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청어람 엠앤에프씨


<미스트>는 관객이 장르영화에 기대하는 지점을 정조준한 채 쏠까 말까 농 삼아 희롱을 거는 놀라운 내공의 호흡을 갖추고 있다.

동시에 원작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야심 - 원초적 상황에 처한 군중 안에서 어떤 식으로 정치가 발생되고, 공포가 작동하고, 그것에 기반한 파시즘이 무슨 수로 득세하며, 이 광기의 파국이 결국 개인에게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게 되는 풍경에 대해 - 을 고루 아울러 성취해내고야 마는, 근래 보기 드물게 속 깊은 영화다.

<미스트>를 연출한 프랭크 다라본트의 본격적인 영화계 경력은 <나이트메어 3 - 꿈의 전사>의 각본을 쓰면서 시작됐다. 척 러셀이 연출한 이 영화는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창조적인 살인 방법들이 등장하는, 무척 신나는 프랜차이즈 속편이다.

역시 척 러셀이 연출한 끈적끈적 젤리 호러 <우주 생명체 블롭>, 리메이크판 <플라이> (괴물보다 토사물이 더 많이 나오는, 그래도 꽤 볼 만한)의 속편, 그리고 로버트 드니로가 출연한 작품 가운데 대사가 가장 적은 축에 속하는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도 각본을 맡은바 있다.

그렇게 공포영화의 스토리텔링에 재능을 발휘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중적 사랑을 받게 된 건 <쇼생크 탈출>을 연출하면서부터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그는 뒤이어 한 번 더 스티븐 킹의 원작을 영화화했는데, 그 마저 공포물이 아닌 <그린 마일>이었다.

그러니까 프랭크 다라본트의 신작 <미스트>는 이번이 다른 누구도 아닌 스티븐 킹 텍스트의 세 번째 영화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연출하는 첫 번째 스티븐 킹 원작 공포영화다. 이 영화는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이후 두 거장의 재회’라는 식으로 홍보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쇼생크 탈출>을 사랑한 관객의 대부분은 그 영화의 원작자가 연쇄살인 세인트 버나드나 사람 잡아먹는 쥐새끼,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버린 비행기, 거대한 다리미의 살인, 예수쟁이 엄마 등살에 왕따가 된 초능력 소녀, 놀지 않고 일만 하다 돌아버린 가장의 이야기 따위를 즐겨 쓴 작가라는 사실에 어둡다.

알더라도 그다지 가치 있는 정보라 할 수 없다. <쇼생크 탈출>을 인생 최고의 영화로 꼽는 관객과 <미스트>에 열광할 관객이 겹쳐진다 해도 그로 인한 마케팅 효과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이 사실은 또한 중요하다. <미스트>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원전의 탁월함이 아니라 (다라본트의 공이라 할 만한) 각색의 묘와 연출의 호흡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평화로운 호숫가 마을에 불길한 안개가 들이닥치면서 시작된다. 안개 속에는 뭔가 숨어 있다. 마침 아들과 쇼핑 중이던 주인공(<딥 블루 씨>의 토마스 제인이다. 크리스토퍼 램버트의 복제인간 프로젝트임이 분명한 그는, 역시 화면 안에 괴물과 함께 있어야 인물값을 한다)은 마트 안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안개 안의 그 무엇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

프랭크 다라본트의 각본은 스티븐 킹의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절박한 상황 안의 군중을 재난영화의 문법을 들어 명민한 시선으로 잡아 붙든다(사실 대부분의 괴수물은 재난영화다). 이는 담대하기 이를 데 없는 연출의 공기 안에서 빛을 발한다. 특히 극 초반 마트 안에서 한두 번의 컷만으로 인물들의 관계와 성격, 파국을 암시하는 복선을 진열하는 호흡은 압도적이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괴물의 생김새나 크기, 얼마나 빠르고 잔인한지 여부가 아니다. 외부의 위협에 직면한 인간 군상들의 연대와 분열과 광기를 지켜보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요, 목적이다. 좀비가 안개로 치환됐을 뿐, 중반까지의 설정이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시체들의 새벽>에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복기해보자.

외부 위협의 도래, 완벽하지 않은 정보, 그로 인한 공포, 서로 다른 타입의 리더들이 경쟁하는 상황, 리더를 좇아 대립하는 그룹, 이해관계를 따라 연대하다가도 대립을 거듭하는 군상들, 광기에 점령당한 군중 혹은 개인이 평상심을 되찾았을 때 느끼게 될 미칠 듯한 좌절감. 이 안에 전부 다 들어 있다.

잘 만든 장르영화일수록 현실의 대기를 투영하는 시선은 두텁고 농염하기 마련이다. 요컨대, <미스트>는 현실 정치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극 초반은 이성, 합리를 중시하는 집단과 눈 앞의 실증을 중시하는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채워져 있다. 정황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열증은 (무척이나 장르적인 방식으로) 단죄당하는데, 이는 프레임에 의거한 인간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단단하고 파괴적인지 보여준다.

제일 재미있는 건 괴물이 있다고 믿는 그룹과 없다고 믿는 그룹 사이에서 종말론을 부르짖는 여인(캐리 엄마스럽다)을 지켜보는 일이다. 그녀는 괴물이 있다고 믿는 그룹의 이해관계 위에 무임승차해 장황설을 설파하다가, 나중에는 자기 세를 불려 공포를 광기로, 광기를 권력으로 악용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보여주는데, 이게 어느 나라 정치판(혹은 어느 고등학교 점심시간) 보듯 흥미롭다.

현실에선 어딜 가든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결말을 두고 말들이 많다. 익숙한 방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드로메다 뒤돌려 차기는 더욱 아니다. 이 영화의 문제의식을 ‘조명’이 아닌 ‘성찰’의 대지 위로 가져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선택이라 할 만하다.

말세를 다룬 대부분 영화의 결말이 '밖으로의 확장(세계의 파멸)'을 논하는 반면, <미스트>는 '안으로의 확장(개인의 파멸)'을 통해 내연을 키우는 울림을 전해준다. 진짜 비극을 보여준다. 이게 바로 잘 만든 장르영화가 주는 절반의 묘미다!

나머지 절반은 괴생물체와 맞닥뜨렸을 때의 장면구성과 동선의 합, 연출의 들숨 날숨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영화의 관객은 다음 장면에 어떤 식의 설정이나 효과가 등장할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장르영화 문법이 수십 년간 쌓아온 기시감 탓일 텐데, <미스트>의 경우에는 모든 장치가 부러 그렇게 노골적으로 구축돼 있다. 하지만 이를 깨뜨리는 것마저 장르영화의 쾌감 아닌가.

<미스트>는 그 양단 위에서 관객의 호흡을 배반하고, 충족하기를 반복한다. 1초 후에 펑, 하고 터질 거라 예상하지만 아무 소리 없고, 다음 장면에 관객 시점 방향에서 뭔가 인물을 잡아 챌 거라 생각하지만 그 다음 장면에 뒤쪽에서 잡아채며, 저 사람은 죽겠구나 싶을 때 매우 충격적인 소동으로 끝장을 본다.

방금 뜨끈하게 말린 머리카락으로 명치끝을 간질이는 듯한, 혹은 둘이서 고무줄 양쪽 끝 잡고 눈 감은 채 뒷걸음질 치는 식의 두근두근 쾌감을, 도대체 얼마 만에 제대로 느껴보는지 모르겠다. 이런 건 결코 운으로 조장되는 감정이 아니다. 모든 요소가 장르의 이해에서 비롯되는 정확한 계산 위에 서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전략’이다.

마지막으로 <미스트>는 우주적인 규모의 좌절과 공포를 표현하기 위해, 반드시 우주적인 규모의 제작비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증명해낸다. 안개 속의 괴물을 표현하느라 디테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CG비용 절감, 시종일관 한정된 공간 안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드라마다보니 또한 제작비 절감의 효과가 추가로 발생한다.

그렇게 1800만 달러가 소요됐다. 맥락을 고려하면 저렴한 제작비다. 싸게 뚝딱 찍어야 창작자의 상상력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큰 장사를 할 수 있다는 지혜를 놓치지 않는다(물론 무조건 싸게 찍어서, 이를테면 700만 달러를 들여서 <하우스 오브 더 데드>를 만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난 당신이 <미스트>를 꼭 극장에서 봤으면 좋겠다.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여기서 거론한 대부분의 즐거움이 상쇄되거나, 아예 사라져 버릴 공산이 크다. 특히 안개 속을 헤집는 폐소 공포증의 아찔함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이런 겁박을 늘어놓아도 다운로드 받아 모니터로 영화 볼 사람들 꼭 있다. '극장에서의 영화 소비'를 둘러싼 가치관이 달라서다.

가치관의 프레임이 옳은 명제와 정보마저 차단시켜 버린 탓이다. 그런 자들도 이 영화에 등장한다. 하지만 명심하자. 상황이 첨예하면 할수록 자신의 가치관에 함몰되기보다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통찰의 지혜를 고수할 것. 그래야 비탄의 파국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던져주는 7천원 짜리 울림이자 금같은 깨달음이다.

덧붙이는 글 허지웅 기자는 영화주간지 필름2.0을 거쳐 현재 GQ KOREA 에 재직 중이다. ozzyz review (ozzyz.egloos.com)을 운영하고 있다.
미스트 개봉영화 스티븐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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