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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이 절정으로 물드는 요즘의 녹우당은 50만 평에 달하는 주변의 산을 빼고도 고택 주변의 자연(숲)과 잘 어울리게 자리 잡고 있어 녹색의 장원(莊園)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고산이 문학적으로 끊임없이 자연과의 일치를 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주변적 정서가 배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장원의 자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녹우당의 공간구조와 배치를 보면 마치 산 자와 죽은 자가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러한 느낌은 안채를 중심으로 사당과 묘, 추원당 건물이 주변의 자연과 함께 잘 어우러져 자리 잡고 있기 때문으로 산 자(현재)의 공간인 고택과 죽은 자(과거)의 공간인 사당·무덤·추원당이 잘 배치되어 있어 조상과 후손이 시간을 초월하여 끊임없는 대화를 하며 살고 있는 듯하다.

▲ 고산사당 전경. 영조때 내린 불천위 사당으로 녹우당의 위세를 말해준다.
ⓒ 정윤섭
▲ 신록에 물든 녹우당은 덕음산 아래에서 녹색의 장원을 연출한다.
ⓒ 정윤섭
사당은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지속적으로 연결해주는 고리' 같다는 느낌이 든다. 고산 윤선도 고택인 녹우당 안채 옆을 따라 올라 가다 보면 덕음산을 뒤로 자리 잡은 고산 사당을 볼 수 있다. 또한 고산 사당 바로 뒤편에는 이곳에 터를 잡은 어초은 윤효정 사당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대부 집에는 안 사당이 있고 특별한 경우 집 바깥에 불천위(不遷位) 사당으로 모시지만 불천위 사당이 두 곳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녹우당은 고택 안채에 안사당이 있고 바깥에 고산 ·어초은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 이곳에서 숲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고고한 적송 아래에 잠들어 있는 어초은 윤효정의 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녹우당 안채에서 북쪽으로 약 50m쯤 떨어진 곳에는 어초은 추원당(追遠堂)이 있다. 사당과 묘, 추원당이 좌우와 뒤편으로 보호하듯이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구조를 보면 조선 유교사회에서 사대부집은 삶과 죽음의 공간이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돌아가신 조상을 모실 때 보통 4대까지는 안채의 사당에 모시고 그 다음에는 묘소로 가는데 묘소로 가는 대신 계속 모시게 되는 것을 불천위(不遷位)사당이라고 하여 집안에서는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불천위 제사란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학덕이 높아 그 신위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할 경우 나라에서 허락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것이다. 보통 학덕이 높은 현조(賢祖), 국가 사회에 공이 커서 시호를 받았거나, 서원에 배향되었거나 또는 쇠락한 가문을 일으킨 중흥조 등 영세불가망(永世不可忘)의 조상을 계속하여 제향하기 위해 불천위 조상으로 모신다. 불천위 사당은 사대부 집안마다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불천위 제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집안이 명문가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 고고한 적송 숲에 쌓인 어초은 묘는 녹우당 뒷편에서 고택을 보호하고 있다.
ⓒ 정윤섭
녹우당의 고산 불천위 사당은 고산이 죽고난 지 75년 후인 1727년(영조 3년)에 왕이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불천위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고산이 차지한 정치적 위상과 문학적 업적이 평가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녹우당에는 고산사당과 함께 어초은 윤효정의 사당이 있어 2개의 불천위 사당이 있는 셈이다. 어초은 사당이 불천위로 모셔지고 있는 것은 이곳에 터를 잡고 집안을 일으킨 것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녹우당의 공간구조를 보면 고산보다 어초은과 더 깊은 관련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안채를 기준으로 왼편이 어초은 사당, 뒤에는 어초은의 묘, 오른편에는 어초은 추원당이 자리 잡고 있어 마치 만세불파지처럼 보호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문학적으로 해남윤씨가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물론 고산이지만 유교 사상의 측면에서 보면 고산 보다는 오히려 어초은에 대한 비중이 더 커 보이는 것이다.

▲ 어초은 사당은 고산사당 뒷쪽에 자리잡은 불천위 사당이다.
ⓒ 정윤섭
장자가 재산을 물려받게 한 봉제사

웬만한 사대부가에는 사당이 있기 마련인데 사당은 돌아가신 조상의 제사를 위한 공간으로 제사는 재산상속과도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제사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제사가 중요시되고 이 때문에 장자상속이라는 기틀이 마련되는 것을 보면 제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대체로 17세기 무렵까지도 남녀가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 가지는 남녀균분에 따라 제사도 남녀가 돌아가면서 같이 행하는 윤회(輪回)봉사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제사를 더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장손에게 이를 대신하게 하였는데, 제사를 하게 되면 그에 따른 비용이 들기 때문에 제사를 위해 집안에서 별도로 이에 대한 비용(토지)을 마련하였다.

국가에서도 이를 규정하여 <경국대전>에 보면 재산의 5분의1을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재산의 상속과정을 보면 장자가 제사를 도맡아 하게 됨에 따라 재산이 장자를 중심으로 상속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어 제사의 중요도를 실감할 수 있다.

▲ 어초은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옆의 숲은 장원의 숲이다.
ⓒ 정윤섭
이는 조선 유교사회의 국가이념(?)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조상의 음덕을 잘 받아야 자손이 잘되고 번창한다고 하여 집터와 묘터를 좋은 곳에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 당시 사람들의 모습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제사를 중요시하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장손을 통해 제사비용의 명목인 '봉제사(奉祭祀)'로 상속재산을 확대해 나갔는데 해남윤씨가는 일찍부터 이같은 봉제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남윤씨가에 내려오는 분재기 중 고려 공민왕 3년(1354)년에 만든 <노비허여문기>에서는 남녀균분의 사회 속에서도 특별히 봉제사를 중요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婢吾火伊矣所生婢大阿只身乙奉祀條以.'

이 노비문기는 광전이 아들 단학에게 봉제사를 위해 노비를 허여한다는 내용으로 내용을 보면 처부(妻父) 박씨로부터 전래한 노비 오화이(五火伊)가 낳은 비 대아지(大阿只)의 몸을 봉사조로 증여하니 대대로 이어 가라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보면 해남윤씨가는 고려 말 남녀균등분배의 원칙 속에서도 일찍부터 '봉제사'의 인식이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

▲ 아름드리 이팝나무 꽃이 한창이다.
ⓒ 정윤섭
17세기를 기준으로 하여 장자의 봉제사가 보편화 되어 가는 시기는 우리나라에서 남자 중심의 소위 남존여비의 기풍이 자리 잡아 가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남녀차별이 사회적 윤리로 정착되어 가는 과정이 장자중심의 제사 봉행으로 정착되어 가는 시기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성리학을 존숭한 해남윤씨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산 윤선도의 6대손인 윤지충이 천주교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순교를 당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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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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