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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모았던 적금과 퇴직금을 모두 날리다

1997년 30대 중반, 두 아이의 가장으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우며 생활했었다. 셋째 아이를 갖겠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으니 그렁저렁 꿈을 키우며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97년 말 IMF가 터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는데 보증을 서주었던 지인의 사업이 부도나면서 그동안 저축해 놓았던 모든 예금에다가 빚까지 얻어 몇 천만 원을 고스란히 금융사에 바치는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맞이한 1998년, 나의 일터에서는 구조조정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1999년 여름,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표를 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셋째 아이가 태어난 후 3개월이 된 시점, 퇴직금으로 받은 것은 보증 빚 갚는 데 거반 사용돼 당장 생활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실직 15일만에 이전 일터보다는 월급이 적었지만, 일할 수 있는 곳이 생겼다. 그러나 이전 수입의 절반 정도의 수입으로 생활하기는 만만치 않았고 마이너스대출 통장의 잔고도 밑바닥을 치고 있었다. 가까스로 신용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면서 생활을 했다. 2년 고생 끝에 마이너스 대출받은 것도 갚고, 카드 돌려막기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까지 회복이 되어 통장잔고 0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우연히 부도를 내고 잠적한 이를 만났지만 그에게는 변제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저 그가 혹시라도 다시 일어서서 사업이 잘되면 갚아주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보이지 않아 "꼭 갚을 수 있는 날이 있길 바란다"며 헤어졌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재기를 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두 번째 큰 파산에 자살을 생각하다

IMF는 가정을 꾸린 후 나에겐 개인적으로 두 번째 파산이었다. 90년대 초반, 성남시 상대원동 공단지역에서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과 탁아소를 친구들과 함께 운영했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는 차원에서 접근한 것이었지만 자립하지 못하는 영세적인 구조로 인해 한 푼 두 푼 끌어다 쓴 운영비가 누적되면서 전세금을 빼서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가 더부살이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건강 문제도 같이 겹치면서 그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쉼의 시간에 휴학했던 대학원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그것이 개인적으로 맞이한 첫 번째 파산이었다. 그리고 95년 이후 97년말까지 그런 대로 안정된 일터에서 일하며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IMF가 닥치면서 다시금 삶의 모든 물질적인 기반들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몇 번이나 자살을 꿈꿨다. 한강 다리를 건널 때마다 차를 몰고 한강으로 뛰어들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가족들을 떠올렸고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오직 나 하나만 믿고 결혼해 준 아내와 세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물질적인 것으로 환산해 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었지만 사람살이가 물질로만 환산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는 것, 무능한 남편이요 아빠라도 늘 밝은 얼굴로 맞아주며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가족, 그것은 내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힘이 되어 이를 악물고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보고가 되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행복은 물질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고, 가족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가장 큰 행복덩어리라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소박한 삶에 대한 꿈들을 하나 둘 키워갔다.

IMF 이후에는 이전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커가는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을 발견했다. 그러나 2001년 중순, 본의 아니게 또 다시 일터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근무연수도 얼마 되지 않아 퇴직금은 고작 몇 백만 원 선이었다. 연이어 타의로 실직을 하고 나니 오기가 생겼고, 다시 일어서려면 뭔가 획기적인 전환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금을 다 털어 가족들과 함께 캄보디아로 떠났다. 단지 여행이 목적은 아니었지만 짧은 여행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한 달만에 서울로 돌아왔고 나는 3개월여 더 체류를 하는 중 캄보디아에서 '9.11무역센터 테러'에 대한 뉴스를 들었고, 그 일로 인해 많은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충격은 인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 인간에 대한 믿음의 붕괴였다. 이어지는 타의에 의한 실직과 물질적인 토대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마음도 강퍅해질 수밖에 없었는지 당시의 글들을 정리하다보니 나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섬뜩한 글들이 많이 있었다. IMF 이후 실직을 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 썼던 자작시 '마음의 병'이라는 글은 이러했다.

온통 찢어지고 헤어진 것만 같은 마음 한 켠에 / 그래도 희망이 남아 / 끝끝내 오늘의 하루도 버티고 / 울컥 올라오는 분노를 꾸욱 누르느라 / 마음속에 응어리지겠네 / 그까짓 응어리쯤이야 / 넉넉히 이길 수 있어 /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에는 / 내가 그들에게 필요하기에 / 이까짓 분노쯤이야 참을 수 있어 / 어떨 때는 이 응어리들을 / 아무도 모르는 산이나 / 깊은 밤에 소리 지르며 / 날려버릴 것이 아니라 / 그들의 面前에서 침을 튀겨가며 / 새파랗게 질려버리도록 / 그 응어리들을 뱉어버리고 싶어 / 마음의 病 / 다 이렇게 사는 거야라는 / 말들 속에 익숙해져가는 나는 / 병을 앓고 있다.(1999년 11월)

조금은 긴, 그러나 짧은 여행을 떠나다

서너 달 뒤면 맞이하게 되는 불혹의 나이,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니 의미 있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일들조차도 급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과연 무슨 의미일까 하는 자괴감 같은 것으로 밀려왔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경쟁적인 삶의 양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도시인의 삶을 산다는 것이 나는 물론이려니와 아이들에게도 얼마나 큰 짐일까하는 생각을 했다. 결국 캄보디아에서 돌아오면서 시골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얘들아, 우리 여행을 가는데 이번에는 조금 긴 여행이 될 거야. 당신도 조금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여행길은 원래 불편한 것이잖아.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우리 시골로 내려가자."

그렇게 자리 잡은 곳이 저 남녘땅 제주의 동쪽 끝 마을 종달리였던 것이다. 그 곳에서 지낸 6년, 소박하게 살았고 내 삶의 전성기 같은 시간을 보냈으며 아이들도 자연과 친숙하게 보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물론 물질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고, 그저 빚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정도였다. 그러나 상처받은 마음들을 그 곳에서 치유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웠으며 부족하지만 풍족하게 살아가는 법도 배웠다. 이 사회 저변에 밀려난 이들을 만나며, 인간의 이기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을 만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어나는 들꽃들을 만나면서 '느릿느릿, 낮은 것, 작은 것, 단순한 것, 못 생긴 것'이라는 삶의 화두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물질이라는 것이 나의 주인이 되지 못했고 물질에서 초연해지니 필요할 때에는 물질도 따라주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돈을 모우거나 늘려간 것은 아니었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할 때나 혹은 급박한 자금이 필요한 경우에 남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수입들이 생겼다. 몇 권의 책을 내면서 받은 인세와 월간지 원고수입 등이 생활에 보탬을 주었고, 오마이뉴스의 고료도 한몫을 했다.

긴 여행 끝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다

지금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고전하고 있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양식을 체득하였기에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고 살아간다. IMF가 터진 이듬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던 큰 아이는 어제 중학교 졸업을 했고, 운동이라면 뭐든지 좋아하고 스포츠에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듣는 막내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된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둘째는 사진작가를 꿈꾸는 동시에 락음악에 심취해 있는 멋진 소녀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10년 동안 통장의 잔고는 언제나 마이너스나 제로였지만 사랑하는 아이들이 각자의 꿈을 키우며 건강하게 자라주었고, 아내 역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내 옆자리를 지켜주며 알콩달콩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으니 IMF의 파도를 잘 이겨낸 것이라고 자족해 본다.

고향인 서울을 떠난 시간은 6년 정도에 불과한데 서울로 돌아와 적응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거의 매일 제주의 바다와 오름을 꿈꾸다시피하며 제주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2월 12일이면 다시 서울생활을 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가끔씩은 시골생활을 지속하지 못한 아쉬움과 용기 없었음에 대한 부끄러움이 교차하기도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과 그 안에 간직한 꿈들을 하나 둘 세어보다 보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그 곳이 행복이라는 파랑새가 지저귀는 곳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가족, 그들이 없었다면 IMF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긴 터널이 있었기에 나는 새로운 삶의 화두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고, 평생지기 친구인 들꽃들을 만났으며 노년의 삶의 계획까지도 세울 수 있었으니 전화위복의 기회가 된 것이다.

경쟁의 대열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누차 강조하고 또 이야기를 하지만 대학입학 이후에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아이들로 키울 것이다. 막내가 대학에 입학하는 시기는 대략 잡아 10년 후, 막내가 대학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아내와 시골에 들어가 작은 텃밭을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생태환경운동과 관련된 일들에 주력을 할 계획이다.

물론 지금도 주말이나 쉬는 날이면 자연의 품에 안겨 그들의 일상사를 카메라에 담고 글을 쓰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이슬사진을 많이 담을 계획이다.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들면 가족의 먹을거리만큼은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추구하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꿈을 꾸는 대로 순탄하게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지난 10년, IMF라는 흉물스러운 괴물과도 맞서 살아왔으니 40대 중반에 꾸는 이 꿈도 허망하게 꿈으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살면서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살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해서 찡그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주어진 행복의 조건들 속에서 환하게 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기에 아직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말이 구호가 아니라 현실임이 감사할 뿐이다.

결국,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니 맘몬의 우두머리 같은 IMF도 슬며시 내 곁에서 사라져 버렸다. 물질에 대한 집착포기, 그것은 사실 경쟁의 대열에서 이탈한 것이었다. 그 경쟁의 대열에서 뛰쳐나와 사람살이의 여정을 바라보니 천천히 느릿느릿 소박하게 살아가도 내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저 굴곡 없이 편안하게 살아왔었다면 지금 꾸고 있는 이런 꿈들을 꾸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질로 환산하면 여전히 내 삶의 자리는 IMF체제지만 결코 그는 나를 가두지 못했으니 내가 그를 이긴 것 아닐까? 착각이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IMF 10년>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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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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