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겨울산 2

 

 세상의 일을 모두 마친 순한 짐승이 누운 산, 헐벗은 잔등 위에 내리는 눈을 다 맞고 있다. 곧추 세운 터럭 몇 올 위에 쌓이는 눈송이, 아직 식지 않은 핏줄이 가 닿는 곳은 어디?

 

 산 밑 동네, 어미 잃은 송아지 눈망울에 가득 차오르는 겨울산 


<시작 노트>

 

멀리서 겨울산을 바라보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공제선 부근이 마치 군데군데 누런 털이 빠진 소의 잔등처럼 보인다. 잎이 모두 떨어진 나무들의 빈 가지들이 마치 소의 잔등에 난 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산 아래 마을, 도축장으로 끌려간 어미 소를 그리워하는 송아지에게도 저 겨울산이 어미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까?

 

이처럼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산간 마을 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이 짧은 시가 빚지고 있는 산은 사실은 서울 강남에 있는 산이다. 한국에서 살 때 내 일터였던 예술의전당 뒷편 산이 우면산(牛眠山), 즉 '소가 잠들어 있는 산'이라는 이름에서 착안 한 시인 것이다.

 

가끔씩 일을 하다가 지치면 나는 건물 밖 광장으로 나와서 고요히 바람 소리만 내고 있는 우면산을 바라보곤 했다. 특히 눈 내리는 날에. 그러면 내 눈에는 소 한 마리가 산에 누워서 마지막 숨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굵어지기 시작하는 눈발은 그 누운 소의 코에서 나오는 뜨거운 마지막 입김을 식혀주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오랜 노역으로 헐벗은 소의 잔등 위에 마지막 힘을 다해 곧추 세운 터럭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때 나는 무슨 소리를 들었던가? 인간으로 환생한 송아지 한 마리가 산 밑 동네에서 울고 있었던가?

 

그 송아지의 눈망울에 가득 차오르던 겨울산이, 이제 여기 초원의 나라 뉴질랜드에서 햇빛 눈부신 북쪽 하늘을 가끔씩 쳐다보는 사내의 눈에도 차오르고 있다.


태그:#겨울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