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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을 전후한 냉전 해체 이후 세계는 가장 큰 변화의 길목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단일패권주의의 종말 조짐과 중국의 눈부신 성장은 향후 세계질서의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입니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숙명을 안고 있는 한반도가 향후 질서에 가장 민감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 특별기획에서는 격동하는 세계질서를 차분히 짚어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본 기획은 매주 한두 차례씩, 약 5개월 동안 진행됩니다. <기자 주>


▲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23일 페트레우스 장군과 함께한 자리에서 이라크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 백악관 홈페이지
'팍스 아메리카나'가 지속될 것인가의 문제는 여러 가지 변수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고차방정식이다. 미국이 단극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유무형의 힘을 계속 가질 수 있느냐, 미국 여론과 국제 여론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 미국의 힘에 필적할 수 있는 국가, 혹은 국가군(群)이 출현할 것인가, 이 국가들이 다극체제와 같은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의 대안을 모색하느냐 등의 변수들이 어떤 조합을 만드느냐에 따라 팍스 아메리카나의 존속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이들 질문 가운데 국제정치이론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현실주의 이론은 '세력균형'에 주목한다. 세력균형이론은 '양극'이든, '다극'이든 국제체제의 본질은 패권국의 등장과 강화에 대항하기 위해 주요 국가들이 세력균형을 모색하고 있다고 보면서, 이 체제가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패권국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 강화와 동맹 결성은 이를 위한 핵심적인 정책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구조적 현실주의의 대가인 케네츠 월츠(Kenneth Waltz)는 "미국 역시 대등한 힘을 가진 국가군의 균형정책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단극체제는 점차 다극체제로 전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균형론은 소련의 붕괴 이후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왔다. 탈냉전 이후 유일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에 맞서서 다른 국가들의 세력균형 시도가 잘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세력균형 이론을 핵심적인 공리로 삼아온 현실주의 이론은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고,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는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미국 패권주의가 유지된 까닭

그렇다면, 국제정치학의 하나의 명제처럼 자리 잡았던 세력균형이론이 탈냉전 이후의 단극체제에 대한 설명력을 잃은 이유는 무엇일까? 왜 주요 국가들은 단극체제에 도전하기보다는 이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을까? 그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은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큰 이익을 취하고 있어, 패권주의의 물리적 기초인 경제력이 막강하다. 둘째 과거 제국을 보면 많은 제국들이 수백 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이 미국 패권이 쇠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 셋째 일본, 독일, 영국 등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은 세계 대전으로 인해 패권적 지위를 상실했으나, 미국은 앞으로 세계 1, 2차 대전과 같은 대규모의 전쟁을 겪을 가능성이 낮다.

넷째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이다. 특히 다른 국가들이 미국의 최첨단 무기에 필적할 만한 무기를 개발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미국 패권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끝으로 미국의 국력이 압도적이어서 다른 국가들이 미국에 대해 세력균형을 선택할 엄두가 나지 않을뿐더러, 미국 패권주의는 온건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들 가운데,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이 미국 패권주의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강조되어왔다. 미국이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비민주국가에 속하는 중국과 러시아는 반패권 동맹국들을 찾기가 힘들고,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민주국가들은 미국으로부터 위협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균형정책을 추구할 동기가 약하다는 것이다.

또 미국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하고 있고 많은 나라들이 미국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만큼, 미국에 대한 도전은 경제 손실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균형정책을 포기한 이유로 거론된다. 이에 따라 미국이 국제경제와 국제안보체제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공공재를 제공함으로써 국제정치경제 질서가 안정되고 있다는 '패권안정론'이 각광을 받기도 했다.

'부드럽게' 미국에 맞선다

▲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지난 20일 미시간주 이스트 그랜드래피즈(East Grand Rapids) 고등학교에서 세계적인 반테러 노력과 이라크 전쟁에 관해 연설을 하고 있다.
ⓒ 백악관 홈페이지
그러나 최근 미국의 여러 국제정치학자들은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EU) 등이 강성 균형(hard balancing)보다는 연성 균형(soft balancing)을 추구해오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즉 군비증강과 동맹 결성 등 물리력에 의존하는 균형정책은 잘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다자-양자 외교, 국제 제도와 규범, 경제, 국제여론 형성 등의 방식을 통한 연성 균형정책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주요 국가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에 공동전선을 형성한 것이나, 중국, 러시아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이용해 미국의 대북, 대이란 강경책을 제어하고 있는 것 등이 연성 균형정책의 예가 될 수 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국, 중국, 러시아 등이 6자회담을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나 압박을 완화시키는 제도로 활용했던 것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통적인 세력균형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일부 국가들이 미국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정책을 취하는 것 역시 큰 틀에서 볼 때 세력균형 정책에 해당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텍사스대의 크리스토퍼 레이니 교수는 일부 국가들이 패권국으로부터 공격당할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독립적인 대외정책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는 경우가 있다며 이를 '구속탈피(leash-slipping)'라고 명명한다.

2차 대전 이후 영국이 군비증강을 통해 제3의 세력을 추구했던 것이나, 프랑스 드골의 독자노선, 그리고 1990년대 말 이후 유럽연합의 독자군 창설 움직임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또 비록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만,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한 지나친 안보 의존이 대외정책의 종속을 낳는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주국방을 추진한 것도 이러한 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다극체제의 후보 국가들

▲ 조시 부시 미 대통령이 지난 4일 캘리포니아의 한 미군 부대를 방문해 전문 야전 장비작동을 지켜보며 설명을 듣고 있다.
ⓒ 백악관 홈페이지
이처럼 군사력의 대폭적인 증강이나 반패권 동맹 형성과 같은 전통적인 의미의 세력균형 양태는 아직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새로운 방식을 통해 미국 패권주의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은 나타나고 있다.

또 중국과 러시아의 준군사동맹 결성, 중국의 위성파괴무기 실험 및 항공모함 건조를 비롯한 군사현대화, 러시아의 MD 무력화를 겨냥한 핵미사일 전력 강화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최근 전통적 의미의 세력균형 정책들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여러 국가들이 미국 단일패권주의에 점차 불만을 갖고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극체제를 포함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잠재되어 있던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경계심이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로 현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단일패권주의에 도전하고 다극체제를 형성할 후보에는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 역시 1순위는 중국이다. 중국은 급격한 경제성장과 군사력 강화, 그리고 다자간 외교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미국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국가로 뽑힌다.

독일, 프랑스가 주축이 된 유럽연합 역시 경제통합을 지나 정치통합으로 향하면서 외교안보정책에 대한 일체성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코소보 사태와 21세기 초엽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목도하면서 유럽연합은 점차 미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려 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미국이 예전만큼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섭섭함과 고삐 풀린 미국 패권주의가 자신의 이익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섭섭함과 두려움은 이라크 수렁에 빠진, 그리고 그 수렁에서 나오더라도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미국의 공백을 이용해 자신의 독자주의 노선을 강화하게 될 것이다.

국력 회복기에 접어든 러시아의 대응 및 선택도 주목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막대한 오일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는 러시아는 최근 미국의 대외 팽창주의가 제2의 냉전을 야기할 수 있다며,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핵전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밖에도 급격한 경제성장과 미중 관계의 균형자적 위상을 추구하고 있는 인도, '보통국가'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경화와 군사대국화를 지향하는 일본의 선택도 미국 단일패권주의의 지속 여부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동북아에서는 어떻게 될까?

▲ PAC-2 미사일 발사대와 이륙을 준비하는 A-10기. 미국은 지금도 우주의 군사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에 힘을 쏟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정학적으로 한반도가 그 중심에 있는 동북아의 사정은 복잡하다. 우선 동북아에서 소련의 위협은 소련의 몰락 이후 북한과 중국으로 대체되면서 한미, 미일 동맹은 강화되고 있는 양상을 띠고 있다. 이는 소련 붕괴 이후 '공동의 적'이 사라진 유럽-미국과의 관계와 근본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곧 동북아에서 미국 패권주의가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국의 부상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라크 수렁에 빠져들고 대외정책에 대한 안팎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반면에, 중국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군사력과 외교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0∼20년 이내에 중국이 미국에 필적할 만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기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동북아 지역에서는 미국 영향력에 버금가는 능력을 확보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또 북핵 문제가 해결되고 북미간 적대관계가 청산되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길로 접어들면, 주한미군을 포함한 한미동맹의 존재 이유는 다시금 도마 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반대로 북핵 문제가 풀리지 않더라도 이라크 사태가 장기화되고 그 여파가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북핵 문제를 해결할 강제력을 동원하기란 어렵다.

그렇다고 한국, 중국 등 한반도 비핵화 이상으로 한반도의 안정을 중시하는 국가들을 설득해 미국의 대북정책에 동의하게 만들기도 어렵다. 미국은 동북아에서도 헤게모니의 두 수단, 즉 강제와 동의가 모두 약화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21세기 초엽 제국을 꿈꾼 미국의 해악을 똑똑히 목도한 국제사회는 더 이상 단극체제가 바람직한 국제질서의 미래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따라 그것이 세력균형에 기초한 다극체제이든, 이를 뛰어넘는 다자간·집단적 안보체제이든, '팍스 아메리카나'를 대체할 움직임은 지속될 것이다.

이에 직면한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계속 고집할 수도 있고, 이러한 대전략을 크게 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택한 것이든, 강제된 것이든 미국 대전략의 향방은 동북아와 그 중심에 있는 한반도에도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미국에서 고립주의 성향이 강해지면, '미군 없는 한국'이 도래할 수도 있다. 반면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지속시키기 위해 중국 봉쇄를 고집한다면, 미일동맹 대(對) 중국의 대결구도가 나타나면서 한반도의 38선은 동북아의 세력균형선으로 고착되고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다.

미국 단일패권주의가 상수가 아니라 변수가 되고 있는 시대에 '한미동맹'이나 '우리 민족끼리'를 넘어서는 상상력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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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는 정욱식입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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