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누에바 광장에서 시작되는 알바이신 가는 길. 대부분의 관광객이 주로 다니는 'Calle Reyes Catolicos'를 이용하면 편하게 알바이신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 이은비

카테드랄과 왕실예배당을 구경하고 나니 벌써 오후 4시입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산 위에 있는 알바이신 지구를 둘러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알바이신 지구는 알함브라 북쪽에 있는 언덕 전체를 감싸고 있는 오래된 거리로, 알함브라가 지어지기 전에는 원래 그라나다의 왕궁이 이 알바이신 지구 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이 처음으로 요새를 쌓았던 곳이라서 안달루시아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올라가서 저녁 석양에 물든 알함브라 궁전을 보는 것이 굉장한 장관이라지요. 마침 지금부터 슬슬 올라가면 낙조를 감상하기에 적당한 시간이 됩니다. 오늘(2월 14일)은 날씨가 맑아서 멋진 석양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에바 광장에서 시작해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길은 따뜻하고 평화롭습니다. 중앙대로의 복잡하고 현대적인 광경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유럽 여느 거리의 시골 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특히 도자기 상점이나 아랍식 찻집 등이 골목골목마다 문을 열고 있어, 마치 유럽이 아니라 중동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옆으로 흘러가는 강을 내려다보니, 강둑에서는 고양이가 평화롭게 오후의 볕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편안하게 알바이신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겠지요.

갑자기 발동한 호기심

그러나 저는 길 위로 오르면 오를수록, 가파른 비탈길 옆으로 하얀 집이 오밀조밀 늘어서 있는 아름다운 골목들로 자꾸 눈길이 갔습니다. 안달루시아 지방 특유의 하얀 집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이 건물 사이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마치 저를 손짓하는 것 같군요.

저는 갑자기 발동한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제대로 알바이신을 체험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안에서 수 세기에 걸쳐 박해받으며 살았던 무어인들의 애환과 삶을 그대로 느끼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오래된 동네를 걷고 싶었고….

또 무엇보다도 알바이신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냄새를 맡는 것이야말로 알바이신을 제대로 여행하는 일일 테니까요. 간간이 골목 사이로 보이는 알바이신 지구의 안쪽은 모두 주택가여서 굉장히 조용하고 평온해 보였습니다.

결정했습니다. 지도를 보며 호시탐탐 골목길을 엿보던 저는, 돌연 골목 하나로 쑥 들어가서 아무 골목이나 무작정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 대로에서 북적대던 여행객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까 좀 살 것 같습니다. 이제야 참답게 여행하는 느낌이 나기 시작하면서, 저는 힘든 줄도 모르고 좁고 긴 골목을 꼬불꼬불 돌아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될 만큼 아름다운 골목길들이 속내를 열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귀여운 그래피티를 발견하고 혼자 흥에 겨워 사진을 찍기도 하고, 도둑고양이들에게 말을 걸면서 사이좋게 골목을 걸어가기도 했지요.

그런데 대략 글로리아 골목 즈음을 지나쳐 몇 번 더 구불구불하게 꺾어진 뒤, 남의 집 사유지인지 그냥 길인지 구분이 모호하고 미심쩍기 짝이 없는 계단을 몇 개 더 올라가 아마도 알메즈 골목으로 추정되지만 남의 집 뒷마당 같은 어느 좁은 골목에 다다랐을 때였습니다. 저는 돌연 제가, 원래 생각했던 곳에서 엄청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알바이신 지구 안의 건물 장식 중 하나. 마침 비둘기가 성모 마리아의 손 위에 올라 앉았습니다.
ⓒ 이은비
한 5분여쯤 지도를 들여다봤던 저는 스스로 자신에게 말해봤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일단 올라가자!'

당시 저의 단순무식한 생각은 이랬습니다. 위에 성 니콜라스 성당(Catedral de San Nicolas)과 이글레시아 델 살바도르(Iglesia del salvador, 구세교회)가 있으니, 무조건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꼭대기에 다다를 거야.

헌데 이 생각이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사람들 다 만나고 오겠네' 만큼이나 무식한 생각인 줄 당시에는 왜 몰랐을까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큰 길이 나오기는커녕, 점점 골목골목이 좁아지더니 마침내 사람 한 명조차 혼자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좁고 흰 골목들이 계속되는 겁니다.

100여 개가 넘는 골목에선 길을 잃습니다

온통 하얀 담과 건물들 사이에서,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아. 수세기에 걸쳐 세워지고, 또 그 위에 덧세워지고, 다시 또 새로운 이주민들이 들어와 증축하면서 중첩된 골목길을 제가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일까요. 나중에 세어보니 알바이신은, 들어가는 골목만 100여 개가 넘더군요. 저는 지도로 127개까지 세보다가 포기했습니다.

'앗! 이 골목에서 좀도둑들이 양쪽으로 길을 막으면 꼼짝없이 도망도 못가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마음이라는 게 뭔지 바로 그 생각이 들면서 덜컥 겁이 나는 겁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고 물어보겠는데, 사람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간혹 담장 너머로, 혹은 미로 같은 골목 저 너머로 아이들의 웃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입니다. 늦은 오후의 햇빛이 찬란한 금빛으로 하얀 담벼락을 물들이며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돌연 가이드북과 몇몇 개의 여행 사이트에서 읽었던 경고문이 새삼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알바이신은 대낮에도 함부로 골목길을 들어가는 것은 삼가야 한다. 특히 해가 저문 뒤에는 강도나 소매치기, 부랑자들이 다니는 우범지대로 변모하니 해 저물기 전에 떠나는 것이 좋다."

해가 저문 뒤에는 우범지대! 저는 저물어가는 해를 원망스럽게 흘겨본 뒤, 총총거리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아서, 이번에는 아래쪽으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작은 돌담길 옆에 벌렁 누워 오후의 햇살 속에서 오수를 즐기던 들개 한 마리가 잠깐 고개를 쳐들고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잠을 청합니다.

몇 골목을 가로질러, 조금 큰 길이 보이는 곳으로 빠져나왔습니다. 그래 봤자 작은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만한 넓이의 길이지만, 이곳에 내려오니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도 두세 명이 보입니다. 하지만 저 같은 관광객이나 뜨내기는 하나도 없고, 모두 알바이신에 사는 듯한 지역민들뿐. 그야말로 안달루시아 토박이 무어인들이 분명해 보이는, 스페인 사람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한 거주민들뿐입니다.

터덜터덜 무작정 걷고 있는데, 먼지를 날리며 반대쪽에서 오던 트럭이 경적을 빵빵 울리며 지나갑니다. 트럭 안에 타고 있던 무어인 남정네들이 저를 쳐다보며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말들을 외쳐대며 씨익 웃습니다.

으악!! 무섭습니다. 아무도 없던 골목길은 조용하기라도 했지, 이곳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며 뭔지 모를 말로 수군거리는 남정네들을 보니 진정으로 저 자신의 결정이 후회되기 시작합니다.

앗, 외지인이다! 생존본능을 발휘하라∼

바로 그 때, 길 건너편에서 제가 있는 방향의 골목으로 걸어 내려오는 키 큰 청년이 보였습니다. 검은 진에 검은 폴라티,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그 청년이 온통 하얀 알바이신 골목에서 툭 튀어나온 건 참으로 묘한 광경이었습니다. 푹 눌러쓴 검은 모자 밑으로 금갈색 구레나룻이 언뜻 내비쳤습니다.

'앗, 외지인이다!'라는 생각이 후두부를 강타하는 순간, 저는 생존본능을 발휘해 청년에게 "죄송한데, 영어할 줄 아세요(Excuse me, Can you speak English?)"라고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청년이 멈춰 섭니다.

"Sure(물론)."

영어 통합니다! 만세! 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럼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동양인 여자의 기세가 너무나 절박했던지, 청년이 고개를 갸웃, 하더니 마치 치약광고에라도 나오는 사람처럼 만면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또 "Sure"라고 말합니다.

"이글레시아 델 살바도르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는거지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라고 물으니, 그 친구 왈 "그럼 한번 살펴봅시다"라며 자신의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착착 접은 지도를 꺼내듭니다. 아, 이 사람도 저와 같은 처지의 여행객이었군요. 갑자기 안심이 됩니다.

지도를 든 청년이 주변 골목들의 이름을 휙휙 둘러보더니, 지도를 짚어 가르쳐주는군요.

"아무래도 우린 산 아우구스틴 골목 근방에 있는 것 같군요. 앞으로 계속 올라가면 큰 길이 나와요. 큰길을 찾은 후 그대로 타고 올라가다 보면 이글레시아 델 살바도르가 나올 겁니다."

오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 친구는 "괜찮아요. 여기 정말 라비린스(미로) 같아서 저도 몇 번이나 길을 잃을 뻔했으니까요"라고 말하고는 가던 길을 도로 갑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큰 길이 나온다는 말에 희망을 얻고 부쩍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다시금 출발. 얼마나 골목을 헤맸던지 발바닥이 욱신욱신 아파지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뜬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청년이 알려준 길로 올라가니 불과 수분만에 차가 다니는 2차선 도로가 나옵니다. 도로 주변에는 멋지게 지어진 주택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아까 헤매던 어지러운 알바이신 안쪽과는 사뭇 다르군요. 아무래도 이곳은 중산층 거주구역인가 봅니다.

하지만 대로를 따라 올라가기를 10분여 만에 다시 또 복잡한 갈림길이 나왔고, 저는 더 이상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됐습니다. 간간이 알바이신 꼭대기로 가는 버스가 관광객을 가득 싣고는,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가서 복잡한 골목들 사이로 사라지곤 했습니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그냥 내려갈 수는 없어!

▲ 평온해 보이는 알바이신 골목 전경. 그러나 스페인은 소수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무조건 항복한 이슬람 왕과의 조약을 내팽개치고 이곳에서 잔혹한 살육을 저질렀습니다. 알바이신의 하얀 벽에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붉은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 이은비
'아, 나도 버스 잡아탈걸'이라는 후회가 밀려올 때 즈음, 이번에는 모터사이클을 타며 순찰을 돌고 있는 2명의 경찰을 발견합니다. 제가 달려가서 "이글레시아 델 살바도르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죠?"라고 물으니 경찰이 당황합니다. 알고 보니 이 사람들, 영어를 할 줄 모릅니다.

당신들, 그러고도 공무원이야?! 아무리 '살바도르'를 끈질기게 되풀이해도 전혀 못 알아듣는 그들. 그때 머릿속에서 번개같이, 여행책자 419쪽 '긴급현지회화' 실전편-도보여행을 위한 회화 챕터가 생각났습니다.

"메 에 뻬르디도 데 까미노!(길을 잃었어요!)"

캬아. 이 말을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 아무튼 이 말을 하니 그들의 태도가 조금쯤은 더 진지해졌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언어소통이 안 되니 어렵기는 매한가지이지요. 그들 중 한 명이 머리를 쥐어짜며 고통스러워하더니 떠듬떠듬 안 되는 영어로 "Where are you come from?"이라고 묻습니다. 반사적으로 "Korea"라고 대답하니 그들이 더더욱 당황합니다.

음, 이걸 물은 게 아니군. 정정합니다. "플라자 누에바"라고 애초에 이 고생길에 접어들게 됐던 처음 시작부분을 말해주니 그들도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그러더니 뭐라고 대답하는군요. 아마도 '내려가는 길을 가르쳐 줄게'라는 것 같습니다.

안돼. 이렇게 고생했는데 그냥 내려갈 수는 없어! 제가 단호하게 "노! 이글레시아 델 살바도르 플리즈"라고 하니 두 사람은 어깨를 으쓱 한 뒤 손짓 발짓을 동원해가며 친절하게 설명해줍니다만 제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지요.

몇 번째 골목에서 좌측으로 빠지고 직진하다가 다시 몇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라는데 그게 몇 번째인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낙심하면서 경찰관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찰나, 제 시야에 아까 아래쪽으로 내려가던 그 검은 옷의 청년이 다시 길을 돌아 올라오더니 천천히 제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어? 저 사람은 아까 내려가고 있었는데 왜 다시 올라오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관광객이라면 모두 같은 방향으로 올라가는 게 맞겠지 싶어 그 뒤를 따라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 발걸음은 굉장히 빠른 편인데 길이 꺾어지는 부분이나 갈림길이 있는 부분에서는 슬쩍슬쩍 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이내 출발합니다. '혹시 내가 길을 못 찾을까 봐 걱정돼서 길 알려주려고 다시 올라가는 건가' 싶은 생각이 은근슬쩍 들었지만 무시하고 따라 올라갔습니다. 아무튼 약 5분여를 길을 걸어 올라가니 정말로 이글레시아 델 살바도르가 나왔습니다! 검은 옷의 청년은 교회 앞에 앉아서 쉬고 있군요.

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저는 그 친구를 지나쳐서 애초의 목적이었던 교회 안으로 들어갑니다. 입장료를 받더군요. 하지만 비싸지 않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동전을 찰랑찰랑 내고 회랑을 지나가는데, 입구에서 아까부터 망설이고 있던 그 검은 옷의 청년이 성당 안으로 들어와 입장료 가격을 묻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2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스페인을 여행한 뒤 작성한 것입니다.


태그:#스페인, #안달루시아, #그라나다, #알바이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