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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20세기를 빛낸 주요 여성 둘을 들라면?

"마리 퀴리와 코코 샤넬."

 

세기의 여성 디자이너인 코코 샤넬은 이렇게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프랑스인의 머리 속에 중요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그녀가 단순한 패션을 창조하는 유명 디자이너로 머물지 않고 '샤넬 스타일'이라는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함으로써 여성 해방의 물꼬를 틀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샤넬은 20세기 초 여성들을 몸에 꽉 끼는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땅을 끄는 긴 치마에서 벗어나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혁신적인 스타일의 스커트를 선보임으로써 여성의 동작을 해방시키는가 하면, 이제까지 남성용 의복에만 이용했던 투박한 천으로 편하고 자유스런 바지를 만들어 여성 판타롱의 시대를 연 선구자이다.

 

또한 끈 없는 손가방만 들고 다녔던 여성들에게 어깨에 맬 수 있는 끈을 달아줌으로써 가방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한 샤넬은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

 

여성의 자유와 독립을 심플하고 기존 사회의 가치에 도전하는 혁신적인 의상으로 표현했던 샤넬. 그녀의 유명도는 세계적이다. 그런데 이런 샤넬이 생전에 한국 가구를 소지하고 있었고 다른 어떤 물건보다 애지중지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얼마 전부터 이 유명한 코코 샤넬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었던 나는 드디어 올 여름방학이 다가오기 전에 작은 문고판을 하나 구해서 휴가 때 가지고 갔다. 프랑스에서 그동안 코코 샤넬에 대한 전기판은 수없이 많이 출간되었던 게 사실이다.

 

서점에서 기자에게 추천해준 책은 <코코 샤넬, 신비의 향기>라는 제목이었는데 샤넬이 평소에 애지중지했었던 물건들을 10개의 장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제 3장의 제목이 '한국 가구'가 아닌가? 아니, 샤넬이 한국 가구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이게 무슨 얘기지?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샤넬의 첫사랑 카펠, 그가 선물한 것은?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많은 파리지앵들이 피난 가고 없는 텅빈 파리에서 31세의 코코 샤넬은 그녀의 첫사랑이자 자신의 디자이너 재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부티크를 차려준 애인 보이 카펠이 돌아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런던을 자주 드나들었던 영국 국적의 카펠은 샤넬의 곁에 되돌아올 때마다 귀한 선물을 사들고 오곤 했었는데 이 선물 중의 하나가 한국 가구였다.

 

"가장 최근의 선물이 진한 흑적색의 한국 혼수가구로, 코코는 일종의 미신 때문에 그 안에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채 간직했다. 그녀는 보이에게서 받은 다른 물건과 마찬가지로 이 가구를 애지중지했는데 임종이 가까울 무렵에 갸브리엘 라브뤼니(조카딸)에게 넘겨주었다."(54페이지)

 

자신이 쓰던 웬만한 물건은 자신의 거처였으며 부티크로 사용했던 캉봉 거리에 그대로 두었으나 본인이 소중하게 여겼던 물건들은 대부분 가족에게 물려주었는데 후손이 없었던 샤넬이 가장 사랑했던 조카딸에게 귀중한 한국 가구를 물려준 것이다.

 

8월 말에 휴가에서 돌아와 출판사에 연락을 취했다. 이 책 저자의 전화번호를 얻어 전화를 했으나 휴가중이라는 남편의 말이 되돌아왔다. 결국 9월 초에 연락이 취해져 파리 시내에서 만났다. 저자인 이자벨 피메이에르(Isabelle Fiemeyer)는 샤넬의 조카딸에게서 얻은 한국 가구 사진을 들고 나왔다.

 

'1914년에 유럽에서 한국 가구를 구하는게 가능했을까?' 처음부터 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보이 카펠은 이 가구를 어디서 구입했을까? 런던에서? 아니면 사업가인 그가 세계 여러 곳을 다녔으므로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구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니면 그가 한국에 갈 기회가 있었을까? 이게 한국 가구 확실한가? 혹시 중국가구는 아닐지? 사진으로 봐서는 한국 가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방면에 전문가가 아니여서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카펠이 중국 가구를 한국 가구라고 했을 리는 없었다. 샤넬은 한 번도 카펠의 말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가구의 원산지보다 그녀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이 가구가 혼수 가구였다는 것이다.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았던 유일한 남자 보이 카펠은 그로부터 5년 후인 1919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남불에 머물던 가족(샤넬을 그토록 사랑하던 그도 결혼은 남작의 딸인 이혼녀와 했다)을 만나러 가던 도중 카펠의 차가 커브 길에서 차선을 벗어나면서 추락, 사망하고 만다.

 

36세의 샤넬의 가슴에 평생 아물지 않는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고 사라져간 남자. 50년 후에 샤넬은 이렇게 회고한다.

 

"카펠을 잃으면서 난 모든 걸 잃었다."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 그러나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남자에게서 받은 혼수장을 차마 채울 수 없었던 샤넬의 미신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다.

 

첫사랑 연인에게 받은 한국 가구, '첫공개'

 

나는 이 가구를 직접 보고 싶었다. 샤넬의 조카딸 집에 가서 사진 촬영을 하는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저자가 나중에 전하는 말이 원래 연세가 많으신 분(올해로 82세)이고 파리에서도 한참 떨어진 근교에 사시기 때문에 굳이 방문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대신 조카딸은 저자에게 맏긴 가구 사진을 이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보통 깐깐한 성격이 아닌 이 분이 집안에서 소중하게 간직하는 개인적인 유물의 공개를 허용했다는 것 만도 커다란 성과라는 게 피메이에르의 의견이다. 이렇게 해서 샤넬 전기 작가가 자신의 책에도 이용하지 않았던 사진이 처음으로 한국 독자에게 공개되게 됐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샤넬이 살아있었더라면 한국 가구에 대해서 더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인데,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후 샤넬은 여러 남자를 편력하면서 소설의 여주인공 같은 인생을 살았다. 사업은 승승장구로 성공하고 부와 영화가 항상 그녀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나 부와 영화가 쌓이는 만큼 그녀의 사생활은 계속 비극으로 치달았다.

 

12세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방랑기가 있었던 아버지에게도 버림 받은 샤넬은 1910년, 27세에 어려서 고아원 생활을 같이 하며 함께 고생했던 한 살 연상의 언니 줄리아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듣는다. 자신의 일부를 잃는 듯한 허탈감에서 헤어나기 위해 샤넬은 언니가 남겨놓은 어린 조카 앙드레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키웠다.

 

그러나 소문에 의하면 앙드레는 샤넬의 친아들로 언니에 의해 키워졌다는 설도 있다. 그럴 경우 조카딸인 갸브리엘은 자신의 손녀가 되는 것이다. 본인도 자신이 공식적으로는 조카딸이지만 손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불행했지만 불꽃 같았던 코코 샤넬

 

성공과 고독의 무도회 속에서 죽음의 춤 사슬은 잠시도 샤넬을 놓지 않았다. 1920년, 카펠이 죽은 다음해, 그녀의 막내 여동생 앙트와네트가 다시 자살하는가 하면, 1935년에는 당시의 연인이었던 폴 이리브가 그녀가 보는 앞에서 테니스를 치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일까지 일어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연이은 죽음에 심한 타격을 받은 샤넬은 일에 파묻혔다. 일 속에서만이 죽음과 고독을 지울 수 있었다. 자신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 죽음과 고독을 잊기 위해 불철주야로 일에 몰두했던 샤넬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친구와 지인들에게 쏠렸다.

 

샤넬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들의 독지가 역할을 톡톡히 해냈는데 1929년에 베네치아에서 치러진 디아길레브의 장례비를 전적으로 부담했고, 스트라스빈스키의 '봄의 제전' 작곡을 재정적으로 도왔으며, 장 콕토가 알콜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입원시키고 그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하기도 했다.

 

샤넬은 자신의 재산으로 이렇게 어려운 친구들을 기꺼이 도왔지만 당시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남 몰래 이들을 도와주는게 그녀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샤넬은 한 번도 부에 현혹되어 본 적이 없다. 영국에서 최고의 부를 자랑했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을 한때 연인으로 두었던 샤넬. 공작은 매일 아침마다 과일과 꽃바구니를 한 아름 선물했는데 바구니 안에는 종종 값비싼 보석들이 들어있었다.

 

샤넬은 이런 선물에도 현혹되지 않고 그의 청혼도 거절한다. 이유는 "아무 일 하지 않는 부자들에게서 풍기는 궁색한 권태가 재미없기 때문"이었다. 공작에게서 받았던 그 많은 보석들도 대부분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제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 샤넬은 독일 장교와 사랑에 빠진다. 이 위험한 사랑으로 인해 그녀는 프랑스인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많은 단골들이 그녀로부터 등을 돌린다. 모든 걸 잊기 위해 스위스로 피신해 간 샤넬은 다시 한 번 처절한 고독을 경험한다.

 

영화로 다시 태어나는 샤넬의 삶

 

서서히 샤넬이란 이름이 세인들의 망각에서 잊혀져 갈 무렵인 1953년, 샤넬은 14년의 휴식에 마침표를 찍고 70세라는 나이로 다시 디자이너 사업에 재기한다. 이렇게 해서 1956년에 그 유명한 '샤넬 정장' 스타일이 태어난다.

 

이 시기는 프랑스 여성보다 미국 여성에게 샤넬의 인기가 더 높은 시절이었다. 심플하고 우아한 스타일의 샤넬 스타일은 당시 최고의 스타인 독일 출신의 할리우드 스타 마를렌 디트리히와 재키 케네디가 즐겨 입었는데 1963년 케네디가 암살될 당시 재키가 입고 있었던 분홍색 정장이 바로 샤넬이었다.

 

 

"의상이 거리로 내려오지 않으면 의상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외쳤던 샤넬. 그러나 그 비싼 가격으로 인해 샤넬은 아직도 거리에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샤넬은 1971년 1월 10일, 향년 88세의 나이로 리츠 호텔의 방에서 사망한다. 많은 연인을 두었지만 아무하고도 결혼하지 않았던 마드모아젤 샤넬이 평생 혐오했던 건 휴식과 가족이었다.

     

현재 파리에서 코코 샤넬의 삶을 다룬 영화 2개가 촬영 중에 있다. 지난 9월 15일에 촬영에 들어간 '샤넬 이전의 코코' 제목의 영화는 프랑스 여류 감독인 안느 퐁텐느가 지휘하고 있는데 오드리 토투('아멜리아'의 여주인공)가 타이틀 역할을 맞고 있다. 12주에 걸쳐서 촬영될 이 영화는 내년 봄에 개봉될 예정이다.

 

두 번째 영화는 얀 쿠넹(Jan Kounen) 감독의 '코코와 스트라빈스키, 비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9월 22일 촬영에 들어갔고 내년 봄에 개봉될 예정에 있다. 또한 미국과 프랑스, 이태리 합작의 TV용 영화 '코코 샤넬'이 이미 미국에서 성황리에 방영되었고 현재 이태리에서 방영 중이며 프랑스에서는 조만간 방영될 예정에 있다. 여기에 지금 시나리오 준비 중에 있는 것까지 합치면 현재 4개의 코코 샤넬 영화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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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샤넬, #한국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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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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