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겨울 나그네>는 자전거로 시작해서 자전거로 끝난다.
ⓒ 영화 <겨울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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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겨울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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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면, 비발디의 음악이 먼저 스크린을 적신다. 그의 현악 합주 '화성의 영감 no 6'가 낙엽이 구르는 교정을 위로하면, 이윽고 청춘 남녀의 고전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자전거를 탄 남자 대학생은 가을 정취에 물든 교정을 훑어보다가 그만 청순한 여학생과 부딪치게 되고, 엉겁결에 사과하고 헤어졌으나 그녀가 떨어뜨린 수첩을 발견하게 되는데……. 20년 전의 영화 <겨울 나그네>. '정말 구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정말 젊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문득 20년 전의 정취가 떠오르고 그 남녀 주역을 맡았던 강석우·이미숙이 요즘으로 치면 배용준·손예진 이상의 커플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마음 속 깊이 자전거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젊은 날의 초상> <걸어서 하늘까지> <청춘>, 그리고 최근작 <사랑하니까 괜찮아> 등으로 꾸준히 '젊은 날'의 열병을 다뤄온 곽지균 감독의 데뷔작 <겨울 나그네>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예쁜 여학생과 부딪친다'는 이야기. 그야말로 자전거가 발명된 이후로 동서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한 나절의 몽환으로 간직해온 낭만의 주제를 아름답게 변주한 영화로 여전히 인상깊다. 영화의 음악 선곡을 맡았던 당시 서울음대 교수 김남윤이 선택한 비발디의 '화성의 영감 no 6' 역시 이 영화로 인하여 '자전거를 위한 협주곡'으로 별칭해도 좋을 만큼 젊은 날의 헛헛한 열병을 위로하는 아름다운 배경음악(BGM)으로 기억될 만 하다. [갸륵한 낭만] 사랑의 멀미를 하는 그 찰나의 매혹 그런데 지금이라면 어떨까. 그 영화로부터 꼭 10년이 흐른 뒤 김성수 감독은 영화 <비트>에서 정우성에게 혼다 CBR-600 오토바이를 타게 하였고 요즘에는 웬만하면 스포츠카가 스크린을 찢어버릴 듯이 질주하는 양상이니, '자전거를 탄 풍경'은 대학로의 작은 무대나 아니면 유명한 옷 광고에서만 만날 뿐인 신세가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대학가에는 자전거는 찾아보기 어렵고 패션 스쿠터와 근사한 자동차가 일진광풍을 일으키니, 아무래도 저 <겨울 나그네>의 낭만이란 옛 시절의 자료 화면으로 사라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문장이나 스크린 속에서 늘 '자전거'는 쇠락하는 아름다움, 겨우 존재하는 미미한 사연들, 마음 깊이 저장해둔 내밀한 아픔들, 한 순간 피고 질 뿐인 덧없는 것들, 이제는 그 이름도 냄새도 촉감도 잊혀진 옛 기억들을 잠시나마 환기시키는 정물화로 등장한다.
ⓒ 영화 <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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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주연의 영화 <파이란>을 기억하시는지. '처음 바다를 보았습니다. 강재씨.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 당신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편지를 쓴 파이란은 강원도 대진항 해안도로를 자전거로 달렸다. 이렇게 자전거는 곧 바스라지게 될 운명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한 순간이 영원으로 기억되는 갸륵한 낭만으로 승격된다. 이를테면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도 머지않아 총탄 세례로 죽게 될 폴 뉴먼은 캐서린 로스를 자전거에 태우고 찰나의 매혹을 누리며, 이정향 감독의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도 솜사탕같은 사랑의 멀미를 앓는 다혜 역시 청계산 길에서 자전거를 탄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페달을 밟으면서 우린 자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집배원의 우정을 그린 영화 <일 포스티노>
ⓒ 영화 <일 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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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전거는 미미할 뿐이다. 오토바이의 속도와 자동차 엔진에 비하여 자전거는 그야말로 두 발로 힘껏 페달을 밟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뉘라서 자전거를 생략한 채 삶의 첫 시기를 보낸단 말인가. 자전거는 힘이 없지만 누구든지 힘이 없을 때라도 자전거 페달은 밟으면서 컸다. 앞의 영화 <겨울 나그네>는 쓸쓸하게 죽어버린 강석우의 아들이 세발자전거를 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 아이가 실제로 성장하였다면 지금쯤 스무살 청춘이 되어 패션 스쿠터를 타고 교정을 누빌지 모르지만, 그러나 어쨌든 자전거로 생애의 진정한 첫 걸음을 디뎠다는 것은 기억할 만 하다. 영화 <일 포스티노>. 우리 말로 '우체부'가 되겠다. 이 영화에서 망명 시인 네루다에게 우편물을 배달하던 젊은 우체부는 매일같이 자전거를 타고 시인을 찾아가 밤하늘의 별똥별같은 깊은 말을 새겨듣다가 이윽고 시인 못지않은 예술가가 된다. 비슷한 색감의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도 장차 영화감독이 될 꼬마는 허름한 극장의 영사 기사와 함께 자전거를 탄다. 그렇게 유년의 인류는 자전거와 더불어 성장한다. 영화 <말레나>에서도 소년은 자전거를 탄다. 레나토가 매혹적인 여인 말레나를 처음 본 날은 '무쏠리니가 선전포고를 한 날'이자 생애 처음으로 '자전거를 얻은 날'이다. 직접 핸들을 잡고 페달을 밟으면서 소년 레나토는 반바지 대신 긴 바지를 입기 시작한다. 아이가 어른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멀미나는 성장기를 거친 후에도 자전거는 늘 우리 곁에 있다.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에서 김혜수가, 그리고 고 오병철 감독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여주인공들이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들은, 그리고 비밀과 거짓말로 가득 찬 세상에서 도저히 침략당할 수 없는 마음속의 여린 영토를 지키려는 이와이 순지 감독의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에서 자전거가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되는 것은 아무리 밟아도 시속 20km를 넘기 어려운 자전거가 지닌 경이로운 매혹을 선택한 것이다.
ⓒ 영화 <말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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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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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가혹한 세상, 섬찟한 상처 물론 자전거는 세상만사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오토바이나 자동차였다면 달라졌을 지도 모를 사정이건만 자전거였기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더 잦게 벌어진다. 영화 <첨밀밀>은 새로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대륙에서 홍콩으로 건너온 두 남녀의 이야기. 장만옥을 태우고 한 순간의 행복을 질주하던 여명의 자전거는 머지않아 녹슨 자전거로 바뀌고 그렇게 두 남녀의 사랑도 일그러진다. 세상은 자전거 하나로 버티기에는 너무나 가혹하다. 그러나 가진 것이 자전거밖에 없는, 심지어는 그 자전거 하나도 변변치 않는 사람들에게 이 두 바퀴로 가는 물건은 생의 전체이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이라면 이 명제의 고전이거니와 중국 6세대 감독 그룹의 대표주자 왕샤오솨이의 <북경자전거>, 혹은 쉽게 접할 수 없어 안타까운 다큐멘터리 <자전거 사막횡단> <세바퀴 자전거 여행> 등은 모두가 자전거 대신 쿵쾅거리는 엔진을 선택한 뒤에도 누군가는 자전거에 의지한 삶을 고통스러우면서도 거룩한 의지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친 김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자전거를 소재한 것이로되 그 미물이 간직한 끔찍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상처를,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마음깊이 숨겨놓은 어떤 '비밀과 거짓말'을 섬찟하게 써낸 김소진의 소설 <자전거 도둑>이야말로 오늘의 이야기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낡은 자전거로 세상에 뛰어든다 어쨌든 '자전거를 탄 아름다운 풍경'을 꿈꾼 <오마이뉴스>의 이 기획도 일차 마무리될 즈음이다. 그래서 몇 편의 기억들을 적어보았다. 이렇게 다시 찾아보고 적는 사이에도 내 자전거의 일상에 변화가 많았다. 새로 산 지 넉 달쯤 되는 아내의 자전거가 흔적없이 사라졌고, 딸 아이 자전거는 누군가 끌고가다가 포기한 채 화단에 처박아 놓았다. 자물쇠에 걸려 체인이 늘어지고 바큇살이 휘고 말았다. 험악한 도로 사정이니 심각한 공해니 하는 중차대한 문제에 더하여 이 '좀도둑'의 장난도 자전거를 일찌감치 포기하게 만든다. 내 자전거의 앞 라이트도 장착한 지 일주일 만에 누군가 떼어가 버렸으니 자전거가 과연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줄 지 걱정이다. 그러던 참에 며칠 전 길을 가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둘다 초보였다. 예닐곱살 쯤 되는 아이는 잔뜩 겁을 먹었고 아이가 겁먹은 것을 보고 아주머니도 지레 겁을 먹었는지 자전거를 뒤에서 잡은 채 살며시 밀어주는데 너무 '살며시' 밀어주고 있었다. 자전거 바퀴가 너무 느리게 돌면 옆으로 기울어 넘어지게 된다. 그래서 그 모자는 자꾸 비틀거렸다. 내가 도와줬다. 조금은 세게 밀어 약간 속도를 높이고 그 상태로 뒤에서 붙잡고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손을 놓았다. 아이는 십여 미터를 더 달리다가 멈췄고 뒤에서 지켜보던 아주머니는 꼬마의 '작지만 위대한 첫 걸음'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누군가는 지금도 자전거를 타고갈 것이다. 은밀한 유년기와 아슬아슬한 성장기와 위태로운 현실의 시간 축으로 누군가는 지금도 자전거를 타고 있을 터이니 안도현의 시 '낡은 자전거'를 위로삼아 적음으로써 세상의 모든 자전거 행렬에 기어코 동참하고자 한다. 낡은 자전거 (시/안도현)
ⓒ 영화 <자전거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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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핸들이며 몸체며 페달이 온통 녹슨 내자전거 혼자 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어 담벽에 기대어 서 있구나. 얼마나 많은 길을 바퀴에 감고 다녔느냐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알수록 삶은 여위어 가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야 자전거야 왼쪽과 오른쪽 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잡았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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