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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흘구곡' 시를 쓰셨던 '한강 정구' 선생이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고 유학을 가르쳤던 '회연서원'이에요. 무흘구곡을 찾다가 뜻하지 않게 찾게 된 곳이랍니다.
▲ 회연서원(유형문화재 51호)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258번지 '무흘구곡' 시를 쓰셨던 '한강 정구' 선생이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고 유학을 가르쳤던 '회연서원'이에요. 무흘구곡을 찾다가 뜻하지 않게 찾게 된 곳이랍니다.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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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여기가 회연서원이구나!"
"맞다. 접때, 작은리 갈 때 이정표에서 봤던…."
"이야! 여기였구나. 생각보다 꽤 크네?"

깜짝 놀랐어요. 우리는 '무흘구곡'을 이틀 동안 찾아다녔거든요. 마지막 남은 '1곡 봉비암'과 '2곡 한강대'를 보려고, 경북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에서 찻길을 따라 내려왔을 때였어요. 낮은 울타리를 치고 꽤 넓게 자리잡은 옛 집을 보고, 둘이 똑같이 멈춰 섰지요. 바로 '무흘구곡' 시를 썼던 한강 정구(1543~1620) 선생이 제자들한테 유학을 가르치던 '회연서원'이었어요.

지난 2월에 두메산골 '작은리'에 갈 때, 대가면에서 이 '회연서원' 이정표를 봤는데, 그땐 이곳이 어디인지 자세하게 몰랐어요. 또 '봉비암'을 찾으면서도 사진 한 장만 들고 왔는데, 회연서원 뒤쪽에 있다는 것도 몰랐지요.

이른 아침인데 다행히 문이 열려 있어요. 덮어놓고 들어가니, 마당이 생각보다 꽤 넓고 크더군요. 앞뜰에 있는 정자 '견도루'가 무척 아름다웠어요. 지은 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았어요. 알아보니, 서원 한복판에 있는 대강당을 빼고는 모두 새로 세운 지 서른 해 남짓 되었다고 해요.

넓은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거예요. 누각이 참 아름답지요?
▲ 회연서원 '견도루' 넓은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거예요. 누각이 참 아름답지요?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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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연서원 앞에는 키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어요. 벌써 400년이 훨씬 넘었다고 하네요.
▲ 느티나무 회연서원 앞에는 키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어요. 벌써 400년이 훨씬 넘었다고 하네요.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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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마당은 생각보다 매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어요. 잔디밭,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올망졸망 작은 열매가 맺힌 나무, 어느 것 하나 깔끔하지 않은 게 없었어요. 그동안 우리가 다녀본 다른 서원과는 달랐어요(다른 곳은 잡풀이 자라고 거미줄이 쳐 있는 곳도 많았지요). 누군가 부지런히 가꾸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작 안마당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걸 어쩌나! 문이 잠겨 있었어요. 서원은 두 겹으로 담을 쌓았는데, 아까 밖에서 본 담장이 있고, 마당 안에 들어오면 또 다른 담장이 있어요. 서원은 바로 이 안에 있지요. 문이 잠겨 하는 수 없이 까치발을 들고 담장 너머로 사진만 찍었어요. 저기 멀찌감치 배 밭에서 누군가 쪼그리고 앉아서 일하고 있었는데…….

'가서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선뜻 다가가지 못했어요.

벌써 두 해 가까이 이곳저곳 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처음에 말문을 트기가 무척 낯설어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본디 가려고 했던 '봉비암'을 찾아갔어요. 회연서원 바로 뒤에 있는 봉비암을 보고 다시 '한강대'를 찾았는데, 여긴 개울을 건너다가 끝내 찾지는 못하고 발만 버리고 되돌아 나왔지요.

회연서원 청지기 정능식씨

한강대를 찾아 다시 서원 앞으로 지나가는데, 마침 아까 풀을 뽑고 있던 아저씨가 서원에서 나오는 거였어요. 반가운 마음에 '한강대'가 어디 있는지 물었더니, 길을 자세하게 알려주고는 우리 보고 잠깐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래요. '이런 반가울 데가….'

그렇지 않아도 서원 구경도 제대로 못 해서 아쉬웠는데 차 대접까지 해주신다니, 잘 하면 서원 안에도 구경할 수 있겠다 싶었죠.

알고 보니 아저씨(정능식.68)는 이 서원을 지키는 청지기였어요. 또 한강 선생의 13대손이 되는 후손이었지요. 아저씨가 내주신 차는 바로 '매실차'였어요. 아침을 먹고 난 뒤에 배가 좀 아팠는데, 놀랍게도 차를 마시고 말끔하게 나았답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담장 곁에 올망졸망 열매가 달렸던 게 바로 '매실'이었어요.

지난날 '한국일보'에서 일하다가 정년퇴임하고 고향에 내려와 회연서원 청지기 일을 하고 있는 정능식씨(68), 한강 선생의 13대손이라고 하십니다. 선생의 후손이라서 그런지 더욱 살뜰하게 돌보고 있었어요.
▲ 회연서원 청지기 아저씨 지난날 '한국일보'에서 일하다가 정년퇴임하고 고향에 내려와 회연서원 청지기 일을 하고 있는 정능식씨(68), 한강 선생의 13대손이라고 하십니다. 선생의 후손이라서 그런지 더욱 살뜰하게 돌보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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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선생이 뜰에 백매화를 100그루나 심었답니다. 이름도 '백매원'이라고 지었다는데, 지금은 다 없어지고 4그루만 남았어요. 이 나무도 거의 죽어가는 걸 청지기 아저씨가 손수 접붙이고 주사를 맞혀 살려냈다고 해요. 아저씨가 회연서원을 지키면서 손수 돌보는 걸 보니, 다른 서원과는 달리 더욱 돋보였답니다.
▲ 매화나무 한강 선생이 뜰에 백매화를 100그루나 심었답니다. 이름도 '백매원'이라고 지었다는데, 지금은 다 없어지고 4그루만 남았어요. 이 나무도 거의 죽어가는 걸 청지기 아저씨가 손수 접붙이고 주사를 맞혀 살려냈다고 해요. 아저씨가 회연서원을 지키면서 손수 돌보는 걸 보니, 다른 서원과는 달리 더욱 돋보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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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신 뒤에 아저씨와 함께 서원에 들어가 이번에는 제대로 구경을 했어요.

작고 작은 산 앞에 조그만 집을 지어
뜰 가득 매화·국화 해마다 늘어나네.
구름과 물을 더하여 그림 같은 자연 속
이 세상에 내 생애 가장 사치스럽네.
(- 한강 정구 선생이 '백매원'을 보며 읊은 시)


"옛날에 한강 선생이 여기에다 '백매화'를 백 그루나 심었답니다. 그리고 이 뜰 이름도 '백매원'이라고 했지요."

이 곳에는 이른 봄이면 하얀 매화꽃이 핀대요. 그 옛날 한강 선생이 백 그루나 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네 그루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다 죽어가는 걸 아저씨가 손수 접붙이고 주사까지 맞혀서 다시 살려냈다고 하는데 뾰족하게 새 순을 내고 있어 무척 뜻 깊게 여겨졌답니다.

또 뜰 앞 담장 곁에 울타리처럼 빙 둘러 있던 매실나무는 나중에 심은 건데, 서원 청지기 일을 하며 아저씨가 돌보는 거였어요.

처음 둘러볼 때, 어쩐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바로 한강 선생의 후손인 이 아저씨가 부지런히 가꾸고 지켜온 까닭이었어요.

아저씨는 <한국일보>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CTS(인쇄물의 제작 공정을 컴퓨터로 제어·관리하는 사진 식자·조판 시스템)'에 앞장섰던 분이라고 하십니다. 정년퇴임을 하고 이렇게 고향에 내려와 회연서원 청지기 일을 하고 있는 거였어요.

한강 정구 선생과 회연서원

회연서원(경북유형문화재 51호)은 본디 한강 선생이 초당(회연초당)을 차려놓고 제자들을 많이 길러낸 곳이랍니다. 무려 344명. 또 한강 선생이 돌아가신 뒤, 숙종 16년(1690)에 임금이 '회연서원'이란 이름을 내려준 '사액서원'이지요.

한 때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 때문에 서원이 훼손되었다가 1977년에 남아있던 건물 '대강당'을 중심으로 새롭게 고쳐 지어 오늘날까지 이른답니다.

백매원에는 상촌 신흠(1523~1597)이 한강 선생을 기리는 신도비가 있어요.
한강 정구 선생은 '본관 청주(淸州), 자 도가(道可), 호 한강(寒岡), 시호 문목(文穆)'입니다.
▲ 한강 정구 선생 신도비(문목공한강선생신도비) 백매원에는 상촌 신흠(1523~1597)이 한강 선생을 기리는 신도비가 있어요. 한강 정구 선생은 '본관 청주(淸州), 자 도가(道可), 호 한강(寒岡), 시호 문목(文穆)'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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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당 마루에는 '편액'이 여러 개 걸려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망우암'은 선생의 으뜸 제자였던 '미수 허목'이 쓴 글씨라고 했어요.

"가만, 미수 허목?"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아! 맞다. 구미 선산에 '송당 박영' 선생 신도비!"


지난해 이맘 때쯤 자전거 타고 선산 나들이 갔다가 박영 선생 정자에 들른 적이 있었지요. 이때 정자 앞에 있던 한문으로 깨알같이 쓴 '신도비'에 새긴 글씨가 바로 '미수 허목'이 쓴 거라고 했던 기억이 났어요.

또 한강 선생의 제자 가운데 '여헌 장현광'도 구미에서는 꽤 이름났고 훌륭한 분이지요.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문화재를 찾다가 알게 된 옛 어른들의 발자취를 이 곳 성주에서도 만나니 더욱 반가웠어요.

'대강당'은 벌써 400년도 훨씬 더 된 건물이었어요. 마루에 따로 마련한 방명록에는 지난날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현제씨가 쓴 글도 있었어요. 해마다 두 번씩 지내는 제사(향사) 때 '초혼관'으로 봉사한다고 합니다.

한강 선생의 으뜸 제자였던 '미수 허목'이 쓴 글씨라고 해요. 지난해 우리가 보았던 '송당 박영'선생의 신도비에도 이분이 쓴 글씨가 있었지요. 낯선 곳에서 우리가 잘 아는 옛 어른들의 발자취를 만나는 건 참으로 반갑더군요.
▲ 편액(망우암) 한강 선생의 으뜸 제자였던 '미수 허목'이 쓴 글씨라고 해요. 지난해 우리가 보았던 '송당 박영'선생의 신도비에도 이분이 쓴 글씨가 있었지요. 낯선 곳에서 우리가 잘 아는 옛 어른들의 발자취를 만나는 건 참으로 반갑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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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대강당과 서재(지경재), 동재(명의재)가 있어요. 회연서원은 본디 초당이었던 것을 한강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임금이 '회연(檜淵)'이란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려준 '사액서원'이랍니다.
▲ 회연서원 가운데 대강당과 서재(지경재), 동재(명의재)가 있어요. 회연서원은 본디 초당이었던 것을 한강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임금이 '회연(檜淵)'이란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려준 '사액서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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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연서원 숭모각
▲ 숭모각 회연서원 숭모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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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연서원 회연서원 대강당에 있는 편액, 그리고 미수 허목이 쓴 편액. '사액서원'인 회연서원 편액은 많은 사람들이 인조대왕이 쓴 글이라는 이도 있고, 명필가 한석봉이 쓴 글씨라고도 하나, 숙종 임금이 쓴 친필이라고 합니다. 목판을 비롯하여 한강 선생의 유물 1700여 점이 지금 안동 '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 회연서원 회연서원 회연서원 대강당에 있는 편액, 그리고 미수 허목이 쓴 편액. '사액서원'인 회연서원 편액은 많은 사람들이 인조대왕이 쓴 글이라는 이도 있고, 명필가 한석봉이 쓴 글씨라고도 하나, 숙종 임금이 쓴 친필이라고 합니다. 목판을 비롯하여 한강 선생의 유물 1700여 점이 지금 안동 '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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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현제씨는 해마다 두 번씩 지내는 제사(향사) 때에 '초혼관'으로 봉사를 합니다.
▲ 방명록 지난날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현제씨는 해마다 두 번씩 지내는 제사(향사) 때에 '초혼관'으로 봉사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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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도 몸으로 부딪혀야지!

때마침, 아이들이 웅성웅성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백매원 뒤뜰에 있는 선생의 신도비를 구경하다가 서원 안쪽으로 들어오는데, 모두 초등학생들이었어요. 경기도 일산에 있는 초등학교 '문화재 답사' 식구들이라고 했어요. 아이들을 이끌고 온 선생님 이야기에 모두 귀를 쫑긋이 세우고 꽤 진지한 낯빛이었어요.

어린이들이 우리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며 옛 어른들의 발자취를 따라 귀 기울여 듣는 모습이 퍽 대견스러웠지요. 무엇보다 놀라운 건, 강당 대청마루에 아무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올라가는 거였어요. 우리는 이런 문화재를 보면 너무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앉거나 만지지도 못하는데 아이들은 조금도 스스럼 없었어요.

생각해보니, '문화재라고 해서 그저 조심스럽게만 여길 게 아니구나! 이렇게 몸소 겪어보고 몸으로 부딪혀 느껴보는 게 얼마나 값진 일인가? 옛 어른들이 하신 일과 그 뜻을 새기고, 또 이렇게 옛집에 앉아보고 만져보면서 조상의 슬기를 몸으로 느끼고 깨닫는다면 아이들한테도 매우 뜻 깊은 일이겠구나!' 싶었답니다.

청지기 아저씨도 "요즘은 이렇게 손님이 많이 찾아온다"면서 이른 아침부터 청소를 깨끗이 해놓는다고 했어요. 또 "유학을 널리 알리며 많은 유생들을 길러낸 회연서원에서 한강 선생이 하신 일을 새기고, 임금이 이름까지 지어 편액을 내려준 이 곳이 매우 뜻 깊은 곳이니만큼 많은 이들한테 널리 알려야 한다"고 했어요. "지역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문화유산을 더욱 잘 보존하여 '문화관광'으로도 되살리면 좋겠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지요.

선생님과 함께 저 멀리 경기도 고양과 일산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이 왔어요. 대강당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올라가는 아이들을 보고 무척 놀라웠어요. "그래. 문화재도 이렇게 몸소 겪어보고 몸으로 부딪혀봐야지!"
▲ 문화재 답사를 나온 고양, 일산 초등학교 아이들 선생님과 함께 저 멀리 경기도 고양과 일산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이 왔어요. 대강당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올라가는 아이들을 보고 무척 놀라웠어요. "그래. 문화재도 이렇게 몸소 겪어보고 몸으로 부딪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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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무흘구곡'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한강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왔어요. 지난날 선생이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며 이 지역에 '유학'을 뿌리내렸던 회연서원에서 그 옛날 유생들이 공부하던 때를 떠올려봅니다.

'문화재 답사'를 나온 어린이들이 지금 저 대청마루에서 재잘거리며 옛 어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처럼 한강 선생의 가르침을 들으며 가슴에 새겼겠지요? 우리 또한 선생의 발자취를 몸으로 느끼고 보면서 더욱 잘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취재 후기] 회연서원 편액 글씨는 '숙종'의 친필

지금 회연서원 대강당에 걸려있는 편액에 쓴 글씨를 두고 서로 맞지 않는 얘기가 많았답니다. 인조 임금이 쓴 글씨라고 들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거의 명필가 한석봉이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답니다.

그래서 더욱 정확하게 알아야겠기에 이리저리 알아봤습니다. 그 결과, 한강 정구 선생의 13대손이 되시는 어른께 전화 인터뷰로 여쭤봤지요.

정원용씨(84)는 (사)담수회 회장을 5년 동안 맡아오셨는데, 우리나라 전통문화 계승발전에 이바지하고, 윤리, 도덕을 현대사회에 맞게 널리 알리고 펼치는 운동하는 분이시랍니다.

이분께서 자세하게 알려주셨는데, 회연서원이 사액서원이 되었을 때가 조선 숙종 16년(1690)이고, 편액도 숙종 임금이 쓴 친필이라고 밝혀 주셨습니다.

회연서원(檜淵書院), 편액 글씨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이 기사와 함께 숙종 임금의 친필임을 밝힙니다.

또 한 가지 소식도 들려주셨는데, 한강 정구 선생이 마지막에 살던 곳이 대구 사수동이라고 합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앞서 불이 나는 바람에 선생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학문 자료들이 불에 타버려서 몹시 안타까워하셨다고 해요. 지금 대구 사수동에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한강 공원'을 세울 계획이라는 얘기도 들려주셨지요.

마지막으로 도움 말씀을 주신 임노직 국학진흥원 연구원, 한강 선생의 후손이신 정원용 선생님, 정능식 선생님께 매우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태그:#회연서원, #한강 정구, #무흘구곡,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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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자전거는 자전車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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