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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길도 고산유적지 발굴현장. 복원과 함께 낙서재 아래의 건물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전체적인 영역의 규모가 행궁의 가능성을 추측하게 하고 있다.
ⓒ 정윤섭
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 고산유적지는 고산이 인조(仁祖)를 위해 만든 행궁(行宮)이 아니었을까?

보길도의 고산유적지에 대한 발굴과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400여년 전 고산이 조영한 세계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어 그 진실의 모습을 위한 탐색도 뒤따르고 있다.

보길도 고산유적지 정비복원사업은 지난 2002년부터 전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이 진행되면서 복원도 함께 진행되어 오고 있는데, 고산의 주 거처지인 낙서재와 무민당, 곡수당 지역은 발굴을 마치고 건물지와 연지의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다. 또 현재 그동안 논으로 경작되었던 낙서재 아랫부분에 대한 발굴에서 대규모의 건물지들이 확인되고 있어 거대한 영역의 고산 유거지가 행궁이 아니었나를 추측하게 하고 있다.

보길도의 고산 유거지는 그동안 문학을 연구하거나 그가 조영해 놓은 원림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필수 답사코스로 알려졌는데 수백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이곳이 서서히 새로운 모습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이곳의 옛 경작지 맨 아랫부분까지 건물지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아궁이의 불탄 흔적도 선명하다.
ⓒ 정윤섭
보길도는 고산의 손자인 윤위가 1748년 지은 <보길도지>(甫吉島識)에서 그 모습을 생생히 되살리고 있는데, 현재 발굴과 복원을 통해 드러나는 거대한 유거지가 과연 고산 자신만의 호사스런 생활을 위해 만들어졌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낙서재를 중심으로 한 부용동 영역이 전란 시 임금을 피신시키기 위해 행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보길도 고산유적지는 무민당과 곡수당 건물지, 연못지와 주변 경관이 복원되고 있으며, 낙서재 주변은 발굴을 마치고 그동안 음침하게 가려져 있던 삼나무들이 제거되어 낙서재 주변을 둘러치고 있던 담장이 복원됨에 따라 대규모의 유거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상태다. 또 그동안 계단식 논으로 경작되었던 낙서재 아랫부분에서 집터 등 많은 유구들이 대량 발견되고 있어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곳 계단식 경작지에서는 연속하여 대규모 건물지 들이 발견되고 있어 흡사 고려시대에 삼별초가 진도에 임시 행궁으로 만들었던 '용장산성'을 연상케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같은 대규모의 유거지가 임란을 겪고 당시 병자호란의 후유증 속에서 고산이 유사시 임금을 피난시키기 위해 행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당시 대부분의 교통수단이 육로보다는 수로나 해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한성(서울)에서 서해안을 따라 이곳 보길도까지 오는데 빠르면 3일 만에도 올 수 있어 입보처(入堡處)로서 행궁의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 발굴지의 한쪽벽면에서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기와 사이를 회벽처리한 것을 볼 수 있다. 고산은 세연정을 비롯한 연지를 조성할 때 이러한 회벽처리를 하고있다.
ⓒ 정윤섭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에 파천

강화도는 무인정권시절 몽고의 침입 때 행궁을 세우고 항전을 하였던 대표적인 섬으로 병자호란 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播遷)하려 했던 것은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잘 말해준다. 이러한 행궁설에 대한 주장을 설득력 있게 추리할 수 있는 부분은 인조와 각별한 관계를 가지며 전성기를 보냈던 고산이었기에 더욱 가능하다.

광해군이 집권하고 있을 때 고산은 이이첨 일파의 실정을 탄핵하는 상소문인 '병진소'를 올려 결국 집권파에 의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간다. 고산이 8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마치게 된 것은 1623년(인조1) 광해군과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였다.

고산은 인조 때에 정치적으로 매우 잘 나간 시기였다. 42세에 이조판서 장유의 추천으로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며, 인조 집권 13년의 7년간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정랑, 호조좌랑, 형조정랑, 한성서윤, 예조정랑 등을 지내게 된다. 그러나 재상 강석기 등의 질시로 성산현감에 좌천된 뒤 1635년 고향 해남으로 돌아온다.

고산이 해남에 있던 50살 되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이때 고산은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접하자 향리의 자제와 가졸 등 수백을 이끌고 임금이 파천한 강도(江都)인 강화도로 향한다. 이때 항해 중에 만난 수사(水師)들을 격동하여 군진을 이루게 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데 후일 이때 강화도로 간 일행을 두고 근왕군(勤王軍)이라 부르기도 한다.

<보길도지>에는 고산이 강화도로 진출한 일을 '병자수로근왕(丙子水路勤王)'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병자년(1636년)에 근왕병을 일으켜 물길로 떠났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1638년 4월 26일(인조16년 실록) 고산이 올린 공초문에는 보길도의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 있다. 공초문은 고산이 강화도에 왔을 때 임금을 문안하지 않고 간 것을 가지고 반대파들이 국문할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한 반론이다.

고산은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안흥진에 도착했는데 강도(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배를 남쪽으로 돌려 내려간다. 고산은 공초문을 통해 보길도에 들어간 것이 병란을 겪은 뒤 마음의 병이 발광한 때문이나 이는 실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한 데서 나온 것이니 어찌 성명(聖明)께서 마땅히 긍휼히 여기어 용서를 해줄 바가 아니겠냐고 말한다.

이어 "소신의 성정이 평생 산수간이나 섬 속에 살면서 쓸데없는 일을 잊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비록 밥 먹는 중에도 잊은 적이 없고 고요한 밤에 달이 밝게 뜨면 임금님의 옥용(玉容)이 거기에 계시는가 싶고, 만나 뵈올 수 있을지 마음 졸이며 애타게 기다리곤 하였습니다"라고 하며 임금님을 향한 충정이 가득함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무고함을 변명하기 위해 약간 오버(?)하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지지만 어쨌든 병자호란을 겪고 자신들의 가졸 들을 데리고 보길도에 도착한 고산이 스스로에 대한 강구책이자 또 다른 전란에 대비한 나름의 대비책으로 이러한 행궁을 조성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날의 실록을 보면 고산은 이미 인조와 약속되어 있었던 듯 강화도의 배가 내려오지 않아 곧바로 보길도로 들어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산의 근왕병이 보길도로 바로 들어갔다면 들어가 머물 수 있는 준비가 있었으리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산은 공초문에서 보길도에 이미 가노(家奴) 몇 호와 다른 사람 10여호가 상주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어 그동안 우연히 보길도를 발견했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나름대로 보길도에 대한 사전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 무민당과 연지가 옛 모습으로 복원되고 있다.
ⓒ 정윤섭
간척을 통한 바다로의 진출

이는 해남윤씨가에서 고산 이전부터 해안의 바다를 막아 간척을 했던 기록을 통해 섬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상당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진도에서도 최서남단의 맹골도를 고산의 조부인 윤홍중(1518~1572)대에 매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충분히 입증하게 한다.

낙서재 주변의 엄청난 구조물의 흔적이 근왕병이 주둔하였던 시설이라 한다면 단순한 고산의 은둔처가 아니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국가를 위한 일종의 '군사시설(행궁)'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려와 몽고의 항쟁에서 이루어졌던 강화도와 진도를 이용한 마지막 방어체계가 조선시대인 병자호란 때에도 강화도로 파천한 것은 이 같은 가능성을 갖게 한다.

고산이 보길도를 행궁으로 조성하려 했던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당시 국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재력이 막강했던 고산을 인조가 은근히 이용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과, 또는 고산이 임금에 대한 충성심 내지는 정치적 계산을 통해 보길도를 임금의 피난처로 조성하려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고산이 처음 보길도에 들어온 곳이자 보길도의 출입구라고 할 수 있는 황원포 입구에는 바닷가에서 산 위쪽으로 당시 쌓았다는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곳 황원포 입구에서 보초(정찰병)가 항상 서 있다가 수상한 배가 지나가거나 문제가 발생할 시에 봉화를 올렸다고 하며 이곳에서 봉화를 올리면 세연정에 있는 작은 조산(造山)에서 다시 낙서제가 있는 곳으로 연결하였다는 것이다. 세연정에는 봉화대였다고 하는 인공적으로 쌓아 올인 대가 남아있다.

▲ 세연정 상류에는 봉화대의 기능으로 만들었다는 조산이 있다. 이곳에서는 황원포에서 전해져 오는 봉화를 세연정으로 연락했다고 한다.
ⓒ 정윤섭
역모의 섬이 된 보길도

보길도가 임금 인조를 모시기 위해 만든 행궁이라는 것을 더욱 추측하게 하는 것은 1638년 3월 15일(인조 16년 실록)의 기록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이날의 인조실록 기록은 고산이 역모를 꾸미고 있으니 잡아다 국문을 하라는 내용이다.

기록을 보면 고산이 강도근처까지 이르러 경성을 지척에 두고서도 임금에 문안하지 않고 피난하던 처녀를 잡아 배에 싣고 갔으며 이 일이 알려질까 두려워 섬으로 들어가 종적을 숨기려 했기 때문에 잡아다 국문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보면 당시 반대파의 모함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보길도에서 모종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보길도에는 준 군사적 모의나 준비라고 할 수 있는 성 쌓기나 건물축조, 말의 사육과 같은 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지금의 세연정이나 낙서재와 같은 고산의 거처지를 조성하기 위한 역 이었을 수도 있지만 실지로 행궁을 조성하기 위해 대규모의 역이 이루어졌다는 추측도 가능한 것이다. 윤선도는 결국 반대파의 상소에 의해 경상북도 영덕으로 유배 길에 오른다.

보길도는 고산 자신만의 실낙원이었을까 아니면 국란을 대비한 입보처로서 행궁을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400여년전 그가 살았던 세계가 되살아나면서 보길도는 진실의 역사를 요구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 여행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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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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