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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윤씨가의 분재기인 화회문기.분재기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내역이 기록되어 있는 상속문서로 이 문서를 통해 자식간의 다툼을 방지하게 하고 있다.
ⓒ 녹우당
국부(國富)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소유했던 녹우당 해남윤씨가는 과연 얼마간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을까?

부자가 3대를 못 넘긴다는 말이 있지만 500여년의 세월동안 해남윤씨가에서 그 많은 재산을 잘 유지보존해온 것을 보면 거기에는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집안 나름의 재산경영 시스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사대부가의 재산경영은 분재기(分財記)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는데 분재기에는 자손들에게 노비나 토지를 어떻게 분배하고 나누어 주는가에 대해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소유형태와 상속 방법 등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해남윤씨가에는 고산 윤선도의 분재기를 비롯하여 공재 윤두서의 분재기 등 많은 분재기들이 전해오고 있는데,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준 내역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재산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일종의 재산 상속문서라고도 할 수 있는 분재기에는 죽기 전 자식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허여(許與)문기, 죽고 나서 재산을 나누는 화회(和會)문기 등이 있다. 재산을 둘러싼 다툼을 막기 위해 대부분은 죽기 전에 이러한 문서를 남겼으며 분재기는 재산분배로 위한 다툼을 막기 위한 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남녀가 똑같은 재산상속

▲ 고려공민왕 3년(1354년)때의 노비문서. 이 문기에는 해남윤씨가의 중시조인 광전의 처가 시집올때 데려온 노비를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문서로 당시 남녀가 똑같이 재산을 분배받았음을 알 수 있다.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재산경영 스타일은 어떤 것이었을까? 당시 성리학을 신봉하는 집안에서 오늘날처럼 이윤을 중요시 여기는 경제 논리를 적용하기 어려웠겠지만 집안에 내려오는 가훈과 문서들을 통해 보면 근검절약과 적선을 강조하는 지극히 유교적 이념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해남윤씨가의 재산이 이처럼 막대하게 늘어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고려 말 조선중기까지도 실시되었던 '남녀균분제'의 재산상속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무렵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남녀가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 가지는 '남녀균등분배'의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였다. 그러나 장자에 의한 제사승계와 함께 대대로 내려온 재산을 온전히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장손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현실론이 대두되면서 장자상속 중심으로 흘러감에 따라 남녀균분의 원칙은 깨지고 만다.

이때까지만 해도 보통 결혼은 남자가 여자의 집에 장가드는 '남귀여가혼(南歸女家婚)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동안까지도 처가에서 한동안 살았는데, 이 때문인지 몰라도 아직도 외가에 대한 추억과 그 친밀감이 더 깊은 것은 이 같은 오랜 전통의 습성인지도 모른다. 남녀균분의 원칙도 이러한 가족개념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해남윤씨가의 성립과 재산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남녀균분의 원칙이 매우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을 알 수 있는데 그 첫 번째 사례가 해남윤씨가의 중시조인 광전이 고려공민왕 3년(1354년) 아들 단학에게 남긴 <노비허여문기>에서 엿볼 수 있다.

광전은 아들 단학에게 '봉제사(奉祭祀)'의 목적으로 이 노비문건을 남기는데 노비문건에 나오는 노비는 광전의 처인 함양박씨가 데려온 신노비로 당시 남녀균분의 원칙에 의해 시집간 딸에게 분배된 종이었다.

또한 녹우당의 입향조인 어초은 윤효정은 남녀균분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으로 당시 해남지역의 가장 큰 세력가이자 부호인 정호장의 딸에 장가를 들게 되어 분가를 하자 막대한 재산을 분배받아 녹우당에 튼튼한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처가 덕을 잘 보면 경제적으로 쉽게 자리를 잡지만 당시는 제도적으로 만들어졌던 셈이다.

남녀균분에서 장자상속으로

▲ 윤덕희 화회문기. 공재의 아들인 윤덕희대에 만들어진 분재문서로 이 문서에서 해남윤씨가는 장자를 중심으로 재산을 물려받아 유지보존하게 하는 강력한 규정을 두고 있다.
ⓒ 녹우당
이러한 처가로부터의 재산이 분배되어 오는 것과 함께 또 하나 부를 축적 시키게 만든 것은 양자의 입양이었다. 양자로 들어오게 되면 재산을 친부와 양부로부터 물려받게 되는데 고산 윤선도는 대표적인 경우다.

윤선도의 양부인 윤유기의 처 구씨(具氏)로부터 받은 화회문기를 보면 노비 144구(口 )중 윤선도는 노비 50구를 받는다. 윤선도는 양부와 외가에서도 재산을 분배 받아 재산규모가 크게 불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경우는 여러 대에서 양자로 대를 잇는 해남윤씨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해남윤씨가는 어떻게 보면 '일거양득'으로 많은 재산을 얻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윤씨가부명어일세(尹氏家富名於一世)'라 할 정도로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던 때는 대종손의 경우 시기마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노비는 500~600여구, 전답 1000~2300두락의 재산을 소유할 때였다.

노비 500여구는 당시 가장 많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우 큰 규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토지는 1두락을 보통 1마지기로 보는데 한 말의 씨를 뿌릴 수 있는 면적으로 평지와 산지 또는 토지의 비옥도 등에 따라 면적이 약간씩 다르지만 보통 논의 경우에는 200평, 밭은 300평을 한 두락으로 보았다. 2000여 두락이라고 했을 때 밭을 기준으로 한다면 약 60만평 가량의 규모에 해당한다. 지금의 규모로 보아도 상당히 넓은 면적을 경영했음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 해남윤씨가의 분재기 문서
ⓒ 녹우당
이처럼 많은 재산을 경영하고 있었지만 17세기를 넘어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남녀균분의 원칙이 무너지자 재산상속의 개념이 장자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양반사대부가들이 장자상속의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해남윤씨가 역시 균분에 의한 재산의 흩어짐을 막기 위해서는 한사람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야 했는데 그것은 봉제사의 목적으로 장자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소위 제사를 지내는 대가로 주는 '봉사조(奉祀條)'의 목적으로 전 재산의 많은 양을 봉제사로 남겨두고 나머지를 서로 분재를 하는 방식이다. 봉사조는 장손의 소유권과 권리가 매우 커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처럼 물려받은 봉사조를 장손이 모두 임의대로 처리할 수 없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분재기속에는 이를 지키게 하는 일종의 약조를 남기고 있는데 공재의 아들인 윤덕희가 남긴 '윤덕희 12남매 화회문기'에서 이러한 강력한 규정을 엿볼 수 있다.

이 화회문기는 14개조로 된 서문이 있다. 서문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종가의 경제력을 유지시키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서문에서는 종가의 소유 땅을 환속하게 하거나 종손도 절대 매매할 수 없도록 하고 각 처에 산재하여 있는 종가의 땅은 종손도 마음대로 이매할 수 없도록 규정하여 제도적으로 종가의 경제력을 안정되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해남윤씨 종가의 경제력이 지속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은 이때의 문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 여행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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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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