕시코의 불방망이는 단 한 개의 홈런도 기록하지 못했다. 그리고 멕시코의 선발투수 로페즈는 메이저리그에서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0.158에 불과한 대단한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이날 이용규를 비롯한 한국 좌타자들에게 안타를 평균치 이상 허용했다. 이것이 야구다. 야구장이 크면 투수에게 유리하다, 좌타자는 좌투수에 약하다와 같은 분석과 속설이 때론 경기결과를 배반하기도 한다는 것. 그래서 야구는 재밌다.

WBC 야구 투수친화적 펫코파크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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