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중에서 생존한 21명의 얼굴사진이 실린 신문을 든 한 시민이 2일 오전 서울 세종로 미대사관앞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피랍자 무사귀환과 미국의 적극적인 노력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아프간 한국인 피랍사건과 관련하여 우리 시간으로 오늘 오후 5시48분부터 7시20분까지 우리 측과 납치단체 측과의 대면 접촉이 있었다. 이 접촉에서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루어졌다. 아프간 한국군의 연내 철군과 아프간 선교 중지를 조건으로 피랍자 19명 전원을 석방하기로 합의하였다."

28일 오후 8시 30분경,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이 탈레반 측과의 '석방 합의' 사실을 발표했다. 19명의 고귀한 생명을 구하게 됐다는 사실에 우선 안도의 한숨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곧 밀려드는 의문이 있다. '석방 합의'라니? 테러단체와 '합의'라니?

'협상 타결' 같은 분위기, 이상하네

천 대변인의 발표를 보면 탈레반 측과의 '석방 합의'를 이번 피랍사태의 사실상 '해결'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랍자 19명 전원 석방에 합의한 것을 피랍자 가족은 물론 국민 모두와 함께 환영한다"고 말했고, 언론과 아프간 정부·우방국·아프간 주둔 다국적군·국제기구 등 국제사회에 감사의 인사까지 보탰다.

마치 정상적인 국가간 '협상 타결' 소식을 접하는 것과 같은 분위기이다. 갑자기 혼동이 온다. 상대는 백주대낮에 도로를 달리던 버스를 총칼로 위협해 세우고 23명을 납치해간 테러집단 아니었던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무고한 인명들의 살해도 서슴지 않은 잔인한 범법자들 아니었던가.

정부가 어쩔 수 없이 직접 협상에 나서게 된 상황까지는 이해한다 하더라도, 이런 식의 협상결과 발표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정상적인 상황전개라면 발표가 이렇게 됐어야 하지 않을까?

"아프간 한국인 피랍사건과 관련하여 오늘 우리 측과 납치단체 측과의 대면 접촉이 있었다. 이 접촉에서 납치단체 측은 아프간 한국군의 연내 철군과 아프간 선교 중지를 조건으로 피랍자 19명 전원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의 이행을 지켜볼 것이다."

하지만 천 대변인의 실제 발표 내용과 형식은 납치단체인 탈레반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고 있다. 실제 피랍자 석방이 이뤄지기도 전에, '구두 약속'만을 근거로 정부는 왜 그런 '신뢰'를 갖게 된 것일까? 탈레반이 이후 갑자기 전술을 바꿀 가능성, 내부 강온파간 갈등, 여러 기만 요소 등 생각할 수 있는 변수들이 아직 얼마든지 있는데도….

'합의'라는 말 속에 숨은 탈레반 방정식

▲ 지난달 25일 아프가니스탄 경찰 차량이 가즈니주의 탈레반에게 살해된 한국인 인질이 발견된 장소에 도착하여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 AP=연합뉴스
여기에 이번 문제해결의 복잡한 방정식이 숨어있다. 탈레반 측이 이번 한국인들 납치를 통해 노린 것은 우선 자신들이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의 '정부'에 준하는 정치적 실체로서 인정받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사태의 중간 지점쯤에서 그런 의도를 간파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외교통상부 당국자들 입에서 "탈레반은 그냥 테러집단이 아니라 5년 동안 정권을 잡았던 세력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8월 들어서이다. 이는 초기대응에서 이 점을 소홀히 보았다는 반성으로도 들렸다.

정부는 사건발생 초기 '정부가 테러단체와 직접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대로 한발 물러서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통한 해결의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대 테러 전쟁'에서 미국의 원칙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는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 측의 요구에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군사행동 검토로 탈레반 측을 자극했다.

사건 발생 후 약 한 달간 현지대책반을 지휘했던 조중표 외교통상부 제1차관은 지난 19일 귀국 직후 브리핑에서 초기 대응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미국과 아프간 정부에 의한 군사행동 저지였음을 시사한 바 있다.

이런 초기 분위기는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의 피살로 이어졌고, 이에 당황한 정부는 급히 대응방향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탈레반 정권과 친했던 국가들 동원

수정된 방향의 핵심은 탈레반을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선 과거 탈레반 정권과 좋은 관계에 있었던 국가와 국제기구, 정치인들을 찾아내 최대한 탈레반을 설득해 주도록 요청했다. 이슬람 국가들은 물론 일본 같은 아프간 원조국들에까지 도움을 청했다. 우선 더 이상의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고, 이어 이들의 중재를 통한 해결의 길을 모색했다.

송민순 외교통상부장관이 지난 25일 전격적으로 중동 3개국 순방에 나선 직후 '석방합의' 소식이 들린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 장관이 방문한 사우디·카타르·아랍에미리트 3국은 탈레반 정권을 최초로 승인한 나라들로 아직도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탈레반은 한국으로부터 하나의 '정부'에 준하는 대접을 받은 셈이고, 그것이 '석방 합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간 내에서 초라한 반군 세력으로 전락한 탈레반이 한국정부와의 협상장에 버젓이 나타나 두 차례나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진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를 제치고 한국 정부와 1대1 교섭을 벌였을 뿐 아니라, 중재역할을 한 이슬람 국가들로부터도 '정치적 실체'를 인정받는 성과까지 거둔 것이다. 청와대의 28일 발표도 그런 탈레반의 요구에 충실한 형식과 내용이었다고 불 수 있다.

국제 테러와 반테러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 아프가니스탄 피랍자 가족들은 31일 오후 경기도 분당 파랍자가족대책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피랍자들의 조속한 석방을 호소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현재 정부의 움직임이나 외신 보도들을 종합해볼 때 이번 '석방 합의'는 일단 별 차질 없이 이행될 가능성이 높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명 구출이 최우선 과제라는 점에서 협상결과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피랍자 21명의 구출로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냉정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한국과 한국인은 국제 테러세력에 정치적 목적을 가장 손쉽고, 완벽하게 달성할 수 있는 '먹잇감'으로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당장 고귀한 생명을 구한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나, 이것이 앞으로 더 많은 한국인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번 사건은 그저 '재수없어 사고를 당한 한국인 21명을 다행히 구해낸' 일과성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한국도 국제테러에 얼마나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지를 이번 사건은 똑똑히 보여줬다. 앞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에서, 혹은 체첸이나 북아일랜드에서,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국제 테러와 반테러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해외 사고에서 개인책임과 국가책임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이런 무거운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더 이상 회피해선 안 될 숙제들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