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돌핀스에서 유니콘스로 옷을 갈아입은 인천팀은 정규리그 4위로 간신히 포스트시즌에 턱걸이한 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이글스를, 플레이오프에서는 레이더스를 차례로 물리치며 한국시리즈에 올라섰다. 트윈스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을 맞은 김홍집의 눈물 속에 무너져 내린 지 두 해 만이었다. 정규시즌 9승 9패의 맞수 이글스를 두 판 내리 꺾고, 다시 레이더스에 먼저 두 판을 내준 뒤 기적적으로 세 판을 따내며 올라선 저력의 팀 유니콘스였지만,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상대 해태 타이거즈는 수준이 다른 팀이었다. 그 때까지 이미 일곱 번의 우승이라는 업적을 쌓으며 한국시리즈 무패의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던 팀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선동열과 김성한이 빠졌지만, 나란히 2점대 평균자책점에 10승 이상을 기록한 이대진, 조계현, 이강철 트리오와 이종범을 중심으로 젊어진 선수진은 오히려 여느 해보다도 더 살기등등한 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96년 한국시리즈 4차전, 마무리 투수가 선발 투수로
 정명원 선수의 투구모습
ⓒ 현대 유니콘스 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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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리즈 4차전은 승부의 한 고비였다. 에이스 이대진과 정민태를 앞세워 1승씩을 나눠가진 다음, 승기를 놓고 맞선 3차전에서 이강철에게 완봉을 당하면서 밀려난 유니콘스의 그 4차전 선발투수는 정명원이었다. 이대로 한 판을 더 내준다면 벼랑 끝으로 몰려야 했던 그 순간, 94년부터 내리 세 시즌이나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최고의 투수인 그를 낙점한 것은 당연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1회부터 마운드에 올라선 그를 바라보는 인천팬들의 마음은 사실 착잡했다. 워낙에 두터움이라는 면에서 타이거즈에 쳐졌던 유니콘스의 선발진은 한국시리즈 무대에 이르기까지 포스트시즌 들어서도 이미 일곱 경기를 치르면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정명원이라는 마무리투수의 선발등판은 그 절박함의 반증이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정명원은 역대 한국시리즈와 그 해 포스트시즌에서 특히 불안한 투구를 보이고 있었다. 두 해 전 김홍집과 최창호가 1, 2차전을 차례로 내준 뒤 정민태가 오기의 5이닝 노히트노런을 펼쳤던 한국시리즈 3차전에 구원 등판해 석점의 리드를 지켜내지 못하고 역전을 허용하며 끝내 4연패의 참극을 만들어냈던 것이 정명원이었으며, 0- 0으로 팽팽하게 맞섰던 레이더스와의 96년 플레이오프 1차전 9회말에 구원등판 해 선두타자 박철우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무너졌던 것도 정명원이었다. 포스트시즌에서의 '불쇼'는 사실 그것만이 아니었다. 2연패 뒤 간신히 1승을 올리며 회생한 뒤 나섰던 4차전에서는 다시 9회말 마무리로 나서 보내기번트를 다이빙캐치하려다 안타로 만들어주는 민망한 플레이 끝에 무사 만루를 허용하고서야 간신히 더블플레이 성공으로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런 불안감 탓에 정민태가 조계현과 살 떨리는 1-1의 투수전을 이어갔던 2차전에서 정명원에게 9회 한 이닝이 맡겨졌던 반면, 10회와 11회의 더 중요한 순간은 계투요원 조웅천에게 주어졌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 정명원의 선발기용은, 세 시즌 연속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투수의 저력은 인정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한 점을 지켜낼 것이라는 감독의 믿음이 이미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경기 포수 마스크를 쓴 것은 그 해 단 다섯 경기에서 대타나 대수비요원으로 나선 것이 경력의 전부인 신인 김형남이었다. 주전포수 장광호는 2차전에서 박재홍의 홈송구에 맞아 눈썹 부위를 11바늘이나 꿰매는 부상을 입고 있었고, 11년차 이적생 백업포수 김상국 역시 예상 밖의 잦은 출장 끝에 체력 문제에 부딪히고 있었다. 갑작스레 보직을 바꾼 모험적인 투수기용이었기에 무엇보다도 노련한 포수의 리드가 필요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최악의 조건이었다. 불안한 투구에서 시작해 '노히트노런'으로 끝나
 노히트노런을 성공시키고 포효하는 정명원
ⓒ 한국야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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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초,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정명원은 이종범에게 연속으로 네 개의 볼을 던져 내보냈고, 이종범은 냉큼 2루를 훔치며 정명원을 흔들었다. 2번 동봉철에게도 역시 볼 넷을 허용하며 무사 1, 2루. 3번 홍현우의 보내기번트로 1사 2, 3루. 언제나 그랬듯 정명원의 표정과 몸짓만큼은 당당했지만, 팬들의 속은 달랐다. '요즘 들어 불안하더라니' 싶던 우려가, '그래도 1점대 투수인데'하는 기대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 경기 뒤로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두 해 뒤 (현대는 박경완을 영입하면서 쌍방울에 거액의 돈을 주면서 김형남도 함께 보냈다) 은퇴해버린 포수 김형남이 그날 경기 내내 외쳤던 것은 '낮게, 낮게'였다. 워낙 평소에도 수다스럽고 목소리 크기로 유명했던 그는 볼 배합 따위는 관심사도 아니라는 듯 두 손을 양쪽으로 펴서 연신 아래로 향해 파닥거렸고, 정명원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내내 고개를 끄덕이는 광경이 경기 내내 이어졌다. 좋은 공을 가졌지만 이따금 흥분해서 경기를 그르쳤던 정명원은, 뭔가 보여주겠다는 의지와 큰 무대의 부담감으로 들뜨고 있던 그날 그보다 더 흥분한 목소리로 귀가 따갑도록 '낮게'를 외치는 김형남 덕에 '낮은 공'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덕분이었는지, 정명원은 덤벼드는 타이거즈의 4번 이호성에게 낙차 큰 포크볼을 던져 삼진으로 잡아냈고, 5번 박재용은 파울플라이로 처리했다. 그리고 2회부터 안정을 되찾은 듯 시원스럽게 타자들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한 명의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고, 다시 후속타자의 병살타로 걷어낸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팀 에이스 이대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대진 역시 7회까지 3안타 무실점으로 유니콘스 타선을 틀어막았고, 전광판에는 0이라는 숫자가 두 줄로 달리기하듯 늘어서갔다. 결국 경기의 승패가 갈린 것은 8회말이었다. 선두타자 권준헌이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시작된 기회는 무사 만루에서 터진 박진만과 김인호의 연속안타, 그리고 이숭용의 2타점 안타로 이어졌다. 이로써 현대는 넉 점을 뽑았고, 비로소 경기의 초점이 '노히트노런'의 성공 여부로 옮겨갔다. 끝내 9회초 투아웃, 타이거즈의 29번째 타자로 나선 대타 김재덕을 삼진으로 잡아낸 정명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며 포효했다. 한국시리즈 사상 유일무이한 노히트노런 기록.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대기록이 작성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초반 난조와 상대 선발 이대진의 호투가 없었다면 만들어지기 어려웠을지도 모르는 대기록이었다. 경기 후반까지 승리를 위한 군더더기 없는 승부에 집중하느라, 정명원이 대기록 작성을 의식할 수 있었던 시간을 8회와 9회의 두 이닝으로 줄여주었기 때문이다. 초라한 출발, 화려한 전성기
 94년도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된 정명원
ⓒ 한국야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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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군산상고를 거쳐 원광대를 졸업한 전라도 사나이 정명원은 동갑내기 국가대표 트리오 이강철, 이광우, 조계현에 밀려 연고지팀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지 못했고 실업무대를 기웃거리다가 뒤늦게 김성근 감독의 눈에 띄어 프로무대에 들어설 수 있었다. 계약금 1700만원의 초라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데뷔 첫 해, 단짝 삼총사 박정현, 최창호와 함께 나란히 10승대 -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팀의 첫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사건을 연출했고, 그것은 타이거즈의 신인 3인방 중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돌풍이었다. 그리고 부상으로 건너뛰다시피 했던 이듬해를 지나 91년에 다시 2.25의 평균자책점과 12승 14세이브, 그리고 다시 팔꿈치 부상과 수술로 쉬었던 92, 93년을 지나 94년부터 기록했던 3년 연속 1점대 평균자책점과 4년 연속 30세이브 포인트는 그의 전성기였다. 특히 94년은 정명원의 해였다. 2년을 쉬면서 투심패스트볼과 포크볼이라는 신종무기를 장착했던 그 해, 그는 사상 처음으로 40세이브를 기록하며 마무리투수로서 선동열과 김용수의 업적을 뛰어넘었고, 올스타전에서는 3이닝 퍼펙트 투구로 미스터올스타에 선정되는가 하면 연말에는 투수부문 골든글러브마저 휩쓸어갔다. 그 해 105이닝을 던지며 그가 기록한 평균자책점은 불과 1.36이었다. 경기가 조금 위험하게 흘러간다 싶으면 그는 스스로 불펜으로 걸어 나가 몸을 풀기 시작했고, 언제든 호출이 오면 '몸이 근질거리던 차에 잘 됐다'는 흐뭇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190cm에 가깝던 장신의 그가 올라서면 마운드는 그야말로 산처럼 높아 보였고, 그 꼭대기에서 머리 위로 팔을 휘둘러 내리꽂는 시속 140km대 후반의 직구와 낙차 큰 포크볼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처럼 타자를 윽박지르곤 했다. 게다가 자기 팀 타자들이 빈볼의 협박을 받는 순간이면, 스스럼없이 다음 회에 자진 등판해 너무나도 두드러지게끔 노골적으로 보복하고는 마운드로 돌진하는 상대 타자에게 '와 봐, 다 덤벼'를 외치던 불같은 투지. 그래서 그의 별명은 '인천 소방서장'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불길이 솟으면 달려나와 경기를 마무리 짓는 해결사. 그렇지만 차가운 물이 아니라 맞불을 놓아 중간지대를 새까만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던 영웅. 불길이 솟으면 맞불을 놓던 '인천 소방서장'
 현대유니콘스 코치 정명원
ⓒ 현대 유니콘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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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첫 해부터 약체팀의 어려운 살림을 맡느라 무리한 짐을 져야 했고, 그래서 그가 실제로 마음껏 그라운드를 누빈 것은 그의 프로생활 열두 해 중에서 불과 절반 정도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동안 그는 75승과 142세이브를 올렸고, 통산 2.5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선동열과 최동원이라는 '전설의 투톱'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보다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역대 최고의 마무리투수' 부문에 거론되는 강력한 후보자다. 흔히 마무리투수의 미덕은 냉철함과 안정감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정명원은 '최고 마무리'의 계보에서 독특한 존재다. 그는 김용수가 그랬듯, 냉철한 이성으로 무너지는 팀을 버텨내는 투수가 아니라, 대오의 맨 뒤에서 불같은 투지를 내뿜어 선두를 독려하는, '맨 뒷줄에 자리한 선봉장'이었다. 90년대 중반 돌핀스와 유니콘스는 약한 타선과 강한 마운드라는 특징으로 기억되는 팀이다. 그러나 그 강했다는 마운드 역시 리그 최강이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개 '투수왕국'이라는 별명은 '그 부실한 타선의 지원에도 불구하고'라는 동정표를 업은 위로의 감투였던 셈이고, 팀 평균자책점은 흔히 중위권을 맴돌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밋밋한 팀이 객관적 전력의 대차대조표를 무시한 채 두 번이나 우승을 다툴 수 있었던 미스터리는 역시 정명원이라는 존재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 그는 부실한 팀의 많은 빈틈을 직접 메운 선수였고, 또한 그것을 메울 수 있는 힘인 투지를 자극하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은식 기자는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음식을 매개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우장춘, 씨앗의 힘 씨앗의 희망>(봄나무)을 펴냈고, CBS라디오와 <오마이뉴스>를 통해 연재중인 80, 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정명원 현대 유니콘스 태평양 돌핀스 노히트노런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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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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