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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방학임에도 고향집에 내려 가지 않은 나는 며칠 전부터 봐두었던 남영동 역 근처 가게를 기웃거렸다.

아르바이트? 글쎄 당시에도 아르바이트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시골 촌놈으로 이제 갓 대학교 1학년 새내기였던 내가 아르바이트(돈벌이)로 뭘 할 수 있었을까. 과외 실력은 안 되고 아침 잠이 많은 놈인지라 신문배달도 못해 봤다.

그러던 어느날 전봇대에 붙은 '웨이터 보조 구함, 숙식 제공'이라는 광고지를 보게 되었다. 숙식 제공에 와이셔츠와 넥타이까지 준다니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거기다가 그곳은 룸살롱이 아니던가. 아, 돈주고 한 번도 못 들어가본 룸살롱. 도대체 그곳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인간들이 출입할까, 아가씨들의 몸매는 어떨까 등 돈 벌어 보겠다는 생각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던 나.

잿밥에 눈멀어 드디어 웨이터 보조가 되다

영화 <비열한 거리>의 한 장면.
 영화 <비열한 거리>의 한 장면.
ⓒ 싸이더스 F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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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히 도서관에서 공부 잘하고 있는 친구놈을 꾀어 같이 갔다. 이른바 면접을 봤다. 컴컴한 조명 아래 밤송이 머리를 한 지배인이 다짜고짜 "이름은?" "몇 살?" "앞으로 잘해라" 등 몇 마디 하더니 그날부터 일하란다. 허참, 이리 쉽게 취직이 되다니 역시 형님들 세계는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웨이터 보조 역할은 말 그대로 웨이터를 도와 잔심부름이나 가게 청소 등을 주로 한다고 했다. 그런데 심부름이나 청소만 하는 게 아니었다. 매상에도 상당히 신경을 써야만 했다. 웨이터들은 자기가 맡은 테이블이 몇 개씩 있는데 테이블 별로 매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당일 마감 후 매상이 저조한 웨이터들은 지배인에게 많이 혼난다.

알고 봤더니 한 달 동안 일정 수입을 올리지 못한 웨이터들은 수당은커녕 월급에서 일정 금액을 깐다고 했다. 또 웨이터 보조는 손님들에게 받는 팁 이외에 다른 급여는 아예 없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지배인에게 열나게 깨진 웨이터들은 자기가 관리하고 있는 아가씨들에게 말로 화풀이를 한다. 담배를 질근질근 씹으면서 욕의 종류를 불문하고 씩씩 성질내는 모습에 '어, 뭐야 이거. 이거 잘못 온 거 아녀' 싶어 옆을 쳐다보니 옆에 서 있던 친구놈도 변 씹은 얼굴이다.

팁 이외 수입 없는 노예 같은 보조 생활

"어이 거기 두놈 앞으로."
"예에? 저희요?"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들 너그들이 거지야 주방에서 누가 안주 쳐먹으래."

그러는 순간 퍼버벅! 으… 친구와 나는 어느새 탁자 밑에서 뒹굴고 있었다. 손님이 간 후 테이블 위의 안주를 치우다가 몰래 먹던 걸 본 모양이다. 아니 숙식 제공이라더니 저녁도 주지 않으면서 배가 고파 마른땅콩 하나 먹은 거 가지고 걸핏하면 주먹을 날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얼굴이든 목덜미든 상처가 안 생긴다. 전문가들은 역시 패는 것도 다른 모양이다.

저녁식사는 손님이 끊어질 새벽 무렵 웨이터 보조들이 1주일씩 돌아가면서 하는데 이게 도대체 임오군란 때 밥이야, 아니면 심봉사가 눈감고 한 밥이야. 돌멩이가 나오는 건 부지기수고 설익기도 일쑤였다.

하긴 내 또래 머스마가 한 밥이 온전할 리 있나. 거기다 반찬이라고는 신김치에 멸치대가리 그리고 염소똥 콩자반이 다였다. 하루에 손님들에게 받은 팁은 3~4천원으로 대중 없었다. 어떤 날은 아예 한 푼도 못받는 날도 있었다. 얼마라도 팁 받은 날이면 친구랑 근처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에 소주 한병 시켜 먹으면서 조금만 더 참아 보자며 서로를 위로했다.

1979년 12월 12일, 드디어 일은 터졌다

업종의 특성상 취업(?)을 위해 가게에 들락거리는 애들이 상당히 많았다. 나처럼 웨이터 보조 하겠다는 놈부터 특히 순진하게 보이는 아가씨들도 매일 몇 명씩 면접을 보러 왔다. 아가씨들은 '숙식 제공, 선불 가능'이라는 광고문구에 혹하여 찾아 왔으리라. 사실 남자들도 말이 좋아 웨이터 보조였지 세경 하나 못받는 머슴 같은 처지였다. 와이셔츠와 넥타이도 실은 공짜가 아닌 거금 3만원을 나중에 지불했다. 공짜가 아닌, 사준다는 이야기였단다.

면접 마치고 나가는 남자들 몇 놈 남 영역까지 쫓아가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말해줬다. 나는 수렁에 발 담갔어도 너만은 막아주겠다는 알 수 없는 객기가 솟구쳤다. 물론 눈치껏 아가씨들한테도 이야기를 했으나 대다수가 손쉬운 취직을 마다할 리 없었다. 하지만 거의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나와 친구는 경이롭게도 혹독한 보조생활 보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가씨들과도 어느 정도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주머니에 돈은 한 푼도 없다. 모이지를 않았다. 힘들다는 핑계로 새벽이면 술먹고 피우지도 않던 담배도 피우면서 건방을 부렸다. 하긴 그 바닥에서 술, 담배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그쪽 세계에서 손을 털고나올 사건이 발생했다. 그 운명의 날은 바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켜 탱크를 몰고 한강다리를 건너 오던 날. 아닌 밤중에 갑자기 가게 안으로 손님이 몰려 들었다.

엥? 그게 팁이 아니라 술값이었다고?

영화 <비스티 보이즈>의 한 장면.
 영화 <비스티 보이즈>의 한 장면.
ⓒ 와이어투와이어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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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못건너게 해서였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날 룸살롱은 대박이 났다. 테이블마다 최소 5천원 이상의 팁이 내 손에 쥐여졌다. 하지만 짜릿한 그 돈맛의 느낌도 오래 가진 못했다. 새벽 늦도록 손님이 이어져 정신이 없을 무렵, 일이 발생했다.

"야, A번 테이블 손님 계산 어떻게 된 거야."
"하고 가셨는데요."
"뭐야, 하긴 뭘햐 임마. 빨리 가서 그 손님 잡아와."

아니 뭔소리야. 아까 분명 계산하셨다 그랬는데. 멍한 정신을 추슬러 가게 밖으로 튀어 나갔더니 다행히도 술에 취한 그 손님은 택시를 기다리느라 도로변에 서있었다.

뒤따라온 웨이터가 손님께 계산을 요구하자 "이사람들이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아까 이 친구한테 돈 줬단 말이야. 술 취했다고 사람 뭘로 보는 거야"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 그랬다. 술값으로 건네준 손님의 돈을 나는 팁인 줄 알고 '인마이포켓' 했던 것이다. '살다보니 오늘같은 날도 있구나. 거금 3만5천원을 팁으로 주신 하해와 같은 손님, 그저 만수무강하시고 매일매일 발걸음 하여 오늘같은 날만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랬건만 팁은 국물도 없고 그 돈이 술값이었단다.

그날만큼은 가슴과 목덜미에 표시나도록 맞았습니다. 웨이터의 피같은 돈을 갈취한 파렴치한 보조놈을 깍두기 형님들이 가만 뒀겠는가. 가게 안 웨이터들이 돌아 가면서 나를 팼다. 그리고 새벽녘, 숙소 안 모든 사람들이 다 잠든 걸 확인 후 카운터 뒤쪽에 있던 장식장에서 몰래 양주 한 병을 훔친 나는 친구놈과 눈물의 '쇼생크 탈출'을 감행했다.

아들놈이 나 몰래 그런 곳에서 알바를 한다면?

어느덧 30년 다 되어가는 내 젊은 날 웃지 못할 기억의 한 조각. 아르바이트라고 또는 사회생활이었다고 이야기 할 만한 가치도 없는 야화(?)였기에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기심 많고 겁없는 젊음이 있었기에 난, 그당시 룸살롱이라는 곳에서 색다른 경험을 해 봤으리라.

그런데 만일 내 아들놈이 나 몰래 그런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안돼…. 안 된다. 일교야! 아비 하나만으로 족하다. 제대해 돈 궁하더라도 그곳은 돈 안 되는 곳이니 차라리 책이나 열심히 파라 알았제?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하고 쌉싸래한 기억' 응모



태그:#얼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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