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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너 어떻게 엄마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지난 3월의 어느 주말. 내가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했을 때 어머니께서 처음 보이신 반응이었다.

"내가 네 용돈을 안 주는 것도 아니잖아!"

사실 그랬다. 복학생인 나는 부끄럽게도 집으로부터 한 달에 40만원씩 용돈을 꼬박꼬박 받아 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학교 생활하면서 읽고 싶은 책도 사보고, 가끔 친구들과 술도 한 잔 하고, 여자친구도 만나다 보면 돈이 턱없이 부족한 것을.

"위험한 거 아니에요. 그냥 피만 몇 번 뽑으면 돼요. 이미 다 검증된 약이라니까."

1시간 동안 설득에 설득을 거듭한 끝에 간신히 어머니를 납득시켰지만 솔직히 나도 내 말에 확신을 하기 힘들었다. '생물학적 동등성 실험'이라는 어려운 이름만큼 각종 의학용어로 도배된 설명서를 이해하는 것조차 내겐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방'에 한 달 용돈에 준하는 거금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유혹은 뿌리치기 힘든  것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이 위험천만해 보이는 '실험알바'에 도전하기로 했다.

피 한 방 뽑으면 한 달 용돈

하지만 내 의지와는 별개로 이 실험 알바에 선발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대학병원에서 하는 '생물학적 동등성 실험'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혈액병리검사·혈액화학검사·뇨검사 등 다양한 건강검진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피실험자'로 선발되는 인원은 건강검진을 받은 전체 60여 명의 남자 중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생물학적 동등성 실험에 지원한 지원자들의 면면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과연 피를 뽑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마른 사람들과 정반대로 체격이 건장하거나 뚱뚱한 사람들까지.

더욱 놀랐던 것은 30~40대 아저씨 지원자들이었다. 20대 대학생들이야 고정된 수입이 없고 젊으니까 한 번쯤 해볼 만하다지만 그 분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젊은이들 사이에서 못내 어색해 하시던 한 아저씨의 씁쓸한 웃음에서 말 못할 슬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나 역시 초조함에 시달렸다. 피실험자 선발을 위한 건강 검진이 끝나고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고민과 '몸에 이상이 발견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 가지의 상반된 고민이 나를 괴롭힌 것이다.

다행히도 테스트가 끝난 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토요일 오후 6시까지 서울의 한 대학병원 10층으로 집합하라는 '지령'이 이메일을 통해 내려왔다. 건강검진을 통과하고 '피실험자'로 선정된 것이다. '하긴 하는구나' 하는 불안감과 아직 젊고 건강한 내 몸을 써먹을 수 있다는 '뿌듯함'이 교차했다. 마치 군대 가기 전에 신검을 받고 1급이 나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베개에 이불까지? 오버한다' 싶었지만

정해진 시각에 대학병원에 도착한 후 이미 와있었던 참가자들의 겉모습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운동복 같은 편한 차림새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서로의 시선을 애써 피하는 모습이 뭔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커다란 쇼핑백 등에 베개며 이불 등을 챙겨온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이 나와 2박3일을 같이할 사람들이란 말이지. 근데 겨우 두 밤 자는데 뭐 베개까지 챙겨올 필요가 있을까? 군대 있을 때는 한겨울에 일주일을 산 속에서에서 자도 멀쩡했는데 말야.'

속으로 그들의 '오버'를 비웃었지만 그건 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편안한 침대 병실이 아닌 세미나실처럼 휑하니 빈 방에 갇혀 2박3일을 버티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간이침대를 빽빽이 펼쳐놓은 잠자리는 군대 시절의 야전 텐트만큼이나 불편하고 힘들었다.

일면식 하나 없던 사람들과 처음 보는 장소에서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 낯선 긴장감으로 뒤척였던 그날 밤은 훈련소에 입소해서 보냈던 첫날밤을 떠올리게 했다. 결론적으로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피 뽑는 고통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팔목에 구멍이 숭숭 나는 것을 막으려는 '배려'로 설치했다고 한다. 그래도 찜찜한 기분은 어쩔수 없다.
▲ 피를 뽑기위한 수혈관 팔목에 구멍이 숭숭 나는 것을 막으려는 '배려'로 설치했다고 한다. 그래도 찜찜한 기분은 어쩔수 없다.
ⓒ 이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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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혈은 매회 10㎖씩 총 12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투약직전 1회, 투약직후 12시간동안 11회 채혈 후 다음날 아침에 한 번 더 채혈 후 끝이 나는 것이다. 그렇게 12회에 걸쳐 120㎖를 채혈하고 나서 받는 수고비는 15만원. 내 피 1㎖당 1250원을 받는 셈이다.

어색하고 불편했던 첫날밤이 지난 후 두 번째 날 아침 드디어 첫 번째 채혈이 시작됐다.

영화 속 마약중독자처럼 팔목에 주사바늘 구멍이 숭숭 나리라는 우려와는 다르게 손목에는 채혈기가 설치되어 채혈 때마다 바늘을 꽂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내 몸 어딘가에 부착된 물체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왠지 모르게 불편함과 이질감이 느껴졌다.

첫번째 채혈 이후에 나눠준 두 알의 알약. 담당의사는 "이미 안정성이 입증된 류머티즘 약"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안정성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알약을 혀밑이나 잇몸 사이에 숨겨놓은 채 삼키고 싶지 않은 충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역시도 쉽지는 않았다. 간호사들이 약을 제대로 삼켰는지 입안을 꼼꼼히 검사했기 때문이다.

채혈은 약을 투여한 직후 2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이뤄졌는데 그 기간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화장실 가는 것까지 금지될 정도로 피실험자들의 모든 움직임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TV를 즐겨보지도 않을 뿐더러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시는 나에게 오직 TV 시청만이 허용되었던 몇 시간은 정말 고역이었다.

그후에는 상대적으로 움직임이나 이동이 자유로워 졌지만 실험장소로 정해진 곳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답답함과 무료함은 피를 뽑는 고통보다도 더 피실험자들을 힘들게 했다.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 '한 방 알바'의 추억

그렇게 2박3일간 총 12회의 채혈이 끝난 후 마침내 병원으로부터 해방되는 셋째 날, 월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하지만 매혈, 아니 채혈로 인한 후유증은 모든 실험을 마치고 병원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후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월요일 당일 제대로 학교 수업을 듣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일주일 내내 무기력함과 피로가 나를 괴롭혔다. 틈만 나면 잠으로 빠져드는 나를 보며, 처음에는 '한 방 알바'를 한 나를 부러워하던 친구들도 하나씩 '못할 짓'이라며 혀를 둘러댔다.

어머님은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며 너무나 안쓰러워 하셨다. 피곤해 하는 나를 보고 저녁때 장어를 사다 구워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죄송스러운 마음에 나 역시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무리하게 돈을 버는 것보다 차라리 좀 더 절약을 할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한 후회와 함께 '생물학적 동등성 실험'이라는 '한 방 알바'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물질적으로 대변하는 신체마저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중국소설 <허삼관 매혈기>의 허삼관은 처음에 팔기 위해 뽑은 피를 보충하기 위해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 잔을 먹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 잔을 사먹기 위해 피를 뽑는다. 나 역시 허삼관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내가 그렇게 고난의 일주일을 보내면서 하나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아, 맞다. 이 실험은 2박3일씩 두 번이었지. 이번 주 주말에 한 번 더 가야 하는구나…."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



태그:#알바, #생물학적동등성실험, #실험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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