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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마드리드 왕궁의 내부.
▲ 레알 마드리드(마드리드 왕궁) 내부 계단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마드리드 왕궁의 내부.
ⓒ 이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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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스페인 마드리드 땅을 밟아보기까지 고작해야 제가 아는 마드리드에 대한 것이라곤 부루마블 판에서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부루마블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차지해보고 싶어하는 남색의 가장 비싼 땅, ‘마드리드!’

그 마드리드로 마침내 도착한 것은 어느새 여행도 중반이 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경기로 치자면 하프타임. 스페인에서 유학 중인 친구와 남은 3일 여행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저는 몸도 마음도 풀어져서 다음날(2월 17일) 10시까지 늦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 마드리드 왕궁을 느릿느릿 산책하는 것으로 마드리드 구경을 시작했지요. 봄바람에 실려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알함브라의 추억’ 선율이 들려오고, 왕궁 정원에는 시민들이 한가롭게 산책합니다.

하지만 이런 토요일 오후의 한가한 모습도 잠시. 레알 마드리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역시, 관광지 구경은 이른 아침이 좋아요. 사람들이 이렇게 북적거리지 않으니까요.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면 매일매일 늦잠을 잘 텐데 어째서 내가 아침에 그렇게 늑장을 부렸던 걸까, 새삼스레 한탄하며 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호화로운 궁전 레알 마드리드로!

왕궁 자체는 1764년이라는 비교적 근대에 와서 완공되었기 때문인지, 다른 유럽의 왕궁들에 비해 산뜻한 장식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종종 이곳이 왕정체제라는 걸 잊어버리는 저 같은 외국인들에게, 레알 마드리드는 현재도 쓰이는 왕궁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마드리드 왕궁의 내부.
▲ 레알 마드리드의 천정 프레스코화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마드리드 왕궁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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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박물관까지 구경하고 짧은 왕궁구경을 끝마친 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유럽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프라도 미술관. 당시 프라도 미술관으로 출발하던 저의 심정은 출정하는 장수마냥 패기만만했습니다. 규모면에서도 압도적인 이 미술관을 주어진 시간 내에 모두 정복하는 위업을 달성해야만 했으니까요.

그러나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하던 저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나 격침당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알깔라 거리(Calle de Alcala)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들! 스페인을 여행하는 여성들은, 처음에는 ‘스페인 위험하지 않나요?’라고 반신반의하다가도, 일단 두 곳만 들어갔다 나오면 두 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스페인은 천국이야!’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 두 곳이 바로 상점과 레스토랑입니다. 유럽연합(EU)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스페인에서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먹고 마시고 쇼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스페인의 숨겨진 매력, 쇼핑과 미식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동안은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일부러 쇼핑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강행군을 해왔으나, 이제 여유롭고 융통성 있는 여행만 남은 시점…. 저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이 ‘50% 세일’ 안내문이 나붙은 상점가들을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야. 미안한데 우리 한 번만 구경하고 가자”라고 말하며 자라(ZARA)의 문을 밀고 들어간 저는, 자라의 겨울시즌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단돈 2유로에 팔리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고는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쇼핑에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사이 프라도 미술관 폐관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저는 손목을 붙잡아 끌고 나가는 친구에게 “지금 나의 심정은 엘도라도의 황금을 눈앞에 두고 빈손으로 떠나는 인디아나 존스와 같아!”라고 분노했습니다. 나의 엘도라도가, 나의 엘도라도가… 멀어져 간다!

한 상점이 간판 위에 밀랍인형들을 세워놓았다. 프라도 미술관 간판스타인 벨라스케즈의 <시녀들>에 나오는 왕녀, 돈 주앙 등이 행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하는 마드리드 거리 주변의 모습 한 상점이 간판 위에 밀랍인형들을 세워놓았다. 프라도 미술관 간판스타인 벨라스케즈의 <시녀들>에 나오는 왕녀, 돈 주앙 등이 행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 이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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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무수한 고난과 역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옷가게와 신발가게의 연속되는 파상공격에 맞서 혈투를 벌인 끝에 간신히 알깔라 대로를 벗어나자 이번에는 배고픈 위장에 호소하는 레스토랑의 역습이 펼쳐집니다.

스페인 향토요리는 수세기에 걸쳐 여러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은 덕택에, 맛있기로 유명합니다. 더구나 쌀이 주식이고 고추와 마늘 등도 많이 들어가니, 맵고 짠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들 입맛에 잘 맞지요.

우리는 위장의 호소에 기꺼이 굴복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저렴한 한 끼 식사를 바라는 배낭여행객으로서 아무 레스토랑에나 들어갈 수는 없는 법! 길거리 식당들은 대부분 문 앞에 메뉴를 매달아 놓는데, 그중에서도 우리가 눈에 불을 켜고 찾은 것은 세 단어, ‘메뉴 델 디아(Menu del Dia: 오늘의 요리)였습니다.

풍부하게 발달한 스페인 향토요리, 10유로면 즐길 수 있어

스페인은 상점 세일기간이나 연중 세일 횟수 등을 법으로 정해 놓았을 뿐 아니라, 중급 이상의 레스토랑에서는 반드시 점심식사를 저렴한 가격에 내놓는 ‘메뉴 델 디아’를 실시하도록 규정돼 있다고 합니다. 유학 중인 친구가 해준 설명에 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외쳤지요. “훌륭한 관료들이야!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군!”

두 개의 ‘메뉴 델 디아’를 주문하니 우선 따끈따끈하게 갓 구운 빵이 나옵니다. 이어 빠에야와 고기가 메인으로 나왔는데, 역시나 스페인! 맛에 있어서는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렇듯 ‘메뉴 델 디아’는 전채(前菜)에서 부요리, 주요리, 디저트로 이어지는 풀코스를 즐길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음료 포함. 더욱 놀라운 것은 음료로 와인을 주문하면, 한 사람당 병 한 병을 통째로 갖다 준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단돈 10유로(약 1만3천원)!

허겁지겁 먹은 탓에 이미 메인요리가 사라지고 없다. 한 병 통째로 상에 오르는 와인과 전채, 메인요리, 디저트로 이어지는 풀코스 점심이 10유로. ‘메뉴 델 디아’의 힘이다.
▲ 마드리드의 한 레스토랑에서 즐긴 점심식사 허겁지겁 먹은 탓에 이미 메인요리가 사라지고 없다. 한 병 통째로 상에 오르는 와인과 전채, 메인요리, 디저트로 이어지는 풀코스 점심이 10유로. ‘메뉴 델 디아’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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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저는 그날 이후 매번 점심을 먹을 때마다 혼수상태였습니다. 와인은 도수가 낮기 때문에 웬만하면 취하지 않는 법이지만, 점심마다 반주로 와인을 한 병씩 마시다 보면 취하긴 취하되 완전히 취한 게 아니라 은근히 취기가 오르면서 적당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정도가 되는 법입니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의 그림 감상은 그야말로 주(酒)님을 영접해 영혼이 한껏 고양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스페인 풍으로 느긋하게 점심식사를 즐긴 우리는, 정말 시에스타(낮잠)라도 즐기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원래 계획보다 한참이나 늦은 시각에 프라도에 입장했습니다.

'유럽3대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에서 어마어마한 그림들에 체하다

2층의 고야관부터 입장하자, 한쪽에 나란히 걸린 <옷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가 눈에 들어옵니다. 어릴 때부터 어째서인지 고야의 <옷 벗은 마하>를 보면 부끄럽고 외설적인 기분이 들곤 했는데, 이제 성인이 돼 그림 앞에 선 저는 그 기분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제, 단지 여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위해 붓을 들었던 화가들과는 다른 자세로 고야가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여성을 타자의 시선으로 물화(物化)해서 그 아름다움만을 드러내 보이기에는, 이 익명의 여인은 너무나도 당당하고 도발적이며 자기 색이 뚜렷합니다.

유례가 없을 만큼 자기 주장이 당당한,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 숱한 미술가가 그린 누드모델들은 ‘저 여자 누구야?’라고 물어보지 않아도 될 만큼 밋밋하지만 고야의 <옷 벗은 마야>만은 그 모델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여인. 훗날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의 모태가 된 여인.

저는 그 마하를 시작으로 미술관을 탐험하다가 곧 숨이 가빠져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바로크 미술 전시실을 지날 때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명치끝이 아리면서 식은땀이 나고, 온 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지요. 미술관 의자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던 저는 이 고통의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엄청난 양의 대가들의 그림이, 그야말로 벽마다 빼곡히 걸려서 저마다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소곤소곤 말을 걸고, 어떤 것은 쩌렁쩌렁하게 일장연설을 하고, 어떤 것은 엄한 목소리로 훈계하고, 어떤 것은 언제까지나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지요. 그 그림들 하나하나가 살아 있었습니다.

그림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위해 제 머리는 지나치게 가열된 상태였습니다. 전시실을 들어설 때마다 안구를 통해 두뇌로 밀려드는 수많은 색채의 향연. 라피스라줄리의 찬란한 푸른색, 에메랄드의 장엄한 녹색, 눈부신 금색과 붉은색과 온갖 귀중한 안료로 색을 낸 엄청난 색채의 향연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라고 걱정스럽게 묻는 친구에게, 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습니다.

“그림에 체했나봐.”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2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스페인을 여행한 뒤 작성한 것입니다.



태그:#스페인, #마드리드,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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