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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쌓인 가리왕산. 산삼이 많아 심마니들의 많이 찾는 산이다.
▲ 가리왕산 자락. 구름에 쌓인 가리왕산. 산삼이 많아 심마니들의 많이 찾는 산이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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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전 꼭 이맘때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고, 1980년이었습니다. 방학을 맞은 악동들. 공부는 뒷전이었고, 어떻게 하면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빠질 수 있을까만 궁리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학교 가겠다며 집나온 악동들, 산으로 산삼 캐러 가다

졸음이 살살 몰려 오는 오후 시간, 졸음을 견디지 못한 몇몇 아이들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했습니다. 깨어있는 아이들이라고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잡담을 하거나 그도 심심해지면 집으로 가겠다며 학교 담장을 넘었습니다.

"공부하기도 싫은데 산삼 캐러 갈래?"

공부를 지극히 싫어하던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친구의 말에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산삼?"하고 합창으로 물었습니다.

"그래, 산삼. 돈도 벌고 좋잖아."
"어디로 가는데?"
"가리왕산에 가면 산삼이 널렸대. 거기로 가자."

어린 시절을 가리왕산(1560m) 자락에서 보냈던 친구가 말했습니다. 가리왕산에 산삼이 많다는 소문 정도는 어릴 적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산삼을 수십 뿌리씩 캐 횡재를 했다는 소문 또한 심심찮게 들려오던 때였습니다.

"좋아. 근데 언제가지?"
"쇠뿔도 단숨에 빼랬다고 낼 아침에 가자."

우리의 산삼 캐는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행동하기로 한 아이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네 명. 일정은 2박 3일로 잡았습니다. 이틀 동안 먹을 쌀과 라면과 담요 등은 각자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텐트도 가져 가야 하나?"
"버너와 코펠만 챙겨가자. 산에 가면 심마니들이 묵던 산막이 많으니 잠은 거기서 자면 될 거야."

다음날 아침 나는 여느 날과 같이 부모님께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며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대신 이틀 정도 친구집에서 자면서 공부를 할 것이라는 말은 했습니다. 산삼이 아니라 금을 캐러 간다 해도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복장은 교련복이었고, 책가방 안에는 책 대신 쌀과 라면 그리고 산삼을 캘 수 있는 괭이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친구집에서 모인 악동들. 다른 친구들이 학교로 향하는 시간, 우리는 가리왕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읍내에서 30분 걸려 가리왕산 입구 회동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책가방을 들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산삼 캐러 갔던 그 시절 산삼 구경은커녕 굶어죽는 줄 알았다.
▲ 괭이. 산삼 캐러 갔던 그 시절 산삼 구경은커녕 굶어죽는 줄 알았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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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들었던 가리왕산은 울울창창했습니다. 우리는 괭이 하나씩을 들고 수색대 군인들처럼 횡으로 서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일행 중에서 산삼을 직접 본 친구는 단 한 명. 그 친구의 설명을 몇 번이고 들으며 산삼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다 산삼과 비슷한 잎을 발견하면 그것을 뜯어 친구에게 보여주며 산삼임을 확인 받고는 했습니다.

"잎은 비슷하지만 이건 오가피야. 산삼은 잎이 5개인 5구가 많지만 4구도 있고 6구도 있어. 그러니 산삼의 잎이 반드시 다섯 개라는 생각은 버려."

친구의 말은 산삼이 뭔지도 모르는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간밤 돼지꿈은커녕 개꿈도 꾸지 않았으니 영험하다는 산삼이 학교까지 빠지면서 산을 찾은 풋내기 학생들에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첫 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 "라면으로 때우자"

산을 중턱쯤 올랐을까요.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시원하다 싶었지만 빗줄기는 갈수록 굵어졌고 장대 같은 비는 멈출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졸지에 비 맞은 생쥐꼴을 한 악동들. 하지만 산삼에 대한 열망 하나 만큼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배고프다. 밥 해먹자."

한 친구가 소리쳤습니다. 시계를 보니 점심 때가 훨씬 지났습니다. 그 시간까지 산삼을 발견한 친구는 없었고 약초를 잘 알고 있는 친구들만이 산시호나 산당귀, 지치, 더덕, 도라지 등을 몇 뿌리씩 캔 상태였습니다.  

"어, 버너가 안 되는데?"

버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무리 펌프질을 해도 기름이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노즐이 막혔는가 싶어 구멍을 뚫어도 압력이 생겨지지 않았습니다. 난감했습니다. 비는 내리고 밥은 틀렸고, 출발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라면 한봉지씩을 우적우적 깨물어 먹는 것으로 점심 식사를 대신 했습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우리는 비를 맞으며 다시 심마니가 되어 산삼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산삼이 우리를 피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가 산삼을 피해 산을 오르는 것인지, 그 많던 산삼이 다 어디로 갔는지 우리 눈에는 잎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가득했고, 주변은 더욱 어두워만 갔습니다. 이젠 산삼이고 뭐고 머물 곳부터 찾아야 했습니다. 가리왕산을 뒷산으로 여기며 살았던 친구조차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불길함과 불안이 동시에 밀려왔고, 두려움에 집으로 돌아가자는 친구까지 생겨났습니다.

"지금 내려가면 더 위험하니 산막을 찾자.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거야."

산막을 찾아 헤맨 지 두어 시간. 어둠이 가리왕산을 삼킬 무렵에야 우리는 간신히 심마니들이 묵었던 산막을 찾아 냈습니다. 산막은 절벽 아래에 숨겨진 듯 아담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다행히 비를 맞지도 않았습니다. 군불을 땔 수 있게 만든 산막은 얼마 전까지 사용했는지 지붕도 튼튼하게 수리되어 있었습니다.

가리왕산에 오르면 조선조 때 세운 '산삼봉표비'가 있다. 산삼이 많다는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다.
▲ 가리왕산. 가리왕산에 오르면 조선조 때 세운 '산삼봉표비'가 있다. 산삼이 많다는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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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과 젖은 담요를 말리기 위해서라도 우선 군불을 때야 했습니다. 그러나 비 내리는 산에서 마른 나무를 구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궁하면 통하는 게 있는 법이라 했던가요. 한 친구가 소나무 관솔을 구해왔습니다. 관솔은 송진으로만 되어 있어 비에 젖는다 해도 불이 잘 붙어 예전엔 등잔 대신 어둔 밤을 밝히는 데 쓰이기도 했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송진을 비행기 연료로 쓰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여 송진을 채취하기도 했습니다.

2박3일이 5박6일로..."하산하자, 이러다 굶어 죽겠다!"

관솔에 불을 붙여 군불을 지폈습니다. 흙바닥으로 된 산막은 곧 따끈해졌으나 문제는 밥이었습니다. 버너는 어디가 고장났는지 사용조차 할 수 없었고, 결국 궁궐 음식처럼 산막을 덥히고 난 숯불에다 코펠을 올려 놓고 밥을 해야 했습니다.

비는 그날 밤을 꼬박내렸습니다. 다음 날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고, 우리는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가리왕산을 돌아다니다 밥 때가 되면 산막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이틀 밤을 보내고 나니 쌀이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라면 다섯 개. 비는 여전했고 산삼은 구경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심봤다!"를 외치지 못했으니 하산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비가 그치면 산을 내려가기로 하고 산삼을 찾아 나서길 또 이틀. 그 사이 네 명이나 되는 우리는 라면 하나로 한 끼를 때워야 했습니다. 한참 먹을 나이인 고등학교 2학년. 물을 가득 붓고 고추장을 푼 다음 라면을 끓였습니다. 아무리 오래 끓여도 라면은 라면. 라면보다 국물을 더 많이 먹어야 하는 식사는 우리의 허기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나흘밤을 보냈습니다. 밤이면 멧돼지들의 울음소리가 산막까지 들려왔고, 다음 날 아침 숲으로 들어가면 멧돼지 흔적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하나의 라면까지 해치운 닷새째 밤. 며칠동안 쏟아붓던 비가 서서히 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어느 순간 바람이 휭하니 불더니 발 아래로 깔려있던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구름이 걷히자 산 아래로 불빛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골짜기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야, 비가 그쳤어."

허기에 지쳐 산막에 누워있던 친구들이 밖으로 나오며 환성을 질렀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구름이 걷히며 하늘엔 수많은 별이 동시에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 별이 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사람들처럼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살았다!"를 연발했습니다.

가리왕산으로 산삼 캐러 갈 때 오른 길.
▲ 가리왕산. 가리왕산으로 산삼 캐러 갈 때 오른 길.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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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우리는 날이 밝기 무섭게 책가방을 챙겨 산막을 떠났습니다. 산삼에 미련이 많았던 친구들은 산을 내려가는 중에도 산삼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습니다. 허기를 견디기 힘들었던 나는 걷는 일조차 힘겨워 자주 미끄러지고 넘어졌습니다. 사흘 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라면 국물밖에 없었으니 배가 고픈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돈 안 벌어도 좋으니 어미 속 좀 그만 썩여라"

산을 다 내려갈 때까지 나는 몇 번이나 넘어졌고 마을에 도착하니 허기가 져 맑은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급한 김에 친구집을 찾아 갔습니다. 친구는 학교에 가고 없었고 친구 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우리를 맞이 했습니다.

"학교 안 가고 어디 갔다 오는 게냐?"
"산삼 캐러 산에 갔다가 오는 중인데 배가 너무 고파 찾아왔습니다."

친구 어머니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끌끌 차더니 기다리라고 하고는 불(가스레인지가 없던 시절이라)을 때 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친구 어머니는 밥이 되기까지 먹으라며 미숫가루를 한 양동이 타 주었습니다. 배가 고팠던 우리는 그것을 게 눈 감추듯 비워냈습니다.

우리는 무쇠솥 가득 지은 밥을 싹싹 긁어 먹고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며칠 간 내린 비로 강물이 범람했고 산사태로 목숨을 잃은 이도 있다는 얘길 친구 어머니께 들었던지라 집 사정이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아들이 사라졌다며 난리가 났습니다. 어머니는 학교 간다고 나간 아들이 닷새가 되어도 연락도 되지 않자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며 파출소에까지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날 어머니는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 오기라도 한듯 아들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쾅쾅 치며 울었습니다. 한참 울던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대체 어딜 갔었기에 몰골이 이 모양이냐고 물어왔습니다.

"산삼 캐러 가리왕산에 갔었어."
"뭐! 산삼? 아이고, 이 놈아 비 난리 통에 누가 그런 거 캐오라 시켰냐. 돈 안 벌어 와도 좋으니 제발 어미 속 좀 그만 썩여라. 응?"

뜬 구름 잡겠다며 산에 들어갔다 나온 그날 밤엔 아버지께 무척 혼이났습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산삼이냐. 산삼이."
"돈 벌어 효도하려고 그랬는데…."
"학생이 공부 잘하는 게 효도지 돈 버는 게 효돈 줄 아냐?"

다음 날엔 담임선생님에게 불려가 매를 맞았습니다. 학교를 빠진 죄로 엉덩이를 몇 대나 맞았고, 그 아픔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 후론 누군가 산삼을 캤다는 말을 들어도 가리왕산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가리왕산을 나이 마흔을 넘긴 나이에 다시 찾아 들었습니다.

가리왕산 자락에 둥지를 튼 지 3년이 되고 있지만 지금껏 산삼을 캐겠다며 산을 오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작년 봄 아는 사람이 가리왕산에서 산삼을 12뿌리나 캤다고 했지만 그것조차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심봤다~!" 한 번 해보지 못했지만 그저 멀리서 산삼의 향기만이라도 맡고 살아가는 일이 더 즐거운 탓입니다.

큰 산인 가리왕산은 계곡을 여럿 거느리고 있다.
▲ 가리왕산 계곡. 큰 산인 가리왕산은 계곡을 여럿 거느리고 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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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



태그:#가리왕산, #산삼,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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