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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돈화문
ⓒ 이정근
창덕궁 돈화문을 빠져나온 말이 송현을 넘어 경복궁 모퉁이를 돌아 말머리를 북으로 돌렸다. 일반 전령은 병조소속 단기의 파발마지만 흙먼지를 일으키며 영추문 앞을 내달리는 2필의 말은 승정원 소속 급주마다.

"궁에 무슨 변고가 생겼나?"
"그러게 말이야"

경복궁 서쪽에 자리한 영추문을 지키는 이들은 겸사복 소속 군졸들로서 보통 이른 아침에 떠나는 파발마와 달리 오후에 떠나는 검은 말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는 비밀리에 두 종류의 말을 운용하였는데 자하문 고개를 숨 가쁘게 오르는 말은 흑마다. 공식적인 왕명과 교지를 전달하는 백마는 말머리에 황금색 띠를 둘렀지만 밀지를 전달하는 흑마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 경복궁 영추문. 한양을 설계한 정도전이 도성에 4대문을 짓고 경복궁에도 4대문을 지었다. 서쪽에 있는 문이 영추문이다.
ⓒ 이정근
"멈춰라!"

창의문을 입직하던 군졸들이 삼지창을 가로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인왕산이 찌렁거리는 고함소리는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위한 엄포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자기 위안이기도 했다.

당시 창의문은 오위(五衛) 산하 의흥위 사령군 소속 군졸들로서 힘 있는 자들은 부보상들이 많이 드나드는 흥인문과 숭례문에 배치되었고 배경 없는 자들이 배치 받는 곳이었다.

한양을 출입하는데 있어서는 4대문을 통과해야 했다. 삼개나루터에서 들어오는 장사꾼들은 숭례문을 이용했고 광나루와 두모포를 왕래하는 장사꾼들은 흥인문을 이용했다. 하자 없는 일반 백성들이야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범죄자나 밀도살, 밀주 등 부정한 물건을 운반하는 자들은 순직 군졸들에게 엽전을 쥐어줬다. 군역에 동원된 순직 군졸들로서는 이들이 드나들며 떨구어 준 인정전이 탁배기 한 잔 값으로 쏠쏠했다.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2필의 검은 말이 범상치 않아 보이긴 하였지만 창의문이 어디 보통문인가. 한양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있었지만 임금과 왕족의 사냥 길 외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한마디로 생기는 거 없이 상전만 많은 곳이 창의문이었다.

▲ 조선시대 특수신분에 있었던 사람들이 지녔던 패(국립박물관 소장)
ⓒ 이정근
흙먼지 바람을 몰고 온 2필의 말이 멈췄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품속에서 패(牌)를 꺼내보이자 입직 군졸은 기겁을 했다. 왕의 밀지를 전달하는 전령사들만이 가지고 다니는 신분 패였기 때문이다. 왕의 비보(飛報)를 전달하는 급주마(急走馬)를 지체시켰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삐거덕 소리와 함께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

굽실거리는 입직 군졸을 뒤로하고 흑마는 달렸다. 홍제원을 돌아 북으로 가는 것이다. 그 당시 북으로 가는 전령사나 대륙으로 떠나는 사은사는 서대문을 출입했다. 명나라 사신 역시 모화관을 지나 서대문을 통하여 성내로 들어왔다. 서대문 길은 공식 통로인 반면 창의문 길은 비밀의 길이었으며 북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창의문(彰義門)은 조선 태조 5년 한양성 축성 당시 4소문 중 서북문으로 세워졌다. 창의문 이란 이름은 오상(五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 의(義)가 서방에 해당하므로 한양을 설계한 정도전이 붙인 이름이다. 인조반정 (1623년) 때 반정군이 의로운 군대라는 창의군(唱義軍)의 기치를 내걸고 이 문을 통해 도성에 진입했으니 정도전의 예지능력이 적중한 것일까? 빗나간 것일까?

▲ 창의문
ⓒ 이정근
벽제 해음령을 넘어 단숨에 임진나루에 도착한 흑마를 탄 일행은 난감했다. 서산에 해는 뉘엿뉘엿 해질녘이라 임진강 나루터에 빈 배만 메어있고 뱃사공이 없었다. 개성에 들어가 유숙해야 다음날 평양에 들어갈 수 있는데 임진나루에서 밤을 보낸다면 평양도착이 한식경이나 착오가 난다.

다급해진 밀사는 주막에 들러 도승관(渡丞官)을 수소문했다. 도승관이 무어냐 하면 지역 감영에서 파견된 관리로서 객관에 상주하며 나루터를 오가는 통행인을 감시하는 사람이다. 범법자를 체포하고 도망 나온 노비를 잡아들이고 나라에서 역모사건이라도 터지면 제일먼저 비상이 떨어지는 곳이 나루터다. 요새 말로 표현하면 부두에 파견된 임검 경찰관이랄까.

나루터엔 빈 배만 메어있고 사공이 없으니

지금처럼 사통팔달로 뚫린 도로망은 상상도 못했던 조선 초기. 해상교통과 수로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그 당시 요충지의 나루터는 배삯만 주면 아무 때나 배를 타는 것이 아니었다. 몫이 몫이니만큼 한양에서 개성 평양 의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임진나루터는 요충 중의 요충이었다.

동지사를 비롯한 사신이 계절마다 통과했으며 지방 관속들이 한양으로 올려 보내는 봉물짐이 줄을 이었다. 또한 지방 수령과 사또가 행차라도 할라치면 힘없는 백성들은 아예 오후에 배를 타야 했다.

▲ 임진나루 표지석
ⓒ 이정근
잠시 후. 급한 용무로 강을 건너야 한다는 주모의 전갈을 받고 나타난 사람은 도승관이 아니라 포졸이었다. 철릭에 환도를 쩔렁거리던 포졸은 마상의 일행을 위아래로 살펴보며 짜증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어디서 오신 뉘시오?"

주막 뒷골방에서 뱃사람들과 투전판을 벌리다 나온 포졸은 귀찮다는 어투다. 하지만 검은 흑마를 타고 온 사람들의 행색으로 보아 근동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예사롭지 않은 사람들인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높임말이 나왔다. 나루터에서 부딪치는 뭇사람들에게 함부로 하대하던 포졸로서는 본능적인 변신이다.

"궁에서 나왔소. 빨리 강을 건너야 하오"
"예? 궁이라 굽쇼?"

포졸의 말투가 달라졌다. 궁이라는 낱말은 주변에서 흔히 듣지 못하던 먼 천상의 소리 같은 말이다. 기껏 개성 감영이나 해주 감영이라는 소리를 접했던 신출내기 역관 포졸로서는 궁이라는 말 한마디에 간이 쪼그러 드는 심정이다. 신분 패를 보여 달라는 소리도 못했다. 한마디로 얼어버린 것이다.

급주마를 지체시켜서는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지체할 시간이 없소. 빨리 배를 대주시오"
"나룻배는 있는데 거룻배가 없어 낭패입니다요"

그렇다. 나룻배는 돛이 달린 작은 배로서 사람과 작은 봇짐을 실어 나르지만 나귀도 아니고 체격이 큰 몽고 마 2필을 실어 나르는 데에는 거룻배가 필요했다.

"뭘 꾸물대느냐? 지체 없이 거룻배를 대령하라"

하대가 떨어졌다. 단순한 호통이 아니라 명령이다. 나라의 녹봉을 먹는 관리라도 지방과 중앙이 다르고 품계가 달랐다. 더구나 하늘같은 왕명을 받드는 밀사가 아니던가. 기겁한 포졸이 도승관과 뱃사공을 찾아오겠노라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뱃사공을 대동하고 나타난 도승관은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헐레벌떡 뛰어온 부하 포졸로부터 전후 사정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피륙과 목화의 전국 상권을 쥐고 있는 송도 상단의 우두머리로부터 객사에서 접대를 받고 있던 그는 옆에 끼고 있던 기생마저 물리치고 단숨에 뛰어나온 것이다. "궁에서 나왔다"는 이 한마디는 요즈음 청와대에서 나왔다는 말보다 더 위력적인 말이다.

▲ 임진강 나루터. 인적은 간데없고 잡초만 우거져 있다
ⓒ 이정근
그 당시 개성은 고려왕국의 도읍지 송도로서 고려를 패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조선왕조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최영 장군을 처형하던 날 항의 표시로 동맹철시를 했던 게 송도인이다. 고려에 충성하던 유력인사들에게 조선 조정에 충성하면 직책을 주고 신분을 보장해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혁명세력은 나오면 살려준다는 최후통첩과 함께 이들이 은거하고 있던 광덕산 두문동 골짜기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이들은 불타는 화염에서 나오지 않았다. 개성인의 최후의 보루 자존심을 지킨 것 이다. 이때 희생된 사람이 72명이나 된다. 이렇게 참혹한 사건이 있은 후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겼다.

▲ 목화나무 열매 다래. 다 익은 열매가 벌어지며 하얀 속살이 나오는데 이것이 면의 원료가 된다.
ⓒ 이정근
이후, 개성인들은 벼슬과 담을 쌓고 상인의 길로 나섰다. 물산이 풍부하지 않은 개성은 중개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중개상을 하려면 신용과 물류유통이 생명이었다. 쌀과 건어물은 경강상인들이 독점하자 이들이 눈독을 들인 것이 면화와 피륙이다.

쌀과 소금과 건어물은 덩치도 크고 이윤이 적었다. 화문석과 자개장은 소비처가 제한적이었다. 그렇다고 이윤이 많은 금은 보석은 나라의 통제하에 있었다. 덩치도 작고 이윤이 많은 품목이 뭘까 궁리하던 그들은 피륙과 면화를 찍은 것이다. 인간의 기본생활에서 의(衣)에 해당하는 품목을 선택한 혜안에서 개성인의 약삭빠름과 송도상인의 천부적인 장사꾼 기질이 엿보인다.

신용 하나로 팔도의 상권을 장악한 개성상인

한양은 물론 해주, 양주, 평양, 달성, 동래 등 전국 팔도에 송방을 개설했다. 지역 특산물을 수집하고 독점품목을 공급하기 위한 조직이다. 요새 말로 풀이하면 지점망 구축과 체인점이랄까. 인삼이 대량 재배되기 시작한 숙종 무렵까지 이들은 전국의 의류시장을 석권했다.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 인삼이다. 인공 재배에 성공한 이들은 인삼을 무기로 경강상인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었다.

경상도 동래를 거쳐 들어오는 일본 물건과 평안도 의주를 거쳐들어 오는 중국 물건을 전국에 유통시키는 데에는 전국적인 유통망이 필요했고 그 징검다리가 나루터다. 때문에 1년에 한번 관가에 인사하는 다른 지방 상인들과 달리 송도 상인들은 매월 정기적으로 나루터 객점을 찾았다. 어쩌면 개성상인들은 근데 상인의 비조이며 물류유통의 선구자일는지 모른다.

▲ 임진강 나루터 언덕에 자리 잡은 화석정. 고려 삼절로 추앙받는 야은 길재가 북녘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던 곳이며 율곡의 5대조부가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백성과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 가는 선조의 몽진 길에 불 밝히기 위하여 불태워졌던 것을 1966년 복원하였다.
ⓒ 이정근
밀사 일행은 도승관(渡乘官)의 도움으로 임진강을 건널 수 있었고 내쳐 개성으로 달렸다. 개성에서 일박한 그들은 다음날 평양에 들어갔다. 평양감영을 지키는 순직 군졸들에게 패를 보이자 그들 역시 껌벅 죽었다.

평생 성문에 번을 선다 하드라도 일생에 한 두 번 볼까 말까한 귀한 패였다. 하긴 조선 팔도에 몇 안 되는 귀중한 패였기에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양녕대군이 도착하면 융숭히 대접하고 일거수 일투족을 낱낱이 보고하라"

평안감사가 받아든 밀지의 내용이다. 양녕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왕의 밀명이 떨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평양감영에는 비상이 걸렸다. 양녕대군이 누구인가? 아무리 미치광이라 소문났지만 임금의 형님이 아닌가?

밀지를 곰곰이 뜯어본 평안감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융숭히 대접하라면?" 진수성찬이야 궁궐에 더 많을 터 "그렇다면?"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무릎을 쳤다. 남남북녀라고 조선팔도에 색향(色鄕)으로 이름난 곳이 평양인데 이곳에 여자를 좋아한다는 양녕이 온다면? 이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한양으로 가는 짐을 싸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세종이 친히 보낸 왕명만 잘 받들면 종2품 외관직에서 승차하여 한양으로 가는 길은 따 놓은 당상으로 여겨졌다. 예나 지금이나 관리들의 염원은 승진이다. 만년 외관직에서 머물다가 중앙무대로 진출하여 경관(京官)이 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 편으로 이어 집니다.

*평양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다(?). 감사는 관찰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각 도에 하나씩 있었습니다. 품계는 종2품 외관직으로 현재 도지사와 같은 직책입니다. 따라서 평양은 도가 아니고 평안도에 속한 지역 명이므로 평안감사가 올바른 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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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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