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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한 황학루의 장엄한 모습. 높이 51미터로 내부에는 엘리베이터가 운행된다.
ⓒ 조창완
연속 이틀째 무리한 술자리 때문인지 아침이 무겁다. 예정된 모일 시간이 거의 되어 가는 데도 조식을 위해 스카이라운지에 모여든 참가자들은 좀처럼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한 홀리데이인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는, 이제는 돌아가지 않는 회전식당으로 우한의 중심부에 있어서 시내의 전경을 보기에 아주 좋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정 선배와 전에 취재 때문에 들렀을 때도 이곳에서 묵었다. 이후 책까지 같이 내고, 더러는 여행까지 동행하는 것을 보면 사람의 인연이란 참 알 수가 없다.

중국의 찜통 우한

결국 출발시간보다 30분이나 지나서 하나둘씩 차에 모여든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홀수날이라 번호판 끝자리가 짝수인 차가 창지앙디이따치아오(長江第一大橋)를 건너지 못한다는 것이다.

강만 건너면 바로 목적지인 황허로우(황학루)인데, 2대교까지 가려면 너무나 긴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가이드와 중국어를 하는 정 선배, 기자가 일행들을 책임지고 각각 3대의 택시로 나누어 타서 다리를 건넌다.

후베이성의 성도인 우한(無漢)은 인구 475만명의 큰 도시다. 그런데 다리는 현재 3개 밖에 없어 두 다리를 짝수와 홀수로 나눠 다니는 상황이다. 짝수날에는 짝수 만, 홀수날에는 홀수 만 다닐 수 있는 2부제인 셈이다. 이런 정책이 없다면 이미 포화상태인 도시의 교통을 끌어갈 수 없다.

우한은 재미있게 도시가 형성됐다. 우선 도시의 중간에 창지앙(장강)이 지난다. 강의 남쪽은 통칭해 우창(武昌 무창)으로 불린다. 강의 북쪽 지역에는 또 한수이(漢水)강이 통과해 양분한다. 상류 쪽은 한양(漢陽), 하류 쪽은 한코우(漢口)로 불리는데, 이 세 도시를 통칭해 우한(武漢)으로 부른다.

한양에 신도시가 구축되면서 세 도시가 정확히 균형을 맞춰져 간다. 중국 현대사에서 이곳이 재미있는 것은 마오쩌둥과 장쩌민이 이곳에 와서 자신의 건재를 말하기 위해 도강 수영을 했기 때문이다.

▲ 황학루에 바라본 창지앙(장강) 다리와 장강의 모습.
ⓒ 조창완
기자에게 이 도시가 정겨운 것은 중국에 왔던 첫 목적지가 우한이었기 때문이다. 1998년 중국에는 수십 년만에 대홍수가 찾아왔다. 공식적으로도 5천명 가량이 희생된 대홍수였다. 홍수는 8월말에야 끝났고, 기자는 10월 1일에 이곳에 들렀다. 홍수의 피해현장과 극복하는 이들의 모습을 취재한다는 명목이었다.

통제라인을 뚫고, 우한의 한 시골을 찾아가 취재를 하고, 난징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도 취재를 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첫 중국 길이었다. 또 그 길을 통해 중국에서 그냥 살아 볼만하고, 알아 볼만하다는 판단을 내려서 결국 중국으로 건너오게 됐으니 개인사에 있어서는 제법 의미심장한 걸음이었다.

그 후로도 자주 우한에 들렀는데, 그 중 두 번은 한 여름이었다. 우한의 더위는 중국 내에서도 최고로 친다. 아프리카나 사막의 더위에 어지간히 익숙한 사람도 우한의 더위 앞에서는 거의 기진맥진한다.

우한은 매년 40도 이상 기온이 올라가는 날짜가 20∼30일 정도고, 이때 습도는 보통 95% 정도다. 따라서 완전히 찜통 안에 있다고 상상하면 된다.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 밖에 나오면 기본적으로 카메라 작동이 불가능할 정도다. 두 곳의 기온 차로 렌즈에 수증기가 끼어 촬영을 막기 때문이다.

회한과 정리가 쌓여 만든 천하제일누각

▲ 이백이 쓴 '장관'. 풀들이 덮어 독특한 모습을 드러낸다.
ⓒ 조창완
남문으로 들어가 아지(鵝池)와 비림(碑林)을 간단히 보고 작은 벽 앞에 서니 이백이 쓴 '장관(壯觀)'이라는 당당한 필체가 눈에 띈다. 봄기운에 내려온 풀들에 약간 가린 글씨가 정겹다. 몇 계단을 올라서 정상부 근처에 도달하니 기이한 돌들이 있고 흥미로운 동상이 서 있다. 돌을 좋아했던 북송의 명필 미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김풍기 교수가 설명한다.

▲ 최호가 쓴 '황학루'를 써 놓은 석각.
ⓒ 조창완
미불 형상의 바로 옆에는 최호의 시비가 있다. 사실 황허로우는 그 기세도 대단하지만 명성의 상당 부분은 최호의 시에서 비롯됐다. 역대 문객은 물론이고 당대 최고의 시인 이백까지 녹다운 시킨 시를 천천히 읽어보자.

黃鶴樓 황학루 - 최호(崔顥)

昔人己乘白雲去 옛 사람은 이미 흰 구름을 타고 날아가고
此地空餘黃鶴樓 이곳에는 쓸쓸히 황학루 만 남았구나
黃鶴一去不復返 한번 간 황학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白雲天載空悠悠 흰 구름만 하늘에서 유유히 떠다니는 구나
晴川歷歷漢陽樹 비 갠 강가에 한양의 나무가 늘어서 있고
芳草萋萋鸚鵡洲 앵무주에는 풀만이 무성히 놓여있다
日暮鄕關何處是 해 지는데 고향으로 갈 곳은 어딘가
煙波江上使人愁 강 위 안개 만이 사람의 근심을 더해진다


우선은 많은 이들에게 이미 사라진 선인(이상향)의 그리움과 가장 그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들의 마음을 읊었으니 그 이상의 주제는 없다. 거기에 황허로우가 가진 주변 모습의 정수만 담았으니 그 이상의 시를 짓기 어려웠을 것이다.

웨양로우에서는 둥팅후를 볼 수 있다면, 황허로우는 창지앙을 볼 수 있다. 쉬안화 감독의 '남자사십'(男子四十)은 홍콩에서 살아가는 중년남성들의 다양한 회안을 담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인 국어 선생은 수업과 생각 속에서 항상 창지앙을 떠올린다.

산샤(三峽 삼협), 염노교(念奴嬌), 적벽(赤壁) 등의 심상은 그들이 생각하는 마음의 이상향처럼 들린다. 그런 창지앙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으니 시인 묵객들이 지나칠 리 없다. 거기에 배를 타고 유랑하던 이들이나, 호남으로 유배를 떠나는 이들은 꼭 우한을 지나게 된다. 그러니 그 회한과 정리가 쌓여 산을 이루는 게 당연하다.

황허로우는 우창의 셔산(蛇山)에 우뚝 솟아있는 누각이다. 처음 만들어진 시기가 오(吳) 황무(黃武) 2년(223년)에 웨양루처럼 군대의 망루로 만들었다. 하지만 황허로우는 최호의 시를 통해 생명을 얻었고, 다양한 역사적 변천 속에 지금의 건물은 1985년에 준공됐다. 높이 51.4미터, 하부 지름 30미터, 상부 지름 18미터의 대형 건축이고, 안에는 2개의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 있다.

버드나무 대신에 빌딩 울창한 우한

▲ 황학루에서 단체사진.
ⓒ 조창완
황허로우에 올라가 오랜만에 우한 시내를 둘러본다. 옛날에 시인들이 버드나무가 창창했다고 하던 곳에는 이제 빌딩 숲이 무성하다. 산샤댐이 생기면서 창지앙을 드나드는 배의 크기가 늘어나면서 물류량도 증가한다. 중간 기착지인 우한의 역할도 증가하고 있다.

황허로우를 나오니 쉽게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 한 분의 제안으로 버스를 타보기로 했다. 다행히 탄 버스에 자리가 있어서 앉아서 창지앙을 건넌다. 여행이란 다양한 경험의 추억인데, 이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

벌써 세 번째 창지앙을 건너는 셈이다. 창지앙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오간다. 최호의 시가 좋다지만 이백인들 그냥 이곳을 지날 리 없다. 그는 친구 맹호연을 보내면서 이별의 심사를 노래했다.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황학루에서 맹호연이 광릉으로 가는 것을 보내며 - 李白

故人西辭黃鶴樓 옛 친구에게 황학루에서 이별을 고하고,
烟花三月下揚州 꽃피는 삼월에 배타고 양주로 내려갔다
孤帆遠影碧空盡 외로운 돛단배의 그림자가 푸른 하늘로 사라진다
唯見長空天際流 보이는 것은 하늘에 닿은 장강 물뿐이어라


일행은 한코우의 번화가인 지앙한루(江漢路)에서 버스를 내렸다. 이미 시간이 늦어졌지만 제법 여유롭게 우한의 명동을 걸어서 호텔을 향했다. 베이징의 왕푸징이든, 상하이의 난징루든 간에 상업화된 도시의 번화가는 비슷하다.

다시 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두 번째 기착지인 징저우(荊州 형주)를 향한다. 우한에서 징저우 가는 길은 상당히 잘 정비되어 있다. 중국이 현대 들어가 가장 열정적으로 투자한 산샤(三峽)댐이 징저우, 이창(宜昌) 지나서 있기 때문이다.

좀처럼 110킬로미터의 속력을 넘지 않는 차 덕분에 일망무제의 들판을 보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 동행한 한 분이 이 넓은 땅에 대한 부러움을 숨기지 않는다. 사실 창지앙 주변은 홍수만 없다면 엄청난 식량생산의 기능을 갖고 있다. 물론 이미 완공된 산샤댐으로 인해 홍수의 위험은 상대적으로 줄었으니 이곳이 중국의 식량기지가 될 가능성은 더 많아졌다.

전략 요충 징저우와 삼국지 영웅 관우

▲ 형주성의 입구. 지금도 형주의 옛 도시는 이 성으로 둘러쌓여 있다.
ⓒ 조창완
3시간여 만에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징저우 시내에 들어섰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고성으로 향했다. 삼국지에서 징저우(荊州 형주)가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히 중요하다. 전략을 잘 모르는 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삼국의 역학관계에서 형주를 보면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일단 형주는 창지앙의 중심도시다. 당시에도 물자의 수송에서 배가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형주를 막고 있으면 상류인 촉(蜀)과 하류인 오(吳) 라인을 통제할 수 있다. 또 형주를 지나서 북진하면 시앙판(襄樊), 뤄양, 시안 등 한나라의 전략 요충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선점한 조조로서도 형주를 손에 넣으면 관리가 훨씬 쉽기 때문에 눈독을 들였다.

유비는 조조에게 패한 후 형주의 주인인 유표에게 몸을 맡긴다. 당시만 해도 위세가 없었던 유비는 인근 시앙판 구롱중(古隆中)에 있던 와룡(제갈량)을 얻는다. 초반기에는 조조가 당양에서 유비를 격파하고, 형주를 얻는다. 하지만 결전의 장소 적벽이 있었다.

제갈량은 주유가 이끄는 오나라와 연합해 적벽에서 조조군을 대파한다. 하지만 어제의 동지도 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형주를 놓고, 오와 촉은 대결하고 결국 형주는 유비의 손에 들어와 천하가 3분되게 된다. 이후에 형주를 지키는 것은 관우였고, 후에 관우가 오나라와 위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희생된다.

많은 이들이 삼국지 속에서 관우를 사랑하게 됐고, 형주의 지역적 헤게모니는 관우가 잡게 되는 것이다. 형주성은 여전히 과거의 위용을 갖고 있다. 앞에 창지앙을 두고 있는 형주성은 지금도 30미터는 됨직한 해자(垓字)를 갖고 있다. 성의 높이도 상당하고,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 형주성 중심 망루의 모습.
ⓒ 조창완
늦기 전에 장자지에(張家界)까지 이동해야 하기에 징저우에서 활용할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성을 둘러보고, 삼국지를 회고함으로써 징저우 여행은 끝났다. 인근에는 조운의 용맹이 돋보이던 장판파 등이 있지만 시간이 없다. 사실 삼국지 관련 지역은 삼협을 따라서 내려오면 차분히 만날 수 있는데, 10월 즈음에 한시기행 세 번째 행사에 그 길을 함께 하리라 약속했다.

버스는 다시 후베이와 후난의 접점을 타고 내려오다가 창더(常德), 장자지에 간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장자지에에 도착하니 이미 밤 9시가 넘었다. 오랜만에 한식으로 속을 채우고, 발 마사지를 받았다. 더러 아쉬운 마음에 야시장을 향하고 싶은 이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늦어서 포기했다. 아무래도 3연타석은 쉽지 않아 내일을 기대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글은 알자여행(www.aljatour.com) 4월 ‘김풍기 교수와 떠나는 한시기행’의 3번째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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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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