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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1권 겉표지
 <추사>1권 겉표지
ⓒ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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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과 추사 김정희가 만났다. 한승원이 누구인가? <아제아제 바라아제> <해산 가는 길> 등으로 한국문학을 움직이던 거장 중 한 명이다. 그가 김정희를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만한 천재라고 불리는 그 남자를 되살린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오해 때문이다.

김정희라는 이름을 떠올려보자. 그가 남긴 이미지는 무엇인가? 글씨를 잘 쓴다는 것이 있다. 그런 만큼 자부심이 강하다는 것이 있다. 뿐인가.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오만하다는 말도 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천재들은 그의 글과 말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가 유배를 간 것도 천재성이 오만함과 만나 그리 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오만한 천재! 그것이 김정희라는 이름과 중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승원이 김정희에게 손을 내민 것도 이런 탓일 게다. 오만한 천재라는 별명 속에 드리워진, 혹은 가려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사람들의 입으로만 떠돌던 소문을 넘어서, 인간 김정희를 탐구하려는 목적에 손을 내민 것일 테다.

그래서인가. <추사>에서 그려지는 김정희는 이제까지 알고 있던, 나아가 믿고 있던 그의 이미지와 여러 모로 다르다. 어떤 것인 다른가?

첫 번째는 그의 천재성이 오만하다고 드리워진 것이 불우한 시대와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추사>에서 젊은 시절 김정희는 자신감이 넘친다. 그의 행보를 보고 있으면 아찔할 정도로 종횡무진한다. 하지만 왜 그런 것인지 보면 볼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정도를 벗어난 것들에 대항하기 위해, '정의'로운 세상을 향해 부러 용기를 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현혹하는 글씨를 깨부수는 것이나 대중을 놀리는 종교를 큰 목소리로 논박하는 것은 공명심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찌할 수 없이, 욕먹을 각오를 하고 나아가는 그런 모양새이기에 안타까움이 드는 것이리라.

두 번째는 그것과 달리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뇌가 보인다는 것이다. 김정희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건만, 친아들은 서자이기에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 양자가 대신 집안을 물려받아야 하는 처지다. 김정희는 둘을 함께 사랑하려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친아들과 밥을 같이 먹는 것도 어렵고, 따뜻하게 말을 섞는 것도 쉽지가 않은 처지다.

김정희는 그것이 괴롭다. 유배를 당해서도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친아들을 생각하면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 한다. 세상을 호령하던 불세출의 천재라 할지라도 '제도' 속에서 어찌할 수 없다. 애끓는 부정을 달랠 길도 없는데 <추사>에서 이것을 본다면 여러 번 놀라게 되리라. 김정희가 아버지라는 사실, 그리고 정 깊은 한 인간이라는 것을 이렇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기도 하거니와 오만함이나 천재성과 같은 파편적인 이미지들에 가려져 있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붓을 드는 김정희의 모습이다. 김정희는 왜 붓을 들었는가? 공명심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 자신의 값어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틀렸다. 김정희가 붓을 든 것은 저 모든 것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붓을 드는 것이다. <추사>로 말미암아 그것을 아는 순간, '오만'이라는 글자는 온데간데 없어진다. 따뜻하면서도 안타까운 '추사'라는 글자가 주는 깊은 여운만이 자리할 뿐이다.

한승원이 김정희를 만나 속 깊은 소설이 나오게 됐다. 한승원도 좋고 김정희도 좋을 일이지만, 그보다는 독자들이 더 좋아할 일이다. 요즘 유행하는 역사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또 하나의 역사소설을 볼 수 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김정희라는 인물의 깊은 속내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추사>는 그런 재미를 주는 소설이다. 역사 소설치고 이 정도라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


추사 1

한승원 지음, 열림원(2007)


태그:#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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