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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한 번 상상해보자. 당신 상사가 툭하면 당신을 상사 사무실로 불러 지시한다. "목과 어깨 좀 주물러봐." 당신이 남자라면, 여자 상사, 당신이 여자라면 남자 상사라고 상상해보자. 물론 이건 약과다.

 

당신이 일을 잘 했다. 실적이 좋았다. 상사가 또 당신을 불러 칭찬한다. "김 대리 이번 실적이 좋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당신에게 다가오더니 대뜸 얼굴에 뽀뽀를 한다. 이유? 일 잘한 부하 직원 '격려'다. 회식 자리에서도 툭하면 당신 뺨에 뽀뽀를 하려 든다. 이유? 일 잘해 예뻐서다.

 

당신을 아끼는 직장 상사는 주말에도 전화를 걸어 말한다. "지금 우리 집이 비었는데, 놀러 와." 마누라 혹은 남편과 애들이 어디 갔단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루는 당신이 일하는 부서 실적이 최고란 결과가 나왔다. 당신의 상사는 너무 기뻐하더니 갑자기 당신을 와락 껴안는다. 이유? 기뻐서다. 실적을 축하하는 축하 회식이 열렸다. 상사가 당신을 턱 잡더니 와락 달려들어 당신 귀에 뽀뽀한다. 엉덩이도 토닥인다. 이유? 격려하기 위해서다.

 

귀에 뽀뽀하고 엉덩이 토닥이는 게 직장상사의 '격려'?

 

자, 믿어지나? 과연 이 부장님 혹은 직장 상사께선 '아무런 고의성 없이' 오로지 부하 직원을 격려하기 위해서 툭하면 여직원들 귀에 뺨에 뽀뽀하고, 집에 자기 밖에 없으니 놀러오라고 전화했을까? 이 모든 걸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을 '격려'하기 위해서 아무런 '사심' 없이 했다고 믿어야 하나? 이걸 믿는 사람이 바보일까? 믿지 않는 사람이 바보일까? 이걸 믿는 당신, 아직 유치원 입학 전인가 아니면 직업이 '판사'?

 

우리 법원이 그리 판결했다. 여직원들에게 수차례 위와 같이 대하던 대기업 지점장이 드디어 해고됐다. 그 뒤 그는 서울지방노동위에 제소했고, 부당 해고 판정으로 복직했다. 하지만 복직한 그는 다시 다른 여직원을 성희롱했다. 또 과거에 성희롱한 여직원은 만나 회유하려고 들었다. 그런 사실을 안 회사는 다시 그를 해고했다.

 

이번엔 중앙노동위원회도 그를 구제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소송했다. 중앙노동위를 상대로 부당해고라며 구제 소송했다. 1심은 그에게 "해고는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그러자 그는 상소했다. 그리고 서울고법 재판부는 "성희롱"으로 인정되지만, 부하직원이 "격려"로 받아들일 수 있고, "성희롱이지만 해고는 지나치다"고 판결했다.

 

더 정확히 인용해볼까?

 

재판부는 "(중략) 성희롱에 해당한다"며, 그러나 "일부 여직원은 격려의 의미로 받아들일 정도로 원고 행위가 중하다고 보이지 않고, 지점을 책임하는 관리자로서 직원에 대한 애정을 표시해 직장 내 일체감ㆍ단결을 이끌어낸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김씨 행위가 사회적 인습이나 직장문화 등에 의해 형성된 평소 생활 태도에서 비롯돼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이뤄진 것으로 회사의 상벌규정에서 정한 해직요건인 '고의성이 현저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고 연합뉴스가 지난 15일 보도했다.

 

성희롱 했지만 고의성 없으면 성희롱이 아니라는데...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성희롱'이지만 '격려'다. '고의성'이 없다. 따라서 해고 무효다. 재판부는 이렇게 판결했다. 참 신기하다. 동료 여직원을 툭하면 와락 껴안고 귀에 뽀뽀하고, 뺨에 뽀뽀하려 들고, 엉덩이를 두드리는 게 '격려'다? 살다 보니 별 '격려'가 다 있다. '성희롱'이 '격려'라는 말은, 그야말로 '성희롱'을 '격려'하는 일이다.

 

이런 해괴한 '격려' 방식을 들으니 '오죽하면'이라는 생각이 다 든다. 요즘 그 동네에선 여자에겐 뽀뽀와 엉덩이를 만지며 '격려'하나? 전직장의 룸싸롱화인가? 그런데 왜 남자 직원들에겐 뽀뽀하고 엉덩이를 만지는 '격려'를 해주지 않은 걸까? 이건 명백한 성차별이다.

 

또 궁금하다. 요즘 '격려'는 상대방 기분을 좋게 하고, 칭찬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 기분을 급격히 나쁘게 하고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뜻으로 바뀌었나? 칭찬의 비슷한 말인 '격려'가 이리 쓰이는 줄 몰랐다. 이대로라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격려'는 고래도 열 받고 충격 받아 쓰러지게 하시겠다. 성적인 수치심을 유발하는 성폭력인 성희롱이 '격려'면, 그럼 '강간'은 '성교육'인가?

 

현직 판사에게 '석궁'으로 '전치 3주' 상처를 입힌 김명호 교수도 마침 15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4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때도 재판부는 '고의성'이 문제라고 했다. 그 판결을 알리는 기사에 한 네티즌은 이런 댓글을 달았다. "저게 4년형이면, 모기는? 대한민국 판사들 피 빨아먹은 모기는 무기징역감이냐?"

 

하여튼 이번에도 문제는 '고의성'이다. 김명호 교수는 '고의성'이 있어서 '전치 3주'도 징역 4년이고, 이 '뽀뽀'로 격려를 즐기는 김씨는 '고의성'이 없어서 결과는 성희롱이지만, 성희롱이 아니란다. 이유? 문제는 '증거'나 '결과'가 아니라, 고의성이라니까. 이러니 궁금하다. 요즘 사법연수원은 판사 지망생들에게 '독심술' 연수부터 시키시나?

 

재판, 심리학자의 실험장 되다

 

툭하면 여직원에게 뽀뽀하고 빈 집에 놀러오라고 전화하는 남자 상사가 여직원에게 '격려'라면, 친딸에게도 성희롱 하는 인간 아닌 인간들의 '행동'은 어떻게 '격려'가 되지 않는지 궁금하다. 그들이야말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격려'한 것 뿐이지, '고의성'이 없었다면?

 

"성희롱이지만 성희롱은 아니다"라니? 성희롱을 했지만 고의가 아니라서 무죄라니? 이제 이런 농담도 우습지 않다. 살인은 했지만, 살인은 아니다. 왜? 고의가 아니니까. 언제부터 재판이 사람의 마음을 읽어서 그에게 '고의성' 여부를 판단하는 심리학자의 실험장이 됐을까? 그렇다면 '과학수사대' 같은 건 둬서 뭐할까? 그냥 독심술 잘 하는 인물이나 뽑지.

 

성희롱이지만 성희롱은 아닌 '행위'를 일삼는 이들을 '격려'하는 이 판결을 보니, 나 같은 인간은 그 덕분에 고민이다. 직장 상사에게 뽀뽀 같은 아름다운 '격려'도 못 받고 사는 나 같은 인간은, "얼굴이 무기라서 다행이야"라고 살아야 하나? 아니면, 혹시 운이 뻗쳐 '격려' 받을 때마다, 찌릿한 전기 충격이라도 주는 전기뱀장어로 태어나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살아야 하나?


또 생각한다. 이렇게 멋진 재판 한 번 잘 하셨으니, 그분들도 '격려' 차원에서 귀에 뽀뽀를 하거나 엉덩이라도 만져드려야 하는 건 아닐까? '쇼'를 하시면 언제나 공짜로 '격려'해드린다면서? 물론 내가 아니고, 얼굴이 무기인 '떡대' 아저씨들께서.

 

예전에 음주 운전으로 걸린 한 연예인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다." 본래 가수였던 그는 그 뒤 '개그맨'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번에 재판부도 가세했다. "성희롱은 했지만 성희롱은 아니다". 이젠 법원도 개그맨을 키우나?

 

고맙다. 많이 웃었다. 그만 웃겨라. 전 국민을 '웃음을 참는 사람들'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태그:#성희롱, #재판, #판결,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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