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98년 대한민국이 외환위기 한파로 힘들어할 때 남편과 나는 만났다. 당시 청바지 장사를 하던 남편이 내가 사는 여수로 장사를 온 것이다. 지방이라 외환위기와 거리가 멀 것이라는 계산으로 왔다고 했지만 누구도, 어느 지역도 예외를 두지 않던 외환위기의 한파는 이미 작은 지방 도시조차 꽁꽁 얼어붙게 만들어버렸다.

그때 나는 직장에서 잘리고 할일을 찾지 못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때였다. 경기도에서 직장을 다니던 오빠내외마저 몇 달치 월급과 더불어 전세 보증금마저 받지 못한 채 내가 사는 방 한칸짜리 자취방으로 들어와 있었다.

백일도 되지 않은 조카의 우유값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라도 구하려던 차에 지금의 남편이 속한 특별판매팀에서 아르바이트를 모집한다는 전단지를 보게 됐다. 다른 때 같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겠지만 허우대 멀쩡한 어른 셋이서 덜그럭대는 쌀독을 바라보는 일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청바지집 젊은 사장과 함께한 야반도주

▲ 외환위기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았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전단지를 보고 모여든 인원은 필요한 인원수의 10배가 넘었다. 몇 번의 면접을 거치고 겨우 속옷가게에 배치가 되었고, 그제야 옆자리에 위치한 청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청바지집 젊은 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연애를 할 시기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꼭 이 사람이어야 한다는 믿음은 아무래도 인연이었기 때문인가 보다.

10일간의 짧은 탐색기간을 거치고 마침내 나는 남편을 따라 일명 야반도주를 하게 됐다.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땐 야반도주가 일자리도, 돈도 없던 내겐 유일한 탈출구였다. 남편과 함께라면 뭐든 이겨낼 자신이 있었고 또 혼자 지내기에도 빠듯한 자취방에서 나 하나 빠져나와 주는 것만도 오빠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더군다나 백화점 근무 1년이 전부인 나는 열심히만 하면 금세라도 부자가 될 것 같이 장사의 매력에 푹 빠져들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세상은 내 생각처럼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얇아지는 건 지갑이고, 올라가는 건 물가이고, 짧아지는 건 치마의 길이며, 처지는 건 가장들의 어깨라고 했던가?

50여개 특판팀 중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였던 남편의 청바지 매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뒷자리로 밀려나더니 어느 날 뒷방 노인처럼 사람하나 오가지 않는 화장실 앞까지 밀려났다.

그때 난 연예인들이 가장 미웠었다. 지금은 멋으로 개성으로 편안함으로 입고 나오는 청바지를 그땐 누구도 입지 않았었다.

한사람만 입어줘도 팔릴 텐데… TV에 눈을 고정한 채 누구 한사람만이라도 청바지를 입고나오길 기다린 적도 있었다. 하루 100여만원 매출도 가뿐하던 것이 10만원을 밑돌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삼시 세끼 밥 사먹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 결혼식도 올려야 했으니. 실반지 하나 나눠 끼지 못하고, 예물 한 가지 없이 오롯이 결혼식만 올려야했던 우리들의 헛헛함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다.

화장실도 없는 반 지하 단칸방에 신접살림을 꾸리고 그래도 재미있다고, 그래도 행복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하루하루 자라고 있는 뱃속의 아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태어나기 두달전, 장사를 천직이라 여기던 남편이 장사를 접어야겠다는 말을 해왔다. 임신을 한 뒤 그날그날 전화로 알려주는 남편의 말만 의지해왔는데, 장사는 남편 말처럼 그리 괜찮지 못했던 것이다.

장사를 접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옷을 걷으러 갔을 때 보니 그 동안 남편 혼자 얼마나 힘들어했을 지 눈에 보였다. 옷걸이는 반 이상 텅텅 비어있고, 그나마 있는 옷들도 팔리지 않아 먼지만 수북하게 눌러쓰고 있었다. 언제나 1위를 달리던 매출은 이제 꼴찌를 면치 못하고, 그나마도 자릿세조차 주지 못하는 상태였다.

옷들을 개켜 집으로 돌아왔다. 시기만 다를 뿐 누구나 폐업을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라 잘 가라고 배웅을 해주는 팀 식구 모두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할 일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자릿세가 안 나간다는 것, 그나마도 옷이 더 이상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반지하방으로 들어오는 매정한 햇빛 한줌은 여전했고, 습관처럼 뿜어져 나오는 한숨도 여전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의 선택에 후회란 걸 하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편을 따라오지 않는 건데… 나만 따라오지 않았어도 남편이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는 않았을 텐데.'

출산을 한달 앞두고 남편이 초등학교 동창 망년회에 갔었다. 일찍 오마고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남편은 자정이 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왔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시간가는 줄 모르나보네,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일년에 한번인데 뭐…'하는 심정으로 남편의 귀가를 포기하고 있다가 남편의 얼굴을 보니 고마우면서도 불안해졌다.

"어떻게 왔어?"
"빨리 나온다고 나왔는데도 지하철이 끊겨서 택시타고 왔지."
"택시? 얼마주고?"
"2만8000원!!"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다음달이 산달인데도 그때까지 난 출산준비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2만8000원이면 천 기저귀를 스무장이나 뜰 수 있는데, 그 돈이면 애기 내복도 두벌이나 살 수 있는데, 어떻게 그 돈을 내고 택시를 타고 올수가 있는지 차라리 자고오지 왜 왔냐고? 누가 오늘 안에 꼭 오라고 그랬냐고 남편을 향해 악을 퍼부었다. 내게 2만8000원은 생명과도 같았다

그때 처음으로 비빌 언덕 없는 소의 설움이 어떤 건지도 알게 되었다. 한잠도 못 잔건 남편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새벽녘 남편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루 종일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지고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내게 5만원을 내밀었다.

"웬 돈이야?"
"벌었지 그 돈으로 애기 기저귀도 사고, 내복도 사. 내일도 벌어올게!"


막노동 시작한 남편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남편은 밤새 끙끙 앓았다. 흔들어도 깨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새벽이 되자 남편은 언제 앓았냐는 듯 또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밤에 남편은 내게 또 5만원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돈을 어제처럼 낚아채듯 받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손등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거 뭐야?"

그리고 남편의 등과 어깨도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피부가 약해서 그래. 별로 힘들지는 않았어. 일 잘한다고 내일도 나오라던데?"

묻지도 않는 대답을 줄줄이 읊어대며 나의 시선을 피했다.

"이게 뭐냐고?"
"일해서 벌어온 돈!!"
"무슨 일 했냐고?"
"노가다! 며칠만 하면 병원비도 마련할 수 있을 거야!"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부모가 된다는 것,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이 남편으로 하여금 생전 해본 적 없는 막일까지 하게 한 것이다. 그 날부터 남편의 노가다는 6년 넘게 이어졌고, 그 동안에 남은 것은 밝게 자란 두 아이와 온몸에 남은 흉터였다.

작년 남편이 다시 장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처음에는 반대를 했다. 꼬박꼬박 갖다 주는 월급에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혹시 잘못 됐을 때 겪어야 할 그 많은 시련과 눈물을 이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 장사하다 잘못 되면 다시 막노동 해야 되는데, 그럴 수 있어?"

그때 남편이 어설픈 설교나 잘난 척으로 나를 설득했다면 난 끝까지 장사를 못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대답은 나를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래서 장사를 하겠다는 거야. 질릴 만큼 막노동했는데 설마 또 망해 먹고 그 판에 뛰어들겠냐?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지."

자신에 대한 다짐이었다.

외환위기가 벌써 10년 전 일이 되었다. 지나간 세월은 참 무심하고도 편하다. 어느새 그 시절을 추억이라 이름 짓고 회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라면 지금처럼 행복한 미래를 그려볼 수도 없겠지만, 돌아보니 그래도 그 긴 세월 용케도 좌절하지 않고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보면 1만원대를 달리는 잔고에, 수북하게 쌓인 각종 고지서들로 안개 속 같은 현실이지만 10년 후 내 모습도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을 것 같다. 10년 전을 돌아보고 지금을 행복이라 명명하듯 그때쯤이면 아이들도 다 자라고, 나도 아줌마라는 타이틀 말고도 그럴싸한 수식어 하나쯤은 달고 있을 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IMF 10년' 응모글입니다.


태그:#IMF, #10년, #기저귀, #남편에게 악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