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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안되오. 아니 저는 그 부탁을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절대로 맡지 않는다구요.”

정말 큰일이라도 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저 사양 정도가 아니라 마치 독약을 먹으라는 것을 거부하듯 고개를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그 때였다. 다시 문이 열리며 능효봉이 들어섰다. 그런데 그의 오른손에 한 여인이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와! 풍형은 좋겠소. 만인이 원하는 운중보주의 자리라니….  복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구려.”

“미친 자식…. 그렇게 좋으면 네놈이나 해라. 아니, 제발 네가 내 대신 맡아다오.”

풍철한이 화풀이 할 상대를 만났다는 듯 소리를 빽 질렀다. 능효봉은 풍철한이 뭐라 하든 전혀 개의치 않고 능글맞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싫소. 천지는 넓소. 왜 내가 이 안에 박혀 평생을 보내야 한단 말이오. 보주께서 풍형을 지목했으니 귀찮은 짐을 나에게 떠넘길 생각 말고 알아서 하시오.”

졸지에 누구나 원하는 운중보의 보주자리가 귀찮은 짐이 된 셈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다섯 제자들은 두 사람을 때려죽이기라도 했을 것이다. 헌데 능효봉이 들어서는 순간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지만 추태감의 얼굴에 경악스러운 빛이 떠올랐고, 얼굴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암향부동화….”

추태감의 입에서 신음처럼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능효봉에게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 들어온 여인이 바로 암향부동화 매교신이었던 것이다.

몸에 달라붙는 얇은 흑의를 입은 탓에 여인의 몸매 굴곡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기분을 들게 할 만도 한데 그것이 아니었다. 우선 그녀의 피부는 검었다. 매우 검어 사람의 살결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한 흉측하고 끔찍해 보였다. 마치 과거에 심한 화상을 전신에 입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검은 면사로 얼굴 전체를 가리고는 있었지만 얇은 흑의 안으로 울퉁불퉁한 것이 보이고, 언뜻 드러난 팔이나 얼굴은 근육이 뒤엉켜있어 매우 흉측해 보였다.

그래서 아마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를 극히 꺼려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여인을 불이 환한 운중각으로 끌어왔으니 그녀로서는 죽기보다 더 심한 수치심을 가질 만도 할 것이었다.

“차라리 날 죽여라!”

매교신이 수치심에 악에 받친 비명을 질렀다. 대개 사람이 이렇게 죽이라고 악을 쓰는 것은 진짜 죽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더 이상 반항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고, 자신의 사정을 조금 봐달라는 의미다. 허나 능효봉은 오히려 잘되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그거 잘되었군. 죽고 싶다는데 네 년 소원을 들어주지.”

순간 매교신은 능효봉의 말에 살기가 스며있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잘못 말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허나 이미 늦었다. 능효봉은 말과 함께 매교신의 뒷덜미를 잡았던 손을 놔주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치는 것 같았다.

퍽! 꽈당!

허나 그것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사혈인 풍부혈(風府穴)을 정확히 타격한 것이어서 그녀는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얼굴을 바닥에 처박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죽여 달라고는 했지만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너무나 간단하게 죽일 것이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잔혹함에 모두 무의식에 두려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놈! 너무 잔인하구나!”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추태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푸훗. 이 년이 무공도 제대로 모르는 노인을 죽이는 것은 잔인하지 않고 내가 이 년을 죽이는 것만 잔인하단 말인가?”

능효봉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남아있었지만 두 눈에는 보통 사람은 마주쳐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돌려진 곳에는 귀산노인의 시신이 있었다. 능효봉은 무엇보다 먼저 귀산노인을 죽인 매교신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결코 그녀를 살려 둘 마음이 없었다.

“기르던 개가 끝까지 본관의 일을 망치려하는구나.”

“푸핫핫. 그래 기르던 개에게 한 번 물려봐라. 이 불알도 없는 돼지새끼야.”

능효봉은 이미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어차피 추태감마저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갑자기 추교학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네 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른을 능멸하려는 게냐!”

능효봉의 시선이 확 추교학 쪽으로 돌려졌다. 갑자기 파고드는 능효봉의 날카로운 눈빛에 추교학은 잠시 당황했다.

“애송이! 가만히 있는 게 좋아. 불알 없는 놈을 애비랍시고 편들지 말고. 돈과 권력이라면 족함을 모르고 먹어치우는 저런 돼지를 위해 죽으려면 지금 당장 덤벼보든가….”

안하무인이었다. 이 자리에는 그래도 무림의 대선배인 동정오우 세 사람이 있다. 능효봉은 그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윗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쪽은 추교학이었다. 온실 속에서만 자란 그였으니 당연히 윗사람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했다.

“네 놈이 정말?”

자신을 바라보는 사부의 눈길이 못마땅한 듯 보이고 다른 사형들마저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말을 하다말고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다. 그리고 추교학은 생각보다 담량이 작았고, 아직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배짱도 없었다.

“돼지! 너는 반드시 내 손에 죽어. 이 자리에서….”

말과 함께 한 발 나서더니 시선을 보주에게 돌렸다. 그 때 상만천이 문득 물었다.

“내 두 딸은 자네 손에 있겠군.”

“내 손?”

능효봉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펴 앞으로 내보였다. 장난스레 빈손을 내밀어 없지 않느냐는 과장된 동작이었다. 상만천이 물었다. 

“죽였나?”

“죽이긴? 살려는 두었지. 당신도 이미 알고는 있겠지만 당신 큰 딸은 맞아야 정신을 차릴 계집이더군. 그래서 전에 말한 대로 홀딱 벗겨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지. 작은 딸이야 그런대로 얌전해 내버려 두었지만….”

“으음.”

부모 처지에서 두 딸의 안위가 걱정은 된 모양이었다. 신음을 흘리면서도 다소 다행이라는 표정을 떠올렸다. 하지만 상교교가 홀딱 벗겨져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말에 신경이 쓰였다.

“아직 시집도 안 간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내 얼굴을 봐서라도 풀어줄 수 없겠나?”

“당신 얼굴? 당신 얼굴을 보았다면 그 자리에서 쳐 죽였을 거야. 당신이 아니라 죄 없는 딸들이기에 그 정도로 해둔 것이지. 큰 딸 걱정은 말아. 시집 못가면 내가 세 번째 첩 정도로 거둘 테니까. 다른 사내에게 시집 가면 그 집안을 말아먹든지 남편을 잡아먹을 계집이니. 나라도 평생 두들겨 패며 데리고 있는 수밖에….”

하는 말마다 상만천의 속을 긁는 소리였다. 아니 모욕이었다. 허나 상만천은 턱을 씰룩거릴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손해 보는 쪽은 자신이었다. 그제야 능효봉이 시선을 돌리며 입가에 떠오른 능글맞은 웃음을 지웠다. 

“보주께서는 소생의 무례함에 가르침을 주시려는지….”

기껏 할 짓은 다하고는 명색이 이곳 운중각의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는 태도는 아주 정중했다. 어차피 주인이 뭐라 하든 간에 할 짓은 다한 셈이었고, 그저 양해해 달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천지를 마치며 인사말씀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 "짧은 넋두리"에 오려 놓았습니다. 이번 주를 끝으로 성원해 주신 천지를 끝맺습니다. 감사합니다.



태그:#천지, #추리무협, #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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