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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뉴스 [오마이포토] 빗 속 가르며 달리는 홍석만

▲ 관악산 연주대. 폐 세자가 된 양녕대군이 연주대에서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 눈물은 자유를 쟁취한 환희의 눈물이었을까? 왕의 자리를 빼앗긴 슬픔의 눈물이었을까? 그 눈물의 진실은 양녕만이 알 것이다.
ⓒ 이정근
사랑을 위하여 왕관을 버린 사람도 있지만 자유를 위하여 왕좌(王座)를 버린 사람도 있다. 양녕대군이다.

조선조 역대 임금에는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군주가 있지만 양녕의 경우는 그들과 격이 다르다.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성종은 인수대비와 결탁한 한명회의 '꼼수'였으며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준 임해군은 선조의 적장자가 아니라 공비 김씨 소생의 서자였다.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난 양녕대군은 세자책봉으로 적통을 공인받은 왕세자였으나 그는 왕의 자리를 미련 없이 버렸다. 자유를 위해서다. 공화정도 아닌 절대 왕정에서 왕이면 뭐든지 할 수 있는데 웬 '생뚱맞은' 자유냐 하지만 그는 왕이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이상의 자유를 택했다.

만인지상 왕의 자리에 앉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왕정을 이끌어가는 두 개의 수레바퀴 즉, 왕권과 신권이 부딪쳤을 때 용상에 앉아있는 임금이라도 물러서기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며 때론 확신에 찬 자신의 의지를 철회해야 하는 자리가 왕의 자리다.

일설에 의하면 왕세자로서 자질이 부족하고 여색을 좋아하며 미치광이였기에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왕의 자리가 보장된 왕세자의 자리를 회수당하는 불우한 사람이라고 혹평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그는 임금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 이상의 자유를 사랑하였기에 미치광이처럼 곡예를 부린 곡예사였다. 그것은 권력의 함수관계에서 목숨을 건 외줄타기였다.

권력의 냉혹함을 어린 시절에 느끼다

▲ 숭례문 현판. 14년간 군왕교육을 받은 양녕대군 친필이다. 호방한 성격과 그릇이 큰 품격이 풍기는 명필이다
ⓒ 이정근
태조 3년(1394년). 그는 이방원의 첫째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1차, 2차 왕자의 난을 통하여 아버지 이방원이 왕의 자리에 등극했을 때 그의 나이 일곱 살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 하지만 알 것은 다 안다. 아버지 이방원의 손에 삼촌들이 죽어가며 뿌린 피비린내를 그도 맡았다. 권력의 냉혹함은 나이어린 그에게 두려운 중압감이었다.

11세에 세자에 책봉되고 14살 때 김한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인 그는 혹독한 왕세자수업을 받았다. 학문에 깊이 빠져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권력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무서운 존재였다. 이러한 그에게 아버지에 의하여 가차없이 처단되는 외삼촌 민무질, 민무구의 죽음은 그에게 권력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세자의 족쇄에서 풀려나는 길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엽색행각과 미치광이 짓이었다. 생사여탈권은 물론 세자책봉도 어차피 자의가 아닌 아버지 손에서 이루어졌고 세자에서 벗어나는 길도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 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자명한 일. 아버지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책략이었다.

아버지 마음을 움직이려면 아버지 눈 밖에 나야 한다. 눈 밖에 나려면 호색한이 되고 미친 척하자. 아니 미치자. 그게 그의 각본이었다. 미치지 않은 사람이 미치기 이거 참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어려운 작업에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아우 충녕(세종대왕)이다. 총명하고 똘똘한 아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외줄타기 광대 짓이었다. 아버지 태종이 충녕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으니까.

"부왕께서는 많은 후궁을 두시면서 왜 세자궁에 여자를 들이는 것을 금하십니까?"

세자 양녕이 어리라는 여인을 동궁에 들여 소란을 피운 일이 있었다. 태종이 지중추부사 첩으로 있던 어리라는 여인을 잡아들여 추국하고 관련된 신하들을 귀양 보내는 것은 물론 어리를 동궁에 들인 문지기를 처단하자 아버지에게 대든 것이다. 멀쩡한 정신에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발칙한 도전이다.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한 망발이다. 군신 간에도 있을 수 없는 발언이며 부자지간에도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죽으려고 환장한 자만이 뱉어낼 수 있는 망언이다. 하지만 세자 양녕대군은 임금 태종에게 했다. 어떠한 짓을 해도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광대 짓이다. 이러한 혜안을 가지고 있는 자가 어찌 광인인가?

야사의 백미로 꼽히는 연려실기술은 이 모든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을 잘했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스스로 미친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여 위에 있는 아무도 양녕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

궁에서 추방된 양녕대군

▲ 소동파의 명작 '후적부'를 초서체로 쓴 양녕대군의 작품 구곡병풍. 자유 분방함이 묻어나는 목판 원본은 양녕대군 부 묘소 지덕사에 보관되어 있다
ⓒ 이정근
이러한 우역곡절을 겪은 그는 소기의 목적대로 1418년 6월 폐세자 되어 궁에서 추방됐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경복궁을 벗어난 그는 뛸 듯이 기뻤다.

허나 기쁨도 잠깐. 경기도 광주에 내려온 그는 산천을 경계 삼아 풍류생활을 하리라 마음먹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위리안치를 면한 유배생활이었다. 한마디로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양녕을 폐위하고 충녕을 등극시킨 아버지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앉자 양녕의 주변에서 있을 수 있는 역모를 방지하기 위한 감시의 그물망이 촘촘히 드리워져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양녕의 집에 기생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광주 목사 이배와 판관 김겸을 의금부에 하옥하자 그는 충격을 받았다. 궁에서 빠져나왔다고 좋아 할 일이 아니라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미치광이 짓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과격한 몸짓이 필요했다. 군졸들이 삼엄하게 방비하는 광주 집 담장을 뛰어넘어 도망 나온 그는 야심한 밤에 한강을 건너 평구네를 거쳐 아차산에 숨어들었다.

이 소식을 접한 태종은 대노했고 대궐은 발칵 뒤집혔다. 내금위 홍악을 급파하여 진상을 조사하는 한편 태종이 직접 현상금을 걸었다. 얼떨결에 현상 붙은 사나이가 된 셈이다.

▲ 묘향산의 어느 암자에 묵으면서 주지스님의 간청에 의해 써준 작품. 오석에 새겨져 지덕사에 있다./산 허리 안개는 아침 짓는 연기련가/ 댕댕이 넝쿨사이에 걸린 달빛은 등불이네/고적한 암자에서 하룻밤 보내고 나니 마치 한층 탑과 같구나
ⓒ 이정근
아차산에서 하룻밤을 보낸 그는 군졸들에게 자신을 노출시켰다. 스스로 잡혀 한양에 들어온 그는 수강궁에서 아버지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분기탱천하여 진노한 호랑이 같은 아버지 얼굴에서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읽었다.

어떤 못된 짓을 하더라도 자신을 죽이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버지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나는 광대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던가? 이러한 양녕의 몸부림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아우 충녕이다.

세종대왕은 역시 현군이요, 우애 깊은 형제다. 아버지에게 호통을 당하고 광주에 내려가 의기 소침해있는 형 양녕을 불러들였다. 명분은 같이 사냥이나 하자는 것이었으나 형의 깊은 뜻을 헤아린 아우가 형님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다.

▲ 헌릉. 양녕대군의 아버지 태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 이정근
세종1년 3월 10일. 철원에서 강무와 사냥이 벌어졌다. 상왕으로 물러앉은 아버지 태종은 물론 큰아버지 정종도 노상왕의 신분으로 참석했다.

비록 왕위에 올라있는 세종이지만 껄끄러운 자리였다. 형님 양녕을 비롯하여 모두가 손위 어른들인데 왕인들 어찌하랴. 이 어려운 자리에서 그래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대화한 것이 형 양녕이었으며 외톨이가 된 형님에게 소속감을 심어준 것이 세종이다.

광주에서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양녕은 거처를 이천으로 옮겼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다. 그 대목을 조선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종 2년 3월 10일. 이천 새집에 안치시키다."

안치라는 낱말이 그러하듯이 그 당시 양녕의 신분과 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질긴 아버지와의 숨바꼭질이 멈췄다. 태종이 신궁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때가 세종 4년(1422년) 5월 10일.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 2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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