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추가시간은 3분이었지.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릴 때의 3분은 그렇게 길게만 느껴졌는데, 오늘 3분은 어찌나 빠르게나 가던지 입이 다 바싹바싹 마르더구나. 광훈이가 올려준 공을 동점골 주인공 상호가 머리로 돌려놨을 때 '들어갔다' 싶어서 침대 위를 방방 뛰었는데 상대편 골키퍼는 어떻게 그걸 막아낸 건지. 참 하늘도 무심하시지. 많이도 안 바라고 단 한 골, 한 골이면 되는 거였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탈락하다니 너무 아쉽고, 안타깝고, 아프구나. 무엇보다 휘슬이 울리고 난 후에 TV에 잡힌 너희들 모습을 보자니 참 마음이 착잡하더라. 눈물을 훔치는 녀석, 머리를 쥐어짜는 녀석, 어찌나 패배가 분했던지 손으로 그라운드를 내려치는 녀석. 사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런 거 많이 봐왔던 장면이잖아? 2002년 월드컵 때를 제외하고 우리가 언제 개운한 마음으로 축구 본 적이 있긴 했었나 싶다. 1994년 미국 월드컵, 강호 스페인과 2:2로 비겼지만 볼리비아를 잡지 못하고 2무의 상태로 맞았던 우승후보 독일 전. 초반 3골을 연달아 실점하고도 선홍이형, 명보형의 활약으로 2골을 따라잡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한 골이 부족해서 16강 진출에 실패했었지. "너희들은 역대 최강의 청소년 팀이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히딩크가 이끌던 네덜란드에 5:0으로 졌을 때는 어찌나 허탈하던지. 그날 단체로 응원하겠다고 고등학생 신분에 새벽 4시 친구랑 동네극장으로 달려갔는데 말이야. 그것뿐이겠냐. 작년 독일 월드컵에서 스위스에게 질 때는 정말 분했지. 비기기만 했어도 16강이었는데. 그래 그때도 그랬던 것 같다. 경기 끝나고 어제 너희들처럼 울고, 머리 쥐어짜고, 그라운드 내리치고 다들 그랬었어. 선홍이형, 명보형, 천수, 지성이 전부 그랬었지. 그때도 참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너희들 보며 느끼던 감정만은 못했던 것 같아. 왜 그럴까? 왜 하필 너희들에게 더 동정이 가고 아쉬운 맘이 들었던 걸까? 그건 아마 너희들 실력이 아까워서겠지. 16강이 아니라 8강, 4강을 넘어 결승까지도 갈 수 있을 법한 경기력을 가진 놈들이 겨우 조별예선에서 탈락했다는 게 화가 나서 그랬겠지. 영록아, 상호야, 영성아, 청용아, 기성아. 지금 여기 반응이 궁금하니? 여기선 어느 누구도 너희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아니 오히려 '역대 최강의 청소년 팀이었다' '졌지만 큰 수확을 얻었다' 하는 식이지. 10년 넘게 축구팬으로 살면서 비록 20세 이하의 청소년이라지만 국가대표 축구팀의 패배에 이렇게 여론이 호의적이었던 때가 있었는가 싶다. 왜 알잖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산다는 거. 잘할 때는 구국의 영웅이지만, 못하는 순간 온갖 쌍욕을 들어야 하는 자리라는 거. 오죽하면 '태극전사'라는 이름으로 너희를 부르겠니? 아무리 축구가 총성 없는 전투라지만 나이어린 너희들까지 전사로 몰다니 말이야. 그렇게 축구에 목숨 건 사람들이 왜 'K리그 전사'라는 말은 안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여기는 그래. '죽음의 조'에 걸려서 세 경기 모두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따라잡고 또 경기력으로 그들을 압도한 너희를 사람들은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혹시라도 귀국할 때 어쩌나 하는 마음이라면 마음 푹 놓아도 될 거야. 환하게 웃으면서 친구랑 장난이라도 치고 들어와도 괜찮아. 오히려 형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국하는 너희를 본다면 맘이 아플 것 같네. 얘들아, 혹시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라는 영화를 아는지 모르겠구나. 이 영화엔 참 재미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단다. 이 영화의 감독 비탈리 카네프스키(73·Vitali Kanevski)는 제작비 30만 루블로 단 석 달 만에 이 작품을 만들었어. 제작사는 이 영화로는 도저히 돈을 벌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던지 다른 제작사에 40만 루블을 받고 영화를 팔아넘겼단다. 우리 돈으로 1400만 원 정도의 헐값이었지. 언젠가는 세상 앞에 '화려한 반란'을 일으키길... 그런데 얼마 후 영국의 알란 파커(63·Alan William Parker)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는 완전히 반해 버린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알란 파커의 추천으로 1990년 칸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는 '러시아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황금 카메라 상을 수상했어. 정말 멋지고 통쾌하지 않니? 1400만 원 짜리 정도로 생각됐던 영화가 칸에서 신인감독의 데뷔작에게 주는 최고의 상인 황금 카메라 상을 받다니. 그야말로 화려한 반란이었던 거지. 오늘 경기가 끝나고 축구전문사이트 '싸커월드'에 가봤어. 한 네티즌(ID:ditto46)의 멘트가 너무 기억에 남아서 너희에게 들려주려고 적어 왔단다. "우리보다 더 아쉬운 건 세계의 축구팬들 일 것이다. 더 이상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 청소년 팀의 경기를 볼 수 없을 테니까." 어때? 이제 알겠니? 너희는 그라운드에 엎드려서 울고 있을 이유가 없어. 젊음의 특권 중에 하나가 뭔지를 아니? 그건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시기라는 거야. 어디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같은 나라가 청소년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더냐? 만약 너희가 형편없는 경기력으로 단지 운이 좋아서 16강에 오르고, 8강에 갔었다한들 누가 지금처럼 너희를 옹호해줬겠니? 정말 수고했다. 정말 잘했어. 아쉽고 아프지만 형이 너희에게 해줄 말은 칭찬뿐이다. 너희는 충분히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어. 형은 비탈리 카네프스키의 영화처럼 언젠가 너희들도 세상 앞에 화려한 반란을 일으키기를 기대한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너희가 제대로만 커주면 몇 년 후 부터는 축구 볼 때 편하게 볼 수 있을 것도 같구나. 형은 너희 귀국하면 얼굴이라도 보러 K리그 경기장에 들러야겠구나.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밝은 얼굴로 '축구를 즐기고'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한마디만 할께. 울지마, 일어나, 부활할거야!

월드컵 U20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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