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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부터 27일까지 7박8일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진행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교육프로그램 - 중국연수'에 다녀왔습니다. 연수에는 30여명의 문화예술인과 문화산업업체 임직원 등이 참여했습니다. 중국 산둥성과 상하이시에서 보고 듣고 느낀 중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일정에 따라 몇 차례에 나눠 연재합니다. - 기자 주

 상하이 루쉰공원 입구
 상하이 루쉰공원 입구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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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의 둘째 날 일정은 루쉰공원(魯迅公園)을 찾는 것으로 시작했다. 중국에서 도시 곳곳에 있는 공원은 보통 중국사람들의 일상의 아침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공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벽 아래에는 이미 자전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침내 빗방울이 흩뿌렸던 까닭인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루쉰공원은 상하이 개항 100년의 굴곡진 역사를 함께해왔다. 1896년 사격장으로 출발해 1901년 체육(recreation)공원으로 꾸며졌고 1906년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그러나 당시 '일반인'에 중국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중국인의 공원 출입은 1928년에서야 허용됐다. 조계 시절 홍커우(虹口)공원으로 불렸으나 1956년 루쉰 묘를 이장하고 루쉰기념관이 들어선 이후 루쉰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루쉰공원에서 아침을 여는 상하이시민들

 루쉰공원에서 아침운동을 하고 있는 상하이시민들
 루쉰공원에서 아침운동을 하고 있는 상하이시민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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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들어서자 먼저 우리의 약수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간단한 운동복을 차려입거나 러닝셔츠 바람의 시민들이 철봉, 평행봉 등 기구를 사용해 아침 운동을 하고 있었다. 한 할아버지는 우리가 사진을 찍자 손가락으로 물구나무를 서 보이기도 했다. 배드민턴장에선 배드민턴을 하는 중년 부부들의 모습도 보였다.

수풀과 공터가 잘 어울린 공원의 가운데에는 인공으로 조성된 호수가 있다. 한 가족으로 보이는 남녀와 '소황제'가 단란하게 보트를 타고 있었다. 또 호수 곁 공터에선 곱게 단장한 할머니들이 돌아가며 전통악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고, 휠체어를 탄 할머니들이 그들의 공연을 편안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 중국인 할머니가 루쉰공원에서 중국 전통악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 중국인 할머니가 루쉰공원에서 중국 전통악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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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도 발길을 멈췄다. 이희재·박재동 두 화백은 그 풍경을 담기 위해 화첩을 펼쳤다. 주변의 사람들이 신기한 듯 두 화백 주위에 몰려 화첩을 들여다봤다. 노래 부르는 할머니들은 돈을 걷기 위한 모자 같은 것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노래 부르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박재동 화백은 "노래 부르는 자신도 즐겁고 보는 사람도 즐거우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했다.

윤봉길 의사의 붉은 단심을 느낄 수 있는 메이위안(梅園)

 상하이 루쉰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인 '메이팅(梅亭)'. 그의 조국과 겨레를 향한 붉은 단심을 나타내듯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상하이 루쉰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인 '메이팅(梅亭)'. 그의 조국과 겨레를 향한 붉은 단심을 나타내듯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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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공원은 우리에게도 각별한 곳이다. 상하이사변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天長節)을 맞아 이곳에서 전승 기념식을 열었다. 그때 윤봉길 의사는 기념식 단상에 물통 폭탄을 던져 일본군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 등을 사상케 함으로써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한국인의 의기를 전 세계에 떨쳤다. 이에 대해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명의 조선인 청년이 해냈다"며 칭송했다.

호숫가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메이위안(梅園)이 나타났다. 중국인들이 윤봉길 의사를 기리기 위해 그의 호 '매헌(梅軒)'을 따 만든 공원이다. 메이위안 안에는 '윤봉길 의거 현장 1932. 4. 29'이란 표지석과 함께 윤 의사의 생애와 의거에 대해 한글과 중문으로 안내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의거 현장은 이곳이 아니라 루쉰동상 앞 잔디광장 부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장소가 틀렸다고 해서 윤 의사의 의거가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대로 된 안내가 아쉬웠다.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는 메이위안에는 '메이팅(梅亭)'이란 이름의 2층 누각이 세워져 있다. 윤 의사의 나라와 겨레를 향한 붉은 단심을 나타내듯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윤봉길기념관으로 윤 의사의 유품과 함께 그의 생애, 의거,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과 관련된 유물과 사진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메이팅(梅亭)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흉상. 그 옆 벽에 윤 의사가 집을 떠날 때 남겼다는 다짐이 적혀 있다.
 메이팅(梅亭)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흉상. 그 옆 벽에 윤 의사가 집을 떠날 때 남겼다는 다짐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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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안내원이 한국말로 기념관을 안내했다. 1층 정면에는 윤 의사의 흉상이 놓여 있고, 그 옆 벽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의 길을 떠나며 남긴 다짐이 적혀 있다. '丈夫心家生不還(장부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윤 의사는 자신의 결의처럼 살아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의거 현장에서 체포돼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12월 총살당했다. 그때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메이팅을 나오자 뒤편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 화보집'을 판매하고 있다. 그 옆에는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명의로 '책 한 권 사주는 것이 애국입니다'라는 배너가 세워져 있다. 책 한 권을 샀다고 어찌 애국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일행 대부분이 지갑을 열었다.

상하이시민의 일상 속에 살아 있는 루쉰

루쉰의 묘지는 호수를 지나쳐 있었다. 묘지는 3면이 수풀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 앞에는 한 손에 책을 쥔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의 루쉰 동상이, 또 그 앞에는 잔디광장이 조성돼 있었다. 바로 이 잔디광장 부근이 윤봉길 의사가 실제로 폭탄을 터뜨린 곳이라고 했다.

그 옆에는 또 루쉰의 육필 원고와 유품들이 전시돼 있는 루쉰기념관이 있는데 루쉰과 인연이 깊었던 일본(루쉰은 일본에서 유학했다)의 도움으로 개축했다. 그에 맞춰 공원 한 편에 중일우호기념비도 세웠다. 항일 의사의 기념관과 중일우호기념비가 한 공원에 함께하는 곳, 그곳이 바로 중국이다.

 루쉰공원 내 루쉰 묘지 앞에서 한 상하이시민이 태극권을 하고 있다.
 루쉰공원 내 루쉰 묘지 앞에서 한 상하이시민이 태극권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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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와 투창'과 같았던 문장으로 중국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고 중국인의 의식을 각성시키고자 애썼던 루쉰은 1936년 상하이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애초 상하이의 외국인묘지에 묻혔으나 1956년 이곳으로 이장됐다. 묘지 뒤 벽면에는 마오쩌둥이 쓴 '魯迅先生之墓(루쉰 선생의 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금박을 입힌 글자였다. 금박은 루쉰 때문일까, 마오쩌둥 때문일까.

루쉰 묘지 곁에서 태극권을 하고 있는 상하이시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루쉰은 상하이시민들의 일상 속에서 그렇게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윤봉길 의사는? 올해는 마침 윤 의사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에 따라 윤의사기념사업회는 매헌기념관이 있는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 공원 이름을 '매헌공원'으로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고승덕 한나라당 의원(서초구 을) 등의 반대에 부딪쳤다. 고 의원의 반대 사유는 "윤 의사는 서초구와 아무런 연고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공원 이름을 바꾼다고 윤 의사의 의기가 갑자기 되살아나지는 않겠지만, 매일 상하이시민들과 함께 아침을 맞는 루쉰공원을 둘러보며 우리의 현실이 뭔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상하이의 빌딩 숲

전날 와이탄(外灘)에서 황푸강(黄浦江) 너머로 바라보기만 했던 푸둥(浦東) 루쨔주이(陸家嘴) 지역을 이번엔 직접 찾았다. 버스는 강 밑 옌안둥루 터널(延安東路 隧道)을 통해 푸둥으로 건너가 둥팡밍주(東方明珠) 앞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떨어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468m 높이의 방송탑. 특히 263m 지점에 있는 전망대에서 상하이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기에 관광객들에겐 필수 코스인 곳이다.

 한 전문 사진사가 탁자를 놓고 여성 관광객을 상대로 둥팡밍주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한 전문 사진사가 탁자를 놓고 여성 관광객을 상대로 둥팡밍주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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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도 역시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과 그들을 태우고 온 버스로 입구가 혼잡했다. 그 가운데 한글로 '◯◯◯ 수학전문학원'이라 씌어있는 버스가 눈길을 끌었다. 아마도 상하이 거주 한국인 자녀들을 위한 학원버스인 듯했다. 한국 학부모들의 자녀 교육열은 나라 안팎을 가리지 않았다.

둥팡밍주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관광객들도 많았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는 동팡밍주를 사진에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쭈그려 앉아야만 했다. 돈벌이에 재빠른 상하이사람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둥팡밍주 앞 목 좋은 곳에 탁자를 놓고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주는 전문 사진사들이 눈에 띄었다.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선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에는 층 번호 대신 높이(m)가 적혀 있었다. 순식간에 전광판에 '263'이란 숫자가 켜지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전망대는 해외 관광객들로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전망대에서는 360도를 돌아가며 상하이의 동서남북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둥팡밍주에서 내려다 본 상하이의 빌딩숲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둥팡밍주에서 내려다 본 상하이의 빌딩숲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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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눈앞에 우뚝 서 있는 마천루들, 그 주위를 감돌아 흐르는 황푸강, 그 위를 천천히 떠가는 배들, 그리고 그 너머로 아득히 펼쳐져 있는 상하이의 빌딩 숲…. 조창완 알자여행 대표는 "한 한국 방송사 촬영팀이 여기 올라와서 본 뒤 빌딩으로 끝이 안 보이는 도시는 상하이가 처음이라고 했다"고 말했는데, 그 말 그대로였다. 둥팡밍주의 원구를 동방의 여의주로 삼아 상하이를 동아시아의 중심도시로 만들려는 중국의 야심도 그처럼 끝없이 뻗어나가는 듯했다.

상하이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다

ⓒ 천호영

둥팡밍주 위에서 상하이의 현재를 목격했으니 이제 상하이 과거로의 여행을 떠날 차례였다. 동팡밍주 1층에 있는 상하이역사박물관에 들렀다. 정식 명칭은 '上海城市歷史發展陳列館(상하이시역사발전진열관)'. 상하이 150년 영욕의 세월을 사진, 그림, 자료, 유물, 인형, 영상 등을 통해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조계시절 신문팔이 소년의 모습을 재현한 밀랍인형
 조계시절 신문팔이 소년의 모습을 재현한 밀랍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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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는 작았지만 그 안은 제대로 감상하려면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할 정도로 넓었다. 첫 전시관에는 자동차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동차들이 진열돼 있다. 영화 <색, 계>에서 량차오웨이(梁朝偉)가 타던 것과 비슷한 차량도 있었다. 전시장 가운데는 전차가 놓여 있었는데, 1등칸과 3등칸으로 구분돼 있었다. 1등칸에는 밀랍인형으로 만든 서양인이 여유롭게 앉아 있고, 3등칸에는 역시 밀랍인형으로 만든 중국인들이 피로에 지친 얼굴로 서 있었다.

박물관은 과거 상하이시민들의 일상 생활과 거리 풍경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약방, 대장간, 건어물가게, 주점, 미용실, 전당포 등등이 계속 이어지는 통로를 걷다 보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되돌아가 골목길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정교하고 섬세하게 빚어낸 실물 크기의 밀랍인형들도 살아 숨쉬는 듯했다.

특히 두 광경이 인상적이었다. 조계 시절 법정 모습을 재현한 곳에는 법관 자리의 중앙에 정장 차림의 서양인이 앉아 있고, 그 옆에 중국 관리로 보이는 이가 앉아 있다. 오른쪽에는 터번을 두른 인도 용병이 법정을 호위하고 있고, 법관 앞에는 변발을 한 중국인이 무릎을 꿇은 채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당시 상하이를 지배하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상하이역사박물관에 과거 아편을 피우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놓았다.
 상하이역사박물관에 과거 아편을 피우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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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광경은 부유한 중국인들이 아편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비단옷을 입은 두 남자가 길게 누워 아편을 피우고 있고, 한 젊은 여성이 고개를 돌린 채 한 남자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아편을 피우는 남자의 퀭한 얼굴이 멸망해가는 왕조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했다. 어쨌든 부끄러운 과거도 숨김없이 드러내놓는 중국인들의 용기가 새삼 놀라웠다. 과거를 제대로 알고 반성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미래의 청사진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겠는가.

상하이엑스포, 7000만 방문객 목표

점심을 먹고 상하이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 곳, 상하이엑스포 사무국을 방문했다. 상하이 엑스포는 오는 2010년 5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184일 동안 열린다. 방문한 날은 단체 입장권 판매를 막 앞둔 시점이었다. 엑스포 부사무국장은 상하이 엑스포에 "매일 40만 명씩 약 700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갈 것"으로 내다봤다. 우리나라 인구를 훨씬 웃도는 숫자지만 상하이 거주인구와 연간 관광객수를 고려할 때 무리한 목표가 아니다.

 상하이엑스포 사무국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엑스포 공사 현장
 상하이엑스포 사무국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엑스포 공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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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 부사무국장의 설명을 듣고 사무국 건물 옥상에 올랐다. 엑스포가 열린 현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황푸강의 난푸대교(南浦大橋)와 루푸대교(盧浦大橋) 사이 양안의 면적 5.28㎢의 땅이 엑스포 부지다. 현장 여기저기에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까지 완공된 건물은 없는 듯 보였다. 엑스포를 위해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1만8000여 주민들이 집을 비우고 떠났다고 한다. 상하이엑스포의 모토는 'Better City Better Life'이다. 그들은 더 나은 삶을 보장받았을까.

 상하이엑스포 사무국 건물의 전시실에서 안내원이 설명하고 있다. 왼쪽은 상하이엑스포 마스코트인 '하이바오(海寶)'.
 상하이엑스포 사무국 건물의 전시실에서 안내원이 설명하고 있다. 왼쪽은 상하이엑스포 마스코트인 '하이바오(海寶)'.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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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올림픽 이후 중국정부는 국가 역량을 상하이엑스포에 쏟아 붓고 있다. 경제 효과의 측면에선 올림픽보다 엑스포에 거는 기대가 더 크기도 하다. 그럼 우리에게 상하이엑스포는 어떤 의미일까. 한국만화가협회 중국대표처 이상홍 총감은 "상하이엑스포는 글로벌 마케팅의 큰 장으로서 우리나라를 세계적으로 프로모션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라고 했다. 또한 그는 "중국은 현재 지방 각 성들까지 나서 기술전수·해외진출을 위한 파트너를 적극 물색하고 있다"며 "이때 우리가 적극 손을 잡고 중국과의 비즈니스를 펼쳐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국 전통 상가촌 '위위안상창', 그리고 중국 상인과의 흥정법

 상하이의 전통 상가촌인 위위안상창(豫園商場). 중심부에 '스타벅스'가 자리잡고 있다.
 상하이의 전통 상가촌인 위위안상창(豫園商場). 중심부에 '스타벅스'가 자리잡고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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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방문지는 상하이 도심 남쪽에 있는 위위안(豫園)이었다. 위위안은 명나라 고위관료였던 반윤단(潘允端)이 자신의 부모에게 선사한 정원이다. 특히 강남 고전 양식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 탓에 위위안에 들어가진 못하고 그곳과 접해 있는 위위안상창(豫園商場)만을 둘러봤다.

전날 찾았던 난징루(南京路)가 '현대 쇼핑 일번가'라면 위위안상창은 '전통 쇼핑 일번가'라고 부를 만했다. 중국 전통의 건축미를 즐기면서 공예품, 미술품, 골동품, 전통차 등을 쇼핑도 하고 맛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있는 상가촌이다. 성문처럼 생긴 입구를 통해 밀집된 상가 골목을 지나자 중심부에 연못, 다리, 그리고 정자가 나타났다. 정자의 이름은 후신팅(湖心亭). 지금은 전통찻집으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방문해 유명세를 탔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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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에게 전해줄 선물도 살 겸 혼자서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대개의 상인들은 간단한 영어, 일어, 한국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는 "싸다, 싸다"고 외치기도 했다. 버스에 내리기 전 조창완 알자여행 대표가 일러준 흥정 요령을 상기했다.

"중국인들은 흥정을 즐긴다. 아무리 낮은 가격을 불러도 괜찮다. 다만 주인이 원하는 가격을 얘기하라고 했을 때 제안한 가격에 주인이 응하면 그 물건은 반드시 사야 한다. 그것이 중국인이 생각하는 신뢰다. 사지 않고 돌아서면 신뢰를 깨는 것이다. 자칫 뒤통수 맞을지도 모른다."

한 건물 1층에서 마음에 드는 중국 인형을 발견했다. 하나에 880위안이라고 했다. 조 대표의 충고대로 한참 밀고 당긴 끝에 200위안에 샀다. 많이 깎았다는 생각에 스스로 뿌듯했다. 그런데 2층 입구에도 똑같은 인형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가게 점원 아가씨가 흥정도 하기 전에 방금 전 산 똑같은 인형을 가리키며 "1개 100원"이라고 한다. 기운이 쑥 빠졌다. 중국인과 신뢰를 쌓기에는 아직 적응기간이 더 필요할 듯싶었다.

층마다 가격과 맛이 다른 '난샹만터우뎬(南翔饅頭店)'

 위위안상창 내 '난샹만터우뎬(南翔饅頭店)'에서 산 딤섬을 한 중국인 가족이 맛있게 먹고 있다.
 위위안상창 내 '난샹만터우뎬(南翔饅頭店)'에서 산 딤섬을 한 중국인 가족이 맛있게 먹고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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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연못가에 있는 '난샹만터우뎬(南翔饅頭店)'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한국에도 진출해 있는 대만의 '딘타이펑(鼎泰豊)'에 못지않은 상하이의 대표적인 딤섬(点心) 식당으로 상하이 현지인들도 즐겨 찾는다고 했다. 역시 1층에는 딤섬을 사려는 사람들로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산 딤섬을 바로 그 자리에서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나눠 먹기도 했다.

식당은 3층의 중국 전통 건축물이었다. 특이한 점은 각층마다 파는 딤섬의 가격이 다르고 맛도 다르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2층으로 올라가 샤오룽바오(小龍包) 등 몇 종류의 딤섬을 먹었다. 껍질은 얇고 맛은 담백했다. 특유의 소스를 찍어 얇게 썬 생강을 얹어 먹는데, 특히 따끈한 육즙이 입안에서 퍼지는 느낌이 좋았다.

 한 티셔츠 가게에 사회주의혁명 지도자와 영화·스포츠 스타의 모습을 담은 티셔츠가 함께 걸려 있다.
 한 티셔츠 가게에 사회주의혁명 지도자와 영화·스포츠 스타의 모습을 담은 티셔츠가 함께 걸려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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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를 먹고 위위안상창을 나오는데 한 티셔츠 가게가 눈에 띄었다. 맨 윗줄에는 레닌, 스탈린 ,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구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들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가 나란히 걸려 있다. 그 다음 줄은 상하이 시가와 하드록카페 티셔츠. 맨 아랫줄은 쿵푸영화스타 리샤오룽과 NBA 농구스타 야오밍, 그리고 끝자리를 'I ♡ CHINA'란 티셔츠가 차지하고 있다. 또 아래위로 인민해방군 병사의 얼굴을 담은 티셔츠가 불빛에 반짝였다.

처음 중국연수 기사를 올렸을 때 한 독자께서 '중국은 만두속 같은 나라'라는 댓글을 달았다. 사회주의 혁명과 자본주의 문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하고 있는 곳. 또 그것이 돈이 된다면 얼마든지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곳. 그렇듯 다양한 재료를 버무려 자기만의 맛을 내는 만두 같은 나라가 중국이 아닐까 싶었다. 겉모습만 보고 덥석 깨물다가는 뜨거운 육즙에 입안을 데일지도 모르는….   

'백만불짜리' 와이탄의 야경

 상하이 와이탄의 야경
 상하이 와이탄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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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하이 와이탄에서 바라본 푸둥의 야경. 왼쪽의 뾰족한 탑이 둥팡밍주다.
 상하이 와이탄에서 바라본 푸둥의 야경. 왼쪽의 뾰족한 탑이 둥팡밍주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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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었다. '백만불짜리'라는 와이탄(外灘)의 야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전날 낮에 들렀던 와이탄거리로 다시 향했다. 중서합벽(中西合璧)의 상징인 다양한 양식의 석조 건물들은 어둠 속에서 새로 태어난 듯했다. 낮의 다소 딱딱하고 위압적이었던 느낌과는 달리 따뜻한 조명을 받아 화려하면서도 그윽한, 그래서 더 신비로운 풍격을 드러냈다.

반면 황푸강 너머 푸둥의 마천루들은 '현란하다'는 말이 그대로 이해될 정도로 오색찬란했다. 오색 조명을 받은 빌딩들이 물결 위에서 흔들렸다. 그 위로 푸른 조명으로 장식한 유람선이 천천히 떠갔다. 환상적이었다. 그렇게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은 깊어갔고 다음날 아침을 맞았다.

중국, 중국인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중국에서의 마지막날 아침. 연수를 정리하는 간단한 평가회 자리를 가졌다.
 중국에서의 마지막날 아침. 연수를 정리하는 간단한 평가회 자리를 가졌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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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전 간단한 평가회 자리를 가졌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했다" "중국의 과거, 현재, 미래로 여행을 한 느낌이다" "중국을 좀더 알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중국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우리가 앞선다고 자신했는데 건방졌다고 반성하게 된다" "중국인의 저력이 무섭게 느껴졌다" 등등 여러 말들이 쏟아졌다.

그 가운데 두 화백의 말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이희재 화백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역사적 사건을 만화로 그린 적이 있다. 그때 그들은 '적'이었다. 그러니 인상도 나쁘게 그렸다. 중국인들을 만나다 보니 그때 그런 인상으로 그린 게 미안해지더라. 중국, 중국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앞으로 작품은 더 폭 넓어지고 깊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박재동 화백 "와이탄거리를 걸으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내가 지금 이상한 지점을 걷고 있구나. 과거 속에서 미래를,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할까. 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루쉰공원에서 윤봉길기념관을 둘러보며 예전 같으면 분노가 치밀었을 텐데 지금은 가슴이 아파 오더라. 왜 우리는 서로 그런 역사를 만들었을까. 함께 상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일행 중 한 명이 택시 거스름돈으로 받은 위안화. 위조지폐라고 했다.
 일행 중 한 명이 택시 거스름돈으로 받은 위안화. 위조지폐라고 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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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전 상하이 푸동공항 면세점에서 물건을 구매하려던 일행 중 한 명이 난처한 경우를 당했다. 전날 택시 거스름돈으로 받은 위안화를 내밀었는데 위조지폐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비행기를 타고 8일 만에 들여다본 한국신문은 1면 머리기사부터 중국산 멜라민 파동 기사로 도배돼 있었다.

그동안 내가 스치듯 바라본 중국은 과연 실체에 가까운 것일까. 중국, 중국인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그들과 어울려 21세기를 살아갈 수 있는 지혜는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8일의 연수기간 동안 숙제거리만 잔뜩 안고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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