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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머우 감독이 영화로 만든 <인생>의 원작자로 유명한 중국 작가 위화의 단편소설집 <내게는 이름이 없다>를 읽었다. <허삼관 매혈기>라는 장편소설로 한국에서도 이미 꽤 많은 고정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로서는 그의 작품을 처음 읽는 것이었다. 처음 만나는 작가치고는 꽤 마음에 들었다.

우선, 그가 펼쳐 보이고 있는 이야기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거창한 서사가 아니라 우리 일상을 잠깐 살펴보거나 옛날 기억을 조금만 되살려보더라도 누구나 마주치게 마련인 사소하고 친숙한 상황들이나 사건들에서 소재를 얻어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신변잡기적인 지리멸렬함이나 구태의연함으로 흐르지 않는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내게는 이름이 없다
▲ 책표지 내게는 이름이 없다
ⓒ 도서출판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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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결은,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발원한 이야기의 흐름을 갑자기 막아서는 부조리하거나 희극적인 상황 또는 사건을 중간에 도입하는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이러한 뜻밖의 장벽에 부딪쳐서 잔잔하게 이어지던 이야기의 흐름은 갑자기 급류를 타게 된다. 그리고 가끔씩은 급류가 다 끝나가는 지점쯤에 그 물길을 되돌리는 반전이라는 웅덩이를 심어놓기도 한다.

타고난 이야기꾼의 솜씨다. 이 작품집의 표제작인 ‘내게는 이름이 없다’를 비롯해서 ‘왜 음악이 없는 걸까’, ‘내가 왜 결혼을 해야 하죠’, ‘충수’ 등이 이러한 방식으로 씌어진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우리 실제 삶 속에서도 익숙한 사건인 친구 아내와의 불륜이나 간통, 어린 시절 추억 속에서 늘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용감한 영웅이었던 아버지의 기억 등이 이 작품들에서는 아주 엉뚱하고 기발한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아무리 엉뚱하고 기발하다고 해도 그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글의 문체가 진부함과 지리멸렬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이야기의 재미는 반감될 것이다. 위화는 이 점에 있어서도 내 마음에 흡족했다. 이 작품집의 첫머리에 실린 ‘십팔 세에 집을 나서 먼 길을 가다’의 첫 부분부터 그랬다.

어찌 된 셈인지 온종일 겨우 자동차 한 대밖에 만나지 못했다. 한낮이었다. 차를 얻어 타볼까 하던 참이었다. 그냥 한번 타보고 싶었다. 차를 얻어 타게 된다면 얼마나 멋질까 싶었던 것이다. 길 가에서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되도록 잔뜩 폼을 잡으며. 운전사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자동차도 제기랄, 운전사처럼 본체만체 휙 지나갔다. 자동차 꽁무니를 있는 힘껏 뒤쫓아 갔다. 그냥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관 걱정 따위는 없었다. 차가 보이지 않자 달음박질을 멈추고 혼자서 하하 한바탕 웃었다. 너무 웃어대면 숨 쉬기가 곤란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얼른 웃음을 멈췄다. 다시 보무도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었지만 내심 후회가 되었다. 방금 멋있게 흔들던 그 손으로 돌멩이를 던졌어야 옳았다. (14쪽)

위화의 글은 이렇게 처음으로 집을 나서 세상을 향해 걸어나가는 18세 청춘의 발걸음처럼 짧고 가볍고 경쾌하다. 이 작품집은 위화가 이십대 후반부터 삼십대 후반에 이르는 10여 년 동안 쓴 단편소설 열 일곱 편을 함께 모은 작품집이다. 그래서 작품에 따라서 보폭에 약간 차이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속도만큼은 마지막 작품 ‘황혼 속의 소년’에 이르기까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생각에 잠겨 느릿느릿 돌아보는 느긋한 산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숨이 턱에 와 닿는 뜀박질도 아닌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이 속도감 있는 문체야말로 위화가 펼쳐놓고 있는 이야기들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숨은 리듬이다. 이에 힘입어 카프카적인 기이하고 부조리한 상황도 전혀 심각한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되고 코미디처럼 우스꽝스럽고 희극적인 사건도 현실성을 조금도 결여하지 않은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재미나 문체의 경쾌함도,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우리가 마음 깊이 끌리지 못한다면 그렇게까지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는 못할 것이다. <내게는 이름이 없다>는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모자라고 조금씩 비어 있는 지진아이며 미숙아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라고 놀리고 학교 친구들이 겁쟁이 쥐새끼라고 비웃고 자기 친구와 몰래 간통한 아내가 목석이라고 경멸해도 고스란히 그 수모를 견딘다. 그들은 그런 이름 말고 내 진짜 이름은 따로 있다는 것을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진짜 이름을 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 편에 자신 역시도 가담하게 되는 것임을 그들은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서 아주 오랫동안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실은 내가 개를 죽인 거다. 쉬아산의 침대 밑에 숨어 있는 개를 내가 불러냈기 때문에 개가 목 졸려 죽은 것이다. 그들이 나를 라이파라고 불렀을 때 심장이 쿵덕쿵덕 뛰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침대 밑에 숨어 있던 개를 불러낸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아주 정신없이 마구 흔들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맹세했다. 나중에 누가 라이파라고 부르더라도 절대로 대꾸하지 않을 거라고. (70쪽)

이 작품집의 표제작 ‘내게는 이름이 없다’의 마지막 부분이다. 떠돌이 개를 길들여서 함께 살던 바보 라이파는 마을 사람들이 개를 잡아 먹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침대 밑에 숨은 개를 불러내 달라는 쉬아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 동안 숨기고 있던 그의 진짜 이름이 불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앞으로는 호명에 절대로 대답하지 않겠다는 바보 라이파의 결심은 자신이 저지른 뼈아픈 실수에서 얻은 체험의 산물이지만, 다른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소심하고 나약하고 겁 많고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한심한 인물들 역시 이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진짜 이름은 숨긴 채,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바보니 쥐새끼니 목석이니 하는 가짜 이름을 기꺼이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어찌 보면 답답한 노릇으로 여겨지고 패배주의적인 모습으로도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노련한 솜씨에 힘입어 우리는 그들이 숨기고 있는 진짜 이름들을 들여다볼 수 있기에, 우리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그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은 우리 마음에 따뜻하게 품게 된다.

몇 년 전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가 이 작품집을 두고, ‘작가의 따뜻한 눈길과 푸짐한 입담이 아니면 구제받기 어려운 구차하고 따분한 위인들’로 이루어진 ‘천태만상 소시민 열전’이라고 평하면서도 위화의 소설들에 나오는 허름한 인물들을 매력적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터이다.

하루 만에 <내게는 이름이 없다>를 다 읽고 나서 책장을 덮으려니까, 묘하게도 내 마음을 끄는 허름한 인생들이 내게 물음을 건네 온다. 너도 우리처럼 그런 허름한 인생 중의 하나이지? 그래서 너도 우리가 마음에 드는 거지? 나는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의 부인하지 못함이 전혀 부끄럽거나 쓸쓸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정답고 기껍게 여겨지는데, 이거야말로 이 책을 읽는 진짜 즐거움이다.

덧붙이는 글 | <내게는 이름이 없다>

ㅇ 위화(余華) 지음
ㅇ 이보경 옮김
ㅇ 도서출판 푸른숲 펴냄
ㅇ 2판 1쇄 2007년 9월 3일
ㅇ 값 10,000원



내게는 이름이 없다

위화 지음, 이보경 옮김, 푸른숲(2007)


태그:#위화, #내게는 이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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