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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질서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공고해 보였던 미국 단일패권체제의 종말을 예언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냉전시대 라이벌이었던 러시아는 에너지 파워를 앞세워 국력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세계질서의 한축을 담당할 것이 유력시되는 중국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군사적, 외교적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인도 역시 미중관계의 균형자로 부상하면서 강대국화 되고 있습니다.

정치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유럽연합(EU) 역시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에 불만을 품으면서 독자성을 강화하고, 일본은 경제회복과 군사대국화를 지향하고 있으나 정치지도자들의 잇따른 망언으로 국제사회에서 왕따가 되는 분위기입니다. <기자 주>


▲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 백악관 홈페이지
미국의 뒷마당이라는 중남미에서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를 상징으로 반미·반신자유주의 열풍이 여전히 거세고, 제국주의 시대 수난의 땅이었던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에서는 국가간, 종족간, 종교간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주민들의 고통이 커지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중동 정세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이란의 반서방 노선까지 겹쳐지면서 불확실성에 휩싸이고 있고, 미국의 지원 하에 '오렌지 혁명'을 일으켰던 구소련의 많은 나라들은 그 후폭풍에 직면해 있습니다.

변화의 바람은 한반도에서도 거셉니다. 북한을 '악의 축', '폭정의 전초기지'로 지목하면서 정권교체를 추구했던 부시 행정부는 뒤늦게 북한의 핵 포기와 관계정상화라는 '빅딜'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험난한 여정이 남아 있으나 전화위복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세계는 1990년을 전후한 냉전의 해체 이후 가장 큰 변화의 길목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단일패권주의의 종말 조짐과 중국의 눈부신 성장은 향후 세계질서의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입니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숙명을 안고 있는 한반도가 향후 질서에 가장 민감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 특별기획에서는 격동하는 세계질서를 차분히 짚어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본 기획은 매주 한두 차례씩, 약 5개월 동안 진행됩니다.

"21세기에도 팍스 아메리카나는 지속될 것인가?"

이는 세계질서 미래와 관련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미국 패권을 상수(常數)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지만, '이라크 신드롬'에 빠져든 미국 내에서는 불안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미국의 힘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메리카나'를 당연시하는 한국의 경향은 미국 국력의 변동과 여론의 변화, 그리고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한 냉정한 분석보다는 한미동맹에 대한 기존의 관성과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가 바람직하다는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기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만간 미국 패권이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경고와 그 징후 역시 만만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 만약 이러한 경고와 징후가 현실로 나타날 경우, 세계체제의 '약한 고리' 가운데 한 곳인 한반도에 미칠 파장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통해 볼 때 팍스 아메리카의 토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미국의 압도적인 힘의 물리적인 근거, 즉 경제력과 군사력인데 이는 '강제'에 해당된다. 다른 하나는 미국 국민과 국제사회의 여론이 미국이 세계경찰로 활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식론적 토대인데 이는 '동의'에 해당된다.

미국이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영토적 야심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며, 민주주의와 인권가치를 중시한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동의의 기초였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적어도 미국은 대체로 '온건한 패권국가'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팽창주의에 등 돌리는 미국 국민

▲ 지난 1월 31일 미국 하원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 뒤로 대표적인 네오콘 세력인 체니 부통령(왼쪽)이 서 있다.
ⓒ 백악관 홈페이지
그러나 이러한 팍스 아메리카나의 동의의 기초는 미국 안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이라크 신드롬'이 확산되면서 고립주의를 선호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의 군사 우선주의 및 일방주의에 대한 미국 국민의 반응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사주의와 일방주의의 상징적 인물인 부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2002년 초 "악의 축" 발언 당시에 80%를 넘어섰던 반면에 2007년 연두교서 발표 때에는 30%대로 곤두박질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2006년 10월에 실시된 미국의 외교안보정책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약 80%는 미국의 안보 증진을 위해 비군사적인 방법을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고,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70%에 달했다. 이는 미국의 대외정책 수행 방식, 즉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하고, 유엔의 동의에 구애받지 말아야 한다는 군사패권주의와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미국 내에서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립주의를 선호하는 흐름 역시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Pew Research 센터가 2005년 10월 달에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은 다른 나라에 개입하지 말고 자신의 일에 신경써야한다"는 여론이 42%에 달했다. 이는 베트남 전 직후인 1976년의 41%와 냉전 해체 이후인 1995년의 41%보다 높은 수치이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대외정책의 기조로 내세우고 있는 '다른 국가들의 민주주의 증진'에 대해 불과 24%만이 지지 의사를 밝혀, 공격적인 대외정책의 명분이 미국 내부에서조차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 젊은 세대의 인식이다. 이와 관련해, 하버드대 정치연구소가 2006년 3월 만 18세에서 24세 사이의 젊은 세대를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응답자의 72%는 미국은 앞으로 국제사회의 위기와 갈등을 해결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서는 안되고, 이러한 역할은 다른 나라들과 유엔이 해야 한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이는 젊은 세대가 2차 세계대전은 물론이고 냉전시대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세대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라크 사태를 비롯한 부시 행정부의 과도한 일방주의와 팽창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은 더욱 싸늘하다. 영국의 BBC 방송이 2007년 초 25개국 2만638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49%가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부정적 역할을 한다고 답했다. 긍정적이라고 답한 사람은 29%에 불과했다. 2006년엔 36%, 2005년엔 40%의 응답자가 미국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을 비춰볼 때,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부분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에서 부정적인 인식이 더 크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주요 동맹국들 가운데 독일에서는 미국에 대한 반감이 74%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프랑스 69%, 호주 60%, 영국 57%, 한국 54% 등을 기록했다. 이러한 수치는 미국과 한때 적이었고 미래의 경쟁자로 일컬어지는 중국(52%), 러시아(59%)와 비교해 봐도 대체로 높다.

또한 미국의 개별적인 정책을 보더라도 부정적인 의견이 모두 높게 나타났다. 이라크전 수행에 대해선 73%가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이 밖에 이란 핵 문제(60%), 지구 온난화(56%), 관타나모(67%), 북핵 문제(54%) 등에 대한 미 행정부의 대처 방식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뤘다.

개입주의 조정기에 접어들 미국

물론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미국 안팎의 여론이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해서, 미국이 1, 2차 세계대전 때처럼 고립주의를 선택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경험적으로 볼 때 미국에게 고립주의는 전통이 아니라 예외에 불과했고, 민주당과 공화당은 물론이고, 미국의 여론주도 층은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미국 내부와 국제사회의 인식 악화는 미국의 대외정책 수행은 물론 패권적 지위를 유지·강화하는 데에도 상당한 걸림돌이 될 것이다. "타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거나, 타자를 압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는 능력"을 패권이라고 정의할 때, 미국의 무기와 돈의 힘은 여전히 막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매력의 발산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소프트파워'는 분명 약해지고 있다. 헤게모니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강제와 동의 가운데, 동의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을 포함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증대되고 있다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유민주주의적 패권 국가는 온건하다"는 신화를 미국 스스로 깨뜨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앞으로 미국은 개입주의와 팽창주의의 조정 국면에 접어들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것이 고립주의를 의미하지 않더라도, 전략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거나 미국이 임무를 완수했다고 해석될 수 있는 지역에서 발을 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고 북미관계가 정상화되며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된다면, 한국은 그 유력한 후보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한미동맹 강화와 자유무역협정(FTA) 너머를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기도 하다.

태그:#이라크, #조지 부시, #미국, #팍스 아메리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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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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