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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마을은 고립되었다. 

사내들이 말없이 화투 패를 돌리는 동안 

식구들은 쪼그린 채 잠들고 

산으로 올라간 발자국은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핏발이 오른 눈동자에 퍼붓는 눈발, 

뒤따르는 사내는 

주머니 깊숙이 칼을 숨기고 있었다.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툭툭 부러지는 나뭇가지처럼 

앞서 걷던 사내는 쓰러지고 

거기서부터 길은 끊겼다. 

피 묻은 지폐 몇 장이 버려진 자리, 

핏방울은 순식간에 탈색되고 

어느 집 문 앞에서 

그림자 둘이 은밀하게 만났을 뿐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다. 

 

오래 굶주린 검은 새들이 선회하는 하늘, 

눈이 녹을 동안 

부패한 내부를 숨긴 

짧은 평화가 지속되었다. 

 

<시작 노트>

 

순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순백의 눈송이들도 정도를 지나치면 폭력이 될 수 있다. 자칫 허위와 추악함을 은폐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폭설로 고립된 산간마을, 인간의 끝없는 물욕이 빚어내는 한 편의 피의 드라마를 상상해본다. 잠시 동안 하얀 눈이 은폐하고 있는 우리 삶의 피비린내나는 욕망을 생각해본다. 폭설로도 끝내 덮을 수 없는 부패한 내부를 내리는 퍼붓는 눈 속에서 응시한다.


태그:#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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