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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20주년 기념 최민화 회화전'이 6월 7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충정로에 있는 문화일보 갤러리에서 열립니다.

최민화 화백은 80년대 민중미술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작가 중 한명으로,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추모 행렬을 이끌었던 대형걸개그림 '그대 뜬 눈으로'를 그렸던 화가입니다. 그런 그가 그린 작품이기에, 이번 전시에 출품된 50여점의 그림들은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면서 20년 전 '항쟁의 현장'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벌써 20년이 되었나'라는 생각과 함께 그때를 돌이켜보게 하고, 당시를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항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데 부족함이 없는 전시회입니다.

왜 이 그림에 분홍색을 썼을까

▲ 최민화 <6월9일 출정식Ⅰ> 캔버스에 유채 73×91cm
ⓒ 최민화
출정식에서 구호를 외치며 손을 쭉 뻗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출정식에서 이렇게 손을 뻗을 때 피가 뜨거워진다는 걸 모른다면 그릴 수 없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보는 사람이 그 뜨거운 느낌을 모른다면 화면이 왜 옅은 분홍 계열의 색인지조차 이해하기 힘든, 그런 쉽고도 어려운 그림입니다.

그림에서 연분홍색은 꽃을 그릴 때가 아니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연분홍은 가슴이 떨림을 의미하는 색인데, 그림에서 그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이 쉽기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민화 화백은 이번 전시회에서 연분홍색뿐 아니라 붉은색도 많이 사용했는데, 그것은 색의 효과를 통해 당시의 떨리는 감정, 뜨거운 감정을 나타내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87년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페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전날 연세대에서 열렸던 '출정식' 장면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일보>와 4개 대학 학보사가 공동으로 대학생 1089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6·10 항쟁을 잘 안다'는 대학생이 7.5%, '대략 알고 있다'가 36.6%에 불과해 '6월 항쟁'의 배경을 간단히 설명합니다.

1987년 5월 18일 김승훈 신부는, 같은 해 1월 14일 당시 서울대에 재학중이던 박종철군이 물고문으로 숨진 사건에 대한 정부의 발표가 조작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민통련 사무처장을 지내다 수감된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훗날 국회의원)이 우연히 옆방 고문 경찰들의 대화를 듣고 박종철군의 죽음에 또 다른 배후가 있음을 알고, 김승훈 신부에게 발표를 부탁한 것입니다.

이에 사회 각계각층의 민주인사 150명은 5월 27일 명동성당 맞은편에 위치한 향린교회로 모여, '박종철군 고문은폐조작규탄'과 함께, 4월 13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직선제 개헌논의 유보(4·13 호헌조치)'를 철폐하기 위한 대중집회를 벌이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투쟁일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를 민정당 차기 대통령후보로 지명하려는 6월 10일로 결정했고, 학생들은 하루 전에 연세대에 모여 출정식을 한 것입니다.

▲ 최민화 <6월9일> 캔버스에 유채 46×53cm
ⓒ 최민화
그런데 출정식 시위 도중 당시 연세대 재학생이던 이한열군이 교문 앞에서 최루탄 파편을 머리에 맞고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위에서 밝힌 최민화 화백의 걸개그림 '그대 뜬 눈으로'의 오른쪽 부분에도 그려졌고, 최병수 화백의 '한열이를 살려내라'에도 등장했습니다.

당시 이한열군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목숨을 연명하는 뇌사상태였고, 이 사건은 6월 항쟁을 뜨겁게 달구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 최민화 <4.13 호헌조치>캔버스에 유채 41×32cm
ⓒ 최민화
이한열군이 '호헌철폐'를 외치다 뇌사상태에 들어갔지만, 6월 10일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차기 대통령 후보 선출을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선출된 노태우 후보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손을 치켜 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체육관 위에서는 꽃비가 뿌려졌고,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하면서 '그들만의 축제'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각, 5월 27일에 결성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서울 시청 맞은편 성공회 대성당에서 '민정당 대통령 지명대회가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강력히 투쟁할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성명을 발표한 후 시위를 시작하자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국민운동본부'가 성명에서 부탁한대로 경적을 울리며 시위대에 힘을 실어줬고, 학생들은 애국가와 '타는 목마름'을 목이 터지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인 6월 12일에는, 넥타이를 맨 회사원 1천여명이, 명동성당 근처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평범한 샐러리맨들이었고 누가 부추기지도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참석해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쳤습니다.

이 그림은 시위대에 합류한 '넥타이 부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모습을 통해 시민들의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직설화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넥타이 부대'의 시위참여 소식이 전해지자, 다음 날부터 점심식사 시간을 이용한 젊은 회사원과 시민들의 시위참여는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던 투쟁이 범국민적투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누운 사람들

▲ 최민화 <파쇼에 누워Ⅰ> 캔버스에 유채 136×206cm
ⓒ 최민화
6월 18일에는 수천명의 학생들이, 서울 동대문과 종로 5가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 위에 등을 대고 누웠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런 시위 형태를 본 적이 없어, '연좌시위'라고 표현했습니다.

학생들은 한 여름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누워, 손에 손을 잡고 구호를 외쳤습니다. 앞쪽에서는 '전두환을' 뒤쪽에서는 '처단하라'를 외쳤습니다. '노태우를', '처단하라'도 외쳤습니다. 그런 뜨거운 열기 속의 투쟁이었기에, 화가는 붉은색에 가까운 짙은 분홍색을 사용했습니다.

▲ 최민화 <파쇼에 누워Ⅱ> 캔버스에 유채 61×73cm
ⓒ 최민화
학생들이 길에 누워 구호를 외치자, 경찰들은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 중간으로 들어와 군화발로 짓밟으며 연행했습니다. 이렇게 방독면을 쓴 경찰들을 가리켜 '백골단'이라고 불렀고, 이들은 노태우 정권 때도 기승을 부리다 1991년 4월 26일 시위 중이던 강경대 학생에게 쇠파이프를 휘둘러 숨지게 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백골단과 함께 악명이 높았던 것은 '지랄탄'으로 불리던 다연발 최루탄이었습니다. 눈 앞에서 터지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독성이 강해, 마스크를 쓰지 않았던 그림 가운데 학생은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그림 오른쪽에서 서로 등을 맞댄 채 팔로 껴안으며 연행에 저항하던 모습도 당시 시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도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대의로 뭉쳤기에, 그들은 그렇게 뜨거운 '동지애'로 서로를 감쌌던 것입니다.

백골단과 '지랄탄'이 기승을 부리자, 주요 시위장소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들과 여성단체 회원들인 '어머니 부대'가 나타나, 전경들의 가슴과 투구 그리고 심지어는 최루탄 발사기의 총구에 장미꽃을 꽂으며 '쏘지 마!'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부대'는 백골단이 학생을 연행하려면 그 학생을 둘러싸며 경찰들을 밀어냈습니다. 자신의 아들과 딸이 감옥에서 어떻게 고생하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어머니들이었기에, 그렇게 필사적으로 '나의 자식'들을 보호했던 겁니다.

민주화의 열망을 보여줬던 바로 그 장면

▲ 최민화 <쏘지마라> 캔버스에 유채 25×24cm 1989
ⓒ 최민화
당시 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의 주요도시에서도 불길같이 일어났습니다. 계엄령이 발동될 것이라는 소문, 친위쿠데타가 임박했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독재타도'를 외쳤습니다.

6월 18일 부산에서는 30만의 학생 시민이 서면에 운집해 시위를 벌였고, '5.18'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광주에서도 30만이 모였습니다.

'민주화 열망'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국민본부'에서는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면서, 6월 26일 오후 6시 '국민평화대행진'을 실시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6월 26일이 되자 전국 34개 도시 270곳에서는 2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단하라'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전국의 사찰과 교회에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종을 쳤습니다. 자동차들도 '경적시위'에 동참했습니다.

이 그림은 6월 26일 부산 문현 로터리에서의 '평화대행진' 때, 아직도 누구인지가 밝혀지지 않은 학생이 웃통을 벗고 경찰진압대를 향해 "쏘지마"를 외치며 달려나가는 모습입니다.

이 장면은 당시 <한국일보> 고명진 사진기자(현재 뉴시스 사진영상국장) 찍어 세계 주요언론에 보도되었고, 1999년 AP가 선정한 100대 사진에 포함되었습니다. 인간의 가슴 속에 있는 '민주화 열망'이 어느 정도인지를 몸으로 말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 최민화 <분홍 6.26> 91 x 73cm
ⓒ 최민화
▲ 최민화 <서울역전투Ⅱ> 캔버스에 유채 73×91cm
ⓒ 최민화
'국민대행진'이 진행된 6월 26일, 경찰은 전국에 10만여 명의 경찰병력을 투입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계속된 시위에 최루탄이 바닥이 난 경찰은, 전국에서 시위를 벌이는 200만명을 상대하기에는 무력했습니다.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신세계 앞의 시위에서 경찰을 무장해제시키는 데 성공한 시위대는, 1980년 '서울의 봄' 시위 때 집결했던 서울역 앞으로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곳에서도 무장해제를 당하면서 도주했습니다.

많이 가셔서 그 함성을 느끼세요

이런 전국민적 저항이 계속되자,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6월 29일 '시국수습을 위한 8개항'을 발표했습니다. 정치인 김대중의 사면복권, 모든 양심수의 석방, 언론자유 보장 등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민정당 대표직에서 사퇴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이 발표는 훗날,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노태우 당시 당 대표를 위해 만들어준 각본이었느니, 아니니, 라는 공방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지만, 그것은 '국민에 의한 굴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6월 항쟁을 통해, 유신헌법 이후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대통령이 선출되는 '체육관 간접선거'를 '국민직선제'로 바꾸는, '민주주의를 향한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렇게 진행되었고, 이런 역사적 의미를 갖는 6월 항쟁이기에, 최민화 화백은 당시 현장에서의 기억을 살려 50여점의 그림을 그렸고, 이번 20주년에 맞춰 전시회를 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가셔서 당시의 모습을 보며 6월 항쟁 때의 함성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6월 항쟁 20주년 기념 최민화 회화전' 
2007년 6월7일 - 2007년6월 24일  

문화일보 갤러리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68번지,Tel. 02_3701_5755)


태그:#6월 항쟁, #6월 민주항쟁, #최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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