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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그 뒤로 많이 나아진 건가? 보증금도 없이 간신히 월세만 내고 살다가, 지금은 특별시로 입성하여 수천만원짜리 전세에 살고 있으니 장족의 발전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전에도 특별시에 적을 두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남편은 문화사업이라나 뭐라나, 여튼 그 비슷한 사업을 했는데 그다지 잘 굴러가는 편은 아니었다. 어렵게 그럭저럭 운영하고 있던 차에 맑은 하늘에 날벼락격으로 IMF가 불어닥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부도로 쓰러지자 연쇄적으로 남편에게까지 위기가 닥쳤다.

@BRI@그동안 은행에서 빌린 것들이 있어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가 왔다. 집으로 직장으로. 결국 전화를 멀리하게 되었고 두 아이는 전화교환원이 되었다. 특히 둘째녀석은 얼마나 까다로운지 꼬치꼬치 물어서 엄마에게 불리한 전화는 적당히 따돌릴 줄도 알았다.

지금 생각해도 아이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어린 녀석에게 세상을 너무 빨리 알게 한 것 같아 가슴이 저민다. 그 후로 전화기피증이 생겼다. 웬만한 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를 안 하게 된 것이다.

미루고 미루다 은행의 부실채권 정리시에, 결국 몇 푼 안 되는 임대주택 전세금 빼서 해결을 하고 한동안 신용불량으로 카드도 만들 수 없었다. 게다가 남편 친구와 연대보증 선 것이 해결이 잘 안 되어 월급 차압까지 당하게 되었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식구들과 외식은커녕 아이에게 자장면 한 그릇 사주는 것도 이리저리 재보고 그러다가 포기해야 했다.

전세를 빼서 빚을 갚았으니 땅바닥에 나앉을 판이다. 수중에 한 푼도 없는데 오라는 곳이 있을까? 그러던 차에 전(97년 봄)에 가보고 반했던 곳이 생각났다. 의정부에 있는 성골이라는 동네였다. 한 번 가보고 예뻐서 그 동네로 이사갈까 했더니 남편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1년이 지났다.

마침 방은 있었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15만원. 방은 네 벽 가운데 반듯한 벽은 하나도 없고 마루도 없고, 방은 컴컴해 낮에도 불을 켜야 하고, 쥐도 돌아다니고, 화장실은 푸세식이고.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일단 목돈 없이도 이사갈 수 있어 다행이고 월세는 직장이 있어 해결할 수 있었다. 이사갈 곳이 있는 것만 해도 고맙고, 동네가 예뻐서 그다지 실망하지 않고 직접 수리를 해 이사를 갔다.

그러나 복도 지지리도 없지. 이사 가던 해 여름 수해가 나서 방 2칸(1채에 1칸) 중에 아래채가 무너져 여름 내내 궂은 날씨 속에 복구 공사하느라 진을 뺐다.

시댁 식구들이 위로차 아이들 방학을 이용해서 오셨다. 시동생네 4식구와 시어머니가 오셨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사네 안 사네 하며 입이 댓발은 나와 있으리라고 짐작을 하고 오신 모양이다. 혹시 어린 애들 떼어놓고 도망가기라도 할까봐 긴장하셨는지.

아닌 게 아니라 그 당시에 생계비관 자살도 많았고 이혼도 많이 증가했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그동안 농사짓는 얘기며 수해가 났는데도 비오는 날의 운치랑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등의 얘기를 열심히 했더니 시어머니 얼굴이 환해지셨다.

"너희는 천생연분인가 보다."

공사 중이라 우리집에선 못 주무시고 윗집에 가서 하룻밤 주무시고 편한 얼굴로 내려가셨다.

살면서 제일 심각한 건 화장실 문제였다. 나야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 그런 대로 참을 만 했지만 아이들은 처음 겪는 일이니 난감할 수밖에. 밤에 화장실 가려면 같이 가야 했고 특히 화장실 푸고 난 다음에는 튀어 오를까봐 화장실 가기를 무지 꺼렸다.

결국 남편이 신문지를 넣어 주든가 아니면 풀을 베다가 넣어 주는 등 일차적 조치를 해주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아이의 비명이 들렸다. 발판이 약해 한쪽이 부러지면서 한 쪽 다리가 빠졌다.

아이 옷을 벗기고 닦아 주어도 냄새가 나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뒤로 아이는 화장실 가기를 더욱 무서워했다. 남편이 발판을 고쳐주긴 했지만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얼마 지나선가는 내가 발을 헛디뎌서 똥물에 발을 담그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 처지는 끔찍한 기억이다.

밤중엔 자다가 천정이 시끄러워 베개를 던져서 쥐들을 쫒았던 기억도 있다. 나중엔 쥐와의 숨바꼭질이 되었다. 쥐들도 지능이 '업'되는지 물건을 던지면 순간적으로 조용하다가 다시금 나타나 소란을 피웠다. 결국 사람이 포기를 하게 됐다. 쥐가 사람보다 한 수 위인가?

어느 날엔 외출했다 돌아왔더니 아이들이 하는 말. 마당에 뱀이 기어 다니는 걸 봤다고 했다. 불안해서 며칠 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완전 동물의 왕국이었다.

냉난방이 안 되어 여름이나 겨울이나 실내온도와 실외온도 차이가 별로 없었다. 여름엔 그래도 버틴다지만 겨울엔 실내온도가 10도 이하로 내려가 저녁 먹고 이불 속에 들어가면 나오질 못했다. 기름 보일러인데 기름은 기름대로 들어갔다.

그래도 그 집에서 4년을 견뎠다. 그러다가 몇 집 건너에 독채가 났다 하여 옮겨서 2년을 더 살았다. 그동안 잘 커준 아이들에게 고맙고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더불어 사는 즐거움도 알았다. 김장을 해서 땅에 묻기도 하고, 장을 내 손으로 담는 방법도 배웠다. 땡볕에서 밭에 풀을 뽑으면서 마음을 비울 수도 있었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던가! 물질적인 건 잃었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다. 아직도 내 집은 없지만 그때 교훈을 생각하며, 자장면 한 그릇도 제대로 못 사먹던 때의 아픔을 생각하며, 욕심 부리지 않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키운다.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IMF 10년에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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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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