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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주의보

 

우유배달부가 지나간 아파트 단지,

경비실의 인터폰이 몇 번 울리다 말고

쓰레기 적재함을 뒤지던 고양이 한 마리가

재빨리 안개 속으로 뛰어든다.

선잠에서 깬 경비원의 손전등은

짙은 안개를 뚫지 못한 채

이내 깊은 어둠 속으로 잠기고

 

고층 아파트 단지 몇 층에선가

마지막 남아있던 불빛이 꺼진다.

누군가 간밤에 게워 놓은 엘리베이터의 토사물,

낯을 찡그리며

어두컴컴한 계단을 걸어 내려오던

검은 장갑의 사내는

어느 집 문 앞에 놓여있는 우유팩을 주워든다.

 

공복의 위장 속을 훑고 내려가는 우유의 서늘한 촉감,

목장에서 막 배달된 신선한 안개가

사내의 몸 구석구석으로 번지는 동안

고층 아파트 몇 층에선가

어둠 속 홀로 누워있는 여인의

몸 밖으로 흘러나온 피가

서서히 굳기 시작하고

 

어둠이 걷히면서 안개는 더욱 뚜렷해진다.

오리무중(五里霧中)에 빠진

아파트 연쇄살인강도 사건과

짙은 안개 속에서 발생한

고속도로 연쇄추돌 사고를 전하는

아침 뉴스를 들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안심할 뿐

 

안개주의보가 내린 아파트 단지,

짙은 안개가 숨기고 있는

홀로 사는 여인의 죽음이

부패한 채로 발견될 동안

자신의 몸 속을 떠돌고 있는

비릿한 내음의 안개의 행방에 대해서는

끝내 아무도 묻지 않는다.

 

<시작 노트>

 

도시의 안개는 동물성이다. 아파트 단지, 굳게 닫힌 철문들 앞에 새벽마다 배달되는 우유이다. 누군가 엘리베이터에 게워놓은 희뿌연 토사물이다. 늙은 경비원으로는 막지 못하는 날랜 고양이같은 강도이다. 차가운 방 어둠 속에 누운 여인의 자궁에서 말라가고 있는 정액이다. 고속도로 연쇄 추돌 사고를 전하는 뉴스 진행자의 무심하고도 건조한 목소리다. 오늘은 승용차를 놔두고 모처럼 지하철을 타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소심해서 선량한 당신의 혈관에 흐르고 있는 피다.

 

그러나 당신은 아는가? 도시의 안개가 꾸미고 일으킨 이 모든 음모와 치정과 사건과 사고는 당신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당신도 공범이라는 것을. 오리무중에 빠진 것은 그들의 삶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삶이라는 것을.


태그:#안개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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