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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지난 1월 14일 오후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식 및 6월민주항쟁 20년 사업선포식 행사가 서울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에서 열렸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 등이 물고문이 자행된 509호실에서 고인의 영정에 헌화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종철이가 자넬 살렸어. 박종철이 그렇게 죽음으로써 수많은 목숨을 구한 거야."

요즘도 그때를 떠올리며 어머니께서 제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난 1월 부모님 댁을 찾았을 때도 마침 TV 뉴스에서 그때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어머니께선 어김없이 그 말씀을 또 하셨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흘 뒤 검거되다

그때,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숨이 끊긴 그날, 저는 수배자 상태였습니다. 그 전 해 9월, 제가 당시 활동하고 있던 한 재야단체의 시위사건에 연루돼 경찰에 쫓기고 있었죠. 수배를 예상해 미리 집을 나와 능곡 삼거리에 있는 한 친구의 자취방에서 '도발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신문에서 그의 죽음에 관한 짧은 소식을 읽었습니다. 뭔가 불길했습니다. 겨울에 접어들면서 주위에서 수배자들의 검거소식이 잇달아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박종철의 죽음. 함께 지내던 친구에게 혹시라도 제가 잡혔을 경우에 대비해 다시금 행동요령을 일러줬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그렇게 적중하는 건가요? 그가 세상을 떠난 사흘 뒤, 1월 17일 아침, 한 선배와의 약속을 위해 친구 자취방을 나섰던 저는 잠복하고 있던 형사들에게 붙잡혔습니다. 달리는 시골버스 안에서 붙잡혔는데, 저항할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허리띠 풀고, 신발 꾸겨 신고, 머리를 무릎에 박고…. 그들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습니다.

처음에는 저희 집 관할인 마포서로, 그리고 간단한 조사를 받은 뒤 바로 시위사건 관할인 동대문서로 넘겨졌습니다. 철제의자에 수정으로 묶인 채 심문실에 홀로 남겨졌을 때, 두 손에 수정을 찬 채 마포서에서 동대문서로 달리는 경찰차 안에서, 떨리는 가슴에도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품에 지니고 있던 문건에 대해 뭐라고 변명하지, 같이 활동하던 동료들에게 어떻게 나의 검거소식을 빨리 알릴 수 있을까, 그들의 소재를 물으면 어떻게 피해가야 하나, 내게 은신처를 제공했던 친구는 별 탈이 없겠지… 아, 어머니… 그리고 앞으로 닥칠 가혹한 심문 과정을 내가 제대로 버텨낼 수 있을까.'

그런데, 막상 동대문서에 도착하니 상황은 제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돌아갔습니다. 뭔가 서늘하면서도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저보다 오히려 형사들이 저를 더 조심스러워 하는 듯 여겨졌습니다. 그들의 윽박지르는 소리에서조차 전혀 위협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어, 이게 아닌데, 이상하다?

"꿀밤 때려도 고문당했다고 할 거냐?"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낸 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됐습니다. 정보과와 대공과를 넘나들며 조사를 받았는데, 그 어느 곳에서도 큰 마찰(?)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경찰이 이리 점잖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조사는 저보다 앞서 시위현장에서 잡힌 '공범'들이 미리 작성해놓은 진술 내용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수배 전 동료들과 미리 입을 맞춰놓았던 내용이기에 모범답안을 펼쳐놓은 수험생의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거물'도 아니고, 또 그것만으로도 혐의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니 그들 역시 더 이상 캐물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모든 게 너무 순조로웠습니다. 그때 조사 과정에서 형사들끼리 간간이 건네는 말로 박종철 사건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입에서 "×됐네"라는 탄식이 새어나왔던 듯싶습니다. 그 순간, 박종철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 분노하고 애도하기보다 '그랬구나, 내가 좀 편해지겠구나' 하는 이기적인 안도감이 먼저 들었습니다.

한결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경찰서 안에서 수정을 찬 채 조서를 꾸미면서 마치 칼자루를 잡은 듯한 착각에까지 빠졌었다면, 너무 철이 없었던 걸까요. 조사 과정에서 제가 좀 말썽을 부렸을 때 담당 형사와 이런 농담까지 나눴던 기억도 납니다.

그 : "자꾸 말 안 들으면 너도 남영동에 보내버린다."
나 : "에이…."
그 : "너, 내가 꿀밤 때려도 고문당했다고 할 거냐?"
나 : "당연하죠."
그 : "좋은 시절에 들어온 줄 알아라."

좋은 시절? 어쨌든, 며칠 동안 조사받는 과정에서 한 차례도 손찌검조차 당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가 체포되고 조사받았던, 17일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열리고, 18일 경찰이 자체 조사에 들어가고, 19일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이 해임되고 두 고문경관이 연행되었다고 합니다.

서울구치소의 추웠던 겨울, 그리고 봄

그렇게 동대문서에서 며칠을 보낸 뒤 서울구치소에 수감됐습니다. 10사(舍) 하(下) 8방(房), 0.98평의 공간. 그게 뭐 좋은 추억이라고 지금도 그때 제 방 번호가 또렷이 기억나다니, 사람의 기억력이란 참 신기합니다. 첫날밤, 수건에서 실을 뽑아 이름표 대신 수번을 수의에 꿰매단 뒤, 그동안의 긴장이 풀렸던 까닭일까요, 오래간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 당시 서울구치소는 지금 서대문형무소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 조경국
당시 서울구치소 10사 상ㆍ하는 모두 독거방이었습니다. 워낙 시국사범들을 많이 잡아들이다 보니 일반수와 분리해 수용할 '운동권 전용사'가 필요했었나 봅니다. 저보다 앞서 들어온 CA(제헌의회) 선배들, 구학련 후배들, 그리고 기타 여러 조직ㆍ시위사건으로 들어온 동지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박종철의 죽음 이전 들어온 그들은 저와는 달리 대부분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었다고 했습니다.

그해 서대문의 겨울은 무척 추웠습니다. 머리맡의 식수통에 얼음이 얼고, 창살의 찢어진 비닐 사이로 눈발이 들이쳐 잠자는 얼굴 위로 떨어졌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물을 채운 '탕파(湯婆, 당시 '유담뿌'로 불렀던 걸로 기억합니다)'를 수건에 말아 가슴에 품고, 동상에 걸리지 않기 위해 때때로 발을 주물러가면서 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추위는 그렇게 견딜 수 있었지만, 또 전근대적 교도행정의 불편도 견딜 수 있었지만, 매일 찾아오시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죄책감에 힘들었습니다. "자주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리면 어머니께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운동할 수 있지 않겠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 다행인 것은 민가협 다른 어머니들과의 만남이 어머니께 적지 않은 위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동안 구치소 안은 조용했습니다. 삼엄한 분위기 탓에 '통방'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매일 면회 오는 가족으로부터, 또 운동시간 등에 만나는 선후배들로부터 바깥세상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몸이야 가둘 수 있지만 정신이야 가둘 수 없는 것이죠.

바깥 열기가 계속 전해지면서 구치소 안의 공기도 점점 달아올랐습니다. 매일 저녁 모두 창틀에 매달려서 토론회를 열고(당시 소위 CA와 NL이 함께 있다 보니, 토론시간 때만큼은 운동노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격론이 오갔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습니다. 4ㆍ13 호헌조처 소식이 전해진 이후로 우리의 투쟁 역시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매일 저녁의 '샤우팅'은 5월 초 소내 집단 단식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슈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민주화 요구와 함께 재소자 인권문제도 제기했던 것은 기억합니다. 면회(접견)가 금지됐습니다. 열흘 가까이 단식이 계속되자 결국 교도관들이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저항했지만 무력했습니다. 사지를 붙들린 채 지하 징벌방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5월 말, 저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남아 있던 선후배들은 "축하해, 밖에서 보자, 괜찮아"라며 격려해줬지만 먼저 나오는 저로서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저 "그래, 나가서 동지들 몫까지 싸우면 되는 거지" 하고 다짐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 그 뜨거웠던 6월, 저는 그 다짐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 그해 여름 이한열 영결식 모습. 나는 그곳에 있지 못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어머니께서 대신 거리로

바깥세상은 안에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뜨거웠습니다. 동료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간의 사태를 설명해주면서도 "일단 다른 생각 말고 몸부터 추슬러라"고 충고했습니다.

6월 들어 연일 시위가 계속 되자 어머니께선 저 때문에 다시 불안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나가려는 저를 붙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행유예 기간인데 또 붙잡히면 이번엔 정말 큰일 치르게 돼. 네가 또 잘못되면… 이 어미가 대신 나가마. 민가협 어머니들과 그동안 많이 해봐서 괜찮을 거야."

그리고 정말 점퍼(한여름에!)를 차려입고 거리로 나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선 6월 내내 그곳에 계셨습니다. 저는 집 앞 도로를 지나가는 시위대 행렬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저와 어머니의 그 해 6월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박종철의 죽음에, 어머니의 눈물과 사랑에 조금이라도 빚 갚음을 하며 살아왔던가. 나름으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의 물음 앞에서 갑자기 부끄러워집니다.

지금부터라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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