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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이 땅 곳곳에서 숲의 파수꾼 노릇을 해온 공간이 둘 있으니 바로 사찰과 왕릉이다. 이 중 사찰의 역할은 근래 들어 좀 모호해져버렸다. 변함없이 잘 지키고 잘 가꾸는 곳이 있는가하면, 오히려 난개발에 앞장 서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도 왕릉은 그렇지 않다. 죽은 자, 그것도 왕을 위한 공간이라는 상징성이 제도와 통념의 양면에서 여전히 침범하기 어려운 권위를 지닌 덕이다.

서울에도 여러 왕릉이 있다. 지명으로 더 익숙한 태릉(정확히는 태강릉), 선릉(선정릉), 정릉, 헌인릉, 의릉 등이 옛 한양 땅을 외호하듯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홍릉은 이장되고 터만 남아 수목원이 되었다). 여기에 경기도 일대의 능원들까지 합치면 그 면적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있는 헌인릉 오리나무숲
ⓒ 박정민
일반인에게는 지명으로 그리고 학창시절의 '재미없는 소풍장소'로 희미하게 기억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왕릉과 그에 딸린 숲인 능림의 역할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 의의야 말할 것도 없고, 공기가 나빠서 발암률이 높다는 서울의 작은 허파들인 동시에 동식물의 마지막 대피소이기도 한 것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능원으로 꼽을 수 있는 헌인릉과 선정릉을 돌아본다.

태종의 기가 서린 헌인릉 오리나무숲

양재동 아래편 대모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헌인릉은 그 유명한 태종과 원경왕후를 위한 헌릉과 한참 후대인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이 합쳐진 이름이다. 상당한 규모와 주인공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외진 위치 때문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래서인지 생태계는 더 건강한 편이다. 능 아래쪽의 오리나무숲이 작년 말에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 태종의 헌릉 앞을 지키고 서있는 무인석. 아직도 서슬이 시퍼렇다.
ⓒ 박정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름이지만 오리나무를 구경하기는 쉽지 않다. 5리마다 한 그루씩 심어놓고 이정표로 썼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만큼 예전에는 흔했던 모양이지만 산기슭, 밭둑길, 개울가와 같이 새로 개발하기 딱 좋은 곳에 살곤 해서인지 지금은 귀해져버렸다. 헌인릉의 오리나무숲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서울에서 대면할 수 있는 드문 예에 속한다.

여기까지 와서 무덤과 오리나무만 보고 갈 일은 아니다. 두 능의 뒤편으로 산기슭을 빙 둘러올 수 있게끔 산책로가 조성되어있다. 경사도 완만하고 인적도 드물어 호젓하게 산책과 관찰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도중에 만날 수 있는 산새도 다양하다. 박새나 직박구리처럼 흔한 새는 물론 동고비, 쇠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등이 바지런히 살림을 산다. 딱따구리만도 3가지가 눈에 띄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 대모산의 청딱다구리. 쇠딱다구리나 오색딱다구리에 비해 만나기가 쉽지 않다.
ⓒ 박정민
헌인릉을 찾으려면 지하철 양재역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 성남 쪽으로 가는 많은 버스가 헌인릉 정류장을 지난다. 길을 건넌 후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입구가 나온다. 행여 입구 왼쪽의 건물을 보고 놀라지는 마시길. 태종의 능 바로 옆에 국정원이 자리 잡은 것을 두고 어울린달 것까지야 없지만 두 이미지의 만남이 영 어색하지만도 않다. 대개의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월요일이 휴관일이다.

강남의 작은 허파 선정릉

거의 행정구역상으로만 서울인 듯 보이는 헌인릉 일대와 달리 선정릉은 누가 봐도 서울인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다. 운치와 고요를 구하기는 곤란하지만 대신 교통이 아주 편하다는 장점은 있다. 선릉에는 성종과 정현왕후가, 정릉은 그 아들 중종이 잠들어있다.

능림들은 유사한 조경양식을 보여준다. 뒤쪽 산비탈로는 소나무를, 아래쪽 평지에는 오리나무를 심는다. 헌인릉이 전형적인 예이며 선정릉의 아래쪽은 오리나무 대신 빌딩이 숲을 이루긴 했지만 뒤쪽의 솔숲만큼은 일품이다.

▲ 선릉과 정릉 사이의 솔숲. 놓치기 힘든 삼림욕 코스다.
ⓒ 박정민
여기에는 중요한 생태학적 이유가 있다. 원래 소나무는 마르고 험한 바위산 비탈에서 잘 자라는 반면 오리나무는 평평하고 습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능을 쓰는 산기슭은 으레 위쪽으로 바위산, 아래로는 개천이 흐르는 습지대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선인들의 지혜란 종종 감탄의 대상이다.

워낙 교통이 편하고 널리 알려진 곳이라 이곳은 평일에도 방문객이 많다. 역시 산책과 운동 삼아 찾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점심시간의 직장인들을 위해 12시에서 1시 사이에 이용할 수 있는 할인티켓도 준비되어 있다. 사면이 빌딩으로 포위된 곳이라 생태관찰지로 권장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가까운 직장인들에게는 특혜나 다름없는 공간이다. 지하철 선릉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으며, 역시 월요일은 휴관이다.

▲ 싸리나무. 너무나도 친숙한 이름이지만 정작 알아보는 이는 많지 않다. 요즘이 한창 꽃이 필 때다. 화려한 꽃나무를 심지 않는 능원의 숲에서 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꽃이다.
ⓒ 박정민

▲ 신도(神道)는 뻗어 홍살문까지 닿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힘세고 욕심많은 후손들의 '빌딩시위' 앞에서는 선왕의 기세도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 박정민
돈인가 목숨인가

생태공원과 녹지의 중요성을 역설할 단계는 지났다. 이미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놀이공원 관람객은 해마다 줄어서 걱정인 반면, 월드컵공원이나 서울숲에는 각각 1년에 1000만 명이 몰려들고 있다. 일반인의 의식과 생활은 한창 선진국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과 정부 관계자들을 보는 눈길이 더욱 측은하다. 뒤처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새만금도 모자라 장항갯벌에 한탄강댐까지, 급기야 어느 정치인은 서울과 부산을 운하로 잇겠다는 어이없는 구상까지 들고 나왔다. 이쯤 되면 모르는 것인지 모른 척하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혹자는 "경제냐 환경이냐"며 문제를 단순화시키려 든다. 개발은 돈이 되고 환경보전은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돈이냐 목숨이냐." 난개발은 돈 대신 전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담보 잡히는 일이다. 그래도 돈인가. 더구나 십중팔구는 건설족의 주머니로 다 들어갈 텐데 말이다.

환경은 더 이상 후손과 동식물의 처지를 염려할 정도로 한가로운 주제가 아니다. 환경단체들도 이런 낡은 표현은 그만 폐기했으면 좋겠다. 당장 나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환경문제를 내 문제로 여기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시대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생태포인트를 향해 그 첫걸음을 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 동식물을 위해, 후손을 위해,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위해 숲과 자연은 필수다. 찾아갈 자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축복에 해당하는 일이다.
ⓒ 박정민

덧붙이는 글 | 약 3개월에 걸쳐 연재했던 '서울 생태마실'을 이것으로 마칩니다. 관심과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송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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