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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시 아이스바 먹어 보셨나요?
ⓒ 이종찬
까맣게 잊고 있었던 지난 늦가을의 그 달콤했던 홍시

"아빠! 비닐로 꼭꼭 감싸놓은 빠알간 이게 감홍시 아냐?"
"맞아. 근데 그걸 어떻게 찾았어?"
"아이스크림을 찾다 보니까, 냉동실 안쪽에 숨겨져 있던데."
"그래. 여름이 다 가도록 그걸 몰랐어. 지난 늦가을에 아빠가 너희들에게 주려고 넣어두었던 건데."
"근데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이걸 어떻게 먹어?"
"사과 자르듯이 잘게 잘라 먹으면 아이스크림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입 속에서 살살 녹아내리지. 잘라줘?"
"근데 씨는 어떡해?"
"씨는 빼고 먹으면 되지."


지난 27일 오전 11시쯤이었을까.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난 큰딸 푸름이(15)와 작은딸 빛나(13)가 냉장고 문을 아래 위로 마구 여닫는가 싶더니 이내 꽁꽁 언 홍시가 든 비닐 봉지를 하나 들고 쪼르르 달려왔다. 딸 둘이 보기에도 발그스레하게 생긴 그 홍시가 꽤 먹음직스럽게 보였나 보다.

그 홍시는 지난 늦가을 섬진강 일대로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갔을 때 쌍계사 들머리에 있는 화개장터에서 사온 동이감이었다.

그때 나는 가족들과 나눠 먹고 남은 그 홍시를 식용비닐로 감싸 냉동실 깊숙이 넣어두었다. 홍시를 꽁꽁 얼려두었다가 두 딸이 아이스크림을 찾을 때면 냉동실에서 꺼내 예쁘게 잘라 홍시 아이스바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냉동실에 넣어둔 그 홍시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홍시를 냉동실 문을 열어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놓고 있었으니……. 그런데 냉동실 문을 열고 아이스크림을 찾던 두 딸이 뒤늦게 찾아낸 것이다(늘 백화점 일에 쫓기는 아내는 여름이면 아이스크림을 열 개 정도 사서 냉동실에 넣어둔다).

▲ 지난 늦가을, 평사리 초가마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추억의 동이감
ⓒ 이종찬
▲ 지난 늦가을 화개장터에서 팔고 있었던 동이감 홍시
ⓒ 이종찬
동이감을 줍기 위해 안달을 하던 어린 날

내가 태어나 어릴 때부터 살았던 창원 상남면(지금의 상남동) 야트막한 산자락 곳곳에는 단감나무 과수원이 참 많았다. 그때 우리 마을에도 앞마당이나 뒷마당에 감나무 한두 그루씩 없는 집은 한 곳도 없었고, 다랑이밭 곳곳에도 흔해 빠진 게 감나무였다. 하지만 과수원에서 기르는 단감나무와는 달리 대부분 떨감나무였다.

감은 크게 단감과 떨감(떫은 감)으로 나눠진다. 단감은 초복이 지나기 시작하면서 단맛이 서서히 배어들기 시작하지만 떨감은 홍시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발그스레하게 익어도 한 입 베어 물면 떫은 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마을 아이들은 감나무 아래 떨어진 떨감을 주워 빈 장독에 소금물을 부어 담가두곤 했다.

그렇게 2~3일이 지나면 장독 안의 소금물에 가라앉아 있던 떨감이 위로 둥실 떠올랐다. 그때 그 떨감을 꺼내 한 입 베어물면 떫은 맛은 온데간데 없고 단감처럼 달짝지근하게 아삭아삭 씹혔다. 하지만 땡감은 작고 씨가 너무 많은 데다 맛이 별로 없었다. 땡감보다 2배 넘게 크고 씨가 많이 없는 동이감이 훨씬 맛이 좋았다.

하지만 우리 마을에서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동이감이 열리는 감나무는 몇 그루 되지 않았다. 다 자라도 자두만한 크기의 땡감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우리 마을 아이들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동이감나무가 많은 북채밭(마을 북쪽에 있는 채소밭)으로 몰려들어 풀숲 곳곳에 떨어진 동이감을 줍기 위해 안달을 하곤 했다.

▲ 동이감이 벌써 바알간 빛을 감꼭대기에 물었다
ⓒ 이종찬
▲ 동이감은 겉보기에는 발갛게 보여도 홍시가 되기 전까지는 제법 떫다
ⓒ 이종찬
갈증 숙취 풀어주고 소화 기능까지 도와주는 홍시

단감과 떨감은 수확 또한 달리 한다. 단감은 홍시가 되기 전, 단단한 상태 그 상태로 수확을 한다. 하지만 떨감은 단단한 상태에서는 껍질을 깎아 곶감을 만들거나 아니면 홍시가 되어야 제대로 먹을 수 있다. 게다가 떨감 중에서도 곶감이나 홍시로 나오는 대부분의 감은 동이감이다. 일반 떨감은 홍시가 되어도 크기가 작고 먹을 게 별로 없어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홍시는 "생감의 떫은 맛이 자연적 또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제거되어 붉은색으로 말랑말랑하게 무르익은 상태의 감"이라고 적혀 있다. 이어 홍시는 "연시(軟枾) 혹은 연감이라고도 부르는데, 홍시는 감의 색깔이 붉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연시는 질감이 말랑말랑하고 부드럽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덧붙여 맛은 달지만 성질은 차갑다는 홍시는 독이 없고 폐결핵과 화병을 낫게 하며, 열독(더위로 일어나는 발진)을 풀어주는 것은 물론 토혈까지 그치게 한단다. 그리고 곶감은 음식의 소화를 돕고 얼굴의 기미를 없애주며, 카로틴과 비타민C(귤의 2배)가 많아 감기예방에 뛰어나다고 한다.

조선시대 명의 허준이 쓴 <동의보감>에는 "홍시는 숙취를 풀어주는 효능이 있으며, 심장과 폐를 튼튼하게 한다"고 나와 있다. 이어 홍시는 갈증을 없애주고 소화 기능을 좋아지게 하는 것은 물론 몸의 저항력을 높이고 점막을 강하게 만들어 꾸준히 먹으면 멀미예방까지 할 수 있단다.

▲ 냉동실에서 갓 꺼낸 꽁꽁 언 홍시
ⓒ 이종찬
▲ 지난 늦가을에 넣어둔 홍시의 빛깔이 지금까지도 참 곱죠?
ⓒ 이종찬
"설사병에는 홍시 이기 최고라 카더라"

지난 해 가을, 가족들과 함께 갔었던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초가마을. 그 마을 곳곳에는 주먹만한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린 동이감나무가 참 많았다. 아니, 그 초가마을에 있는 감나무는 모두 동이감나무였다. 발갛게 매달린 탐스런 그 동이감을 바라보자 어릴 때 추억이 눈 앞에 동이감처럼 주렁주렁 매달리기 시작했다.

"가시나 니 요즈음 얼굴이 노리끼리 한 기 오데 아푸나?"
"며칠 전에 제사음식을 좀 많이 먹었더마는 갑자기 설사병을 만나서 그렇타 아이가."
"문디 가시나! 핵교에서 공부는 잘하는 기, 니 몸 하나는 우째 그래 챙길 줄 모르노. 아나!"
"이기 뭐꼬? 홍시 아이가?"
"내가 니 줄라꼬 며칠 전에 우리집 감나무 꼭대기에 힘들게 올라가가꼬 딴 기다. 울 할배가 그라던데 설사병에는 홍시 이기 최고라 카더라."
"고맙다. 그래도 내 생각하는 거는 니뿐이다."


▲ 사각사각 사르르 녹아내리는 홍시 아이스바 드세요.
ⓒ 이종찬
▲ 꽁꽁 언 홍시의 껍질은 잠시 냉동실 밖에 두었다가 벗기면 술술 벗겨진다.
ⓒ 이종찬
"올 가을에는 그곳에 가서 홍시를 많이 사자"

어릴 때 추억을 가물가물 불러일으키는 홍시. 그날 나는 꽁꽁 얼어붙은 그 홍시를 사과처럼 예쁘게 잘라 씨를 모두 빼낸 뒤 나무젓가락에 끼워 푸름이와 빛나에게 주었다. 발그스레한 홍시 아이스바를 입에 문 두 딸의 얼굴에서 금세 발그스레한 미소가 곱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맛이 어때?"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더 시원하고 맛이 좋아. 또 줘?"
"빛나는?"
"아빠! 이거 가을이나 겨울에 먹어도 돼?"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든 먹어도 되긴 되지. 근데, 인제 냉동실에 홍시가 하나도 없는데 어떡하지?"
"아빠! 그러면 올 가을에는 그곳에 가서 홍시를 많이 사자."
"너희들이 가게에서 사 먹는 아이스크림보다 그 홍시 하나 값이 훨씬 더 비싼데?"


그래. 술을 많이 마신 그 다음날 아침, 심한 숙취로 갈증과 설사, 속쓰림, 두통 등의 고통을 견디기 어려울 땐 지난 늦가을 냉동실에 보물처럼 숨겨둔 꽁꽁 언 홍시 몇 개 꺼내 아이스바처럼 조각 내 먹어보자. 사각사각 씹히다가 이내 입 속에 시원하게 녹아내리는 홍시 아이스바의 달콤한 맛 속에 숙취와 갈증은 물론 기승을 부리는 늦더위까지 사르르 녹아내리리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골아이', '시민의신문', '유포터', '씨앤비'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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