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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5월6일 김구선생이 피격되었던 난무팅 2층 회의장
ⓒ 조창완
기사에게 주소를 일러주었음에도 샹야이위앤(湘雅醫院)을 찾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창사의 최대 병원이라고 하지만 일반 여행자들이 이 병원을 찾을 리 만무하니 기자에게 익숙할 리 없다. 중국에서도 중남부에 속하는 창사의 한 병원을 찾은 이유는 우리 역사와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만들어진 상하이 임시정부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국내외의 지원 감소로 위기를 맞는다. 당시까지만 해도 ‘의열단’ 김원봉과 달리 유혈투쟁을 벌이지 않던 상하이 임시정부는 나석주 의거에 이어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주동한다.

천운으로 이 의거는 성공하고, 상하이 임시정부는 새로운 힘을 찾는다. 이후 김구 선생에게는 60만위안(30억 가량)의 현상금이 붙는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도움과 주변의 도움으로 길고 긴 피신 길에 오른다. 지아싱(嘉興)-난징(南京)-우한(武漢)을 거쳐 충칭으로 가는 도중에 창사(長沙)에 들른다. 우리 임시정부가 이곳에서 머문 시간은 1938년 3월부터 7월까지로 비교적 짧지만 김구선생에게는 죽음의 직전에 다다른 피격사건이 있기에 남다른 곳이었다.

당시 김구선생이 머문 곳은 창사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샹지앙(湘江)의 강가에 자리한 시위앤베이리(西園北里)다. 조금만 걸어도 샹지앙의 중심부에 위치한 강의 섬 주즈조우(橘子洲 귤자주)의 북부가 내다보이는 곳이다.

▲ 김구선생이 치료받고 회복한 샹야 의원
ⓒ 조창완
시위앤베이리에서 창사의 중심길인 우이루(五一路)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작은 골목을 지나고, 제법 큰길을 만난 후 잠시 후 오른쪽 골목을 타고 들어가면 난무팅(南木廳)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1938년 5월 6일 난무팅 9호에 있는 조선혁명당 당부에서 벌어진 연회에 김구 선생도 초청을 받는다. 밤 12시쯤 연회 도중에 청년 활동가였던 이운환(李雲煥)이 권총을 난사하면서 현익철이 현장에서 죽고, 김구와 유동열이 중상을 입었으며 이청천은 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구 선생은 죽음 직전에 다다른다. 사건 직후 자동차로 샹야이위앤(湘雅醫院 현 호남대학교의과대학 부속병원)에 도착한 김구 선생을 본 의사는 가망이 없다며 진료를 포기했다. 그러나 3시간이 지나도 숨을 거두지 않자 치료를 시작했고, 이후 한 달간 치료를 받은 뒤 7월에야 광저우로 옮겨갈 수 있었다.

사건 후 처음으로 찾아 뵌 김구 선생에게 어머니 곽락원 여사가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에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손에 죽은 것만 못하네”라는 말로 분열되는 민족정신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했다.

샹야이위앤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소가 될 뻔했던 셈이다. 이곳에는 쑨원 등이 치료받았다는 전시물이 있지만 김구 선생에 대한 흔적은 없다. 김구 선생이 기사회생한 장소라고 알리는 작은 액자라도 걸어놓았으면 싶었지만 그것은 행자의 바람일 뿐이다.

김구 선생이 피격됐던 '난무팅'

▲ 샹야의원에 있는 명판. 치료에 감사한 쑨원과 마오쩌둥의 서신이 전시되어 있다
ⓒ 조창완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 어디도 독립 혼과 무관한 곳이 없다고 할만큼 우리 항일 운동은 철저했다. 1927년 12월 광둥성 광저우에서 벌어진 혁명(일명 광둥 꼬뮨)에는 ‘아리랑’으로 알려진 김산(본명 장지락)을 비롯해 수백 명의 한국인들이 혁명에 참여했다.

김산은 다행히 피신했지만 많은 이가 희생됐다. 중국공산당은 이를 기려 기의역사능원(起義烈士陵園)에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議亭)을 세웠다. 이곳에서 희생된 조선인은 공식적으로 150여명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중국 곳곳에서 독립운동을 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당시 그들에게 이데올로기란 의미가 없었다. 단지 우리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길들을 선택했다. 광저우의 혁명에 그토록 많은 조선 사람이 희생된 것은 우리의 독립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창사 외에도 인근에 있는 난창(南昌·1927년 8월 1일 중국공산당이 일으킨 군사봉기로 박인 등 수십 여명의 한인이 참여), 구이린(계림·의열단의 본부가 정차했던 곳), 류저우(柳州 임시정부 기착지)는 물론이고 윈난성 쿤밍(곤명 이범석, 양림 등이 강무학교를 다니던 곳), 귀저우(貴州 김홍일 등이 강무학교를 다니던 곳) 등 우리 역사와 인연이 없었던 곳이 없을 정도다.(도움 : 한상도 저 '중국 혁명속의 한국독립운동')

샹야이위앤을 나와 김구 선생이 피격된 난무팅을 봤다. 두 번째 길임에도 여전히 헷갈렸다. 주민들에게 물으니 한 할머니가 난무팅 6번지 피격지를 알려준다. 아마도 관련 연구자들이 들리면서 그곳의 의미를 알아 가는 주민들이 생긴 것 같다.

검은빛을 띠는 녹나무로 지어서 난무팅(楠木廳)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서민들이 살고 있다. 항저우, 구이린. 류저우가 임시정부 청사를 복원하는 등의 방식으로 한국인의 시선을 끌려하는 것에 비하면 좀 아쉽지만 그래도 허물지 않고 보호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창사에서 돌아가셨다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 김구선생이 피격된 난무팅 6호. 지금도 사람이 사는 일반 민가다
ⓒ 조창완
여행자들은 이번 여행의 주목적이 한시(漢詩)이지만 이곳에서 김구 선생과 관련된 장소를 접하니 비감해 지는 느낌이다. 김구 선생이 이 곳에서 같은 민족의 저격으로 죽음의 직전까지 갔다는 것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김구 선생이 이곳에서 피격된 것이 1938년 5월 6일이다. 이후 45년 8월 해방을 맞았고, 격변 속에서 1949년 6월 26일 한민족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물론 이 위기를 극복하고 해방까지 임시정부를 이끄셨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남북한 통일을 위해 힘을 바쳤다. 만약 김구 선생이 1938년 창사에서 돌아가셨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김규식,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김원봉 등이 있다지만 김구 선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힘은 훨씬 미약했을 것이다. 끝내 국내 진공은 못했지만 연합국의 자격으로 대일 선전포고까지 하는 힘을 갖지도 못했을 것이다.

역사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해방 후 한국의 독립이 대한민국이나 미주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의 결과로 이뤄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필요조건 가운데 다른 요소도 있다. 해방 후 한국에 관한 지식이 전무했던 루즈벨트는 한국에 관한 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때 주변에서 가져다 준 책이 님 웨일즈의 ‘아리랑’(원제 song of ariran)이었다. 루즈벨트가 이 책을 통해 한국을 이해했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할 일인가.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조차 알려지지 않은 김산의 처절한 독립투쟁이 잘 소개되어 있는 책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광동꼬뮌, 소비에트 등 중국 공산혁명의 중심에 한국인이 얼마나 많음을 소개한 책이다.

만약 루즈벨트가 이 책이 아니라 일본인이 쓴 나약한 한국인에 관한 책을 봤으면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또 장제스 등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는 물론이고,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들도 초반기 투쟁과 홍군, 팔로군으로 이어지는 혁명의 과정에서 한국인의 강한 기상을 볼 수 있었기에 한국의 독립을 생각할 수 있었다.

▲ 님 웨일즈가 김산의 영어 책 대출 흔적을 보고 관심을 가졌던 옌안 루쉰도서관
ⓒ 조창완

덧붙이는 글 | 이글은 알자여행(www.aljatour.com) 4월 테마여행의 기록으로 5회중 마지막 회 입니다. 강사인 김풍기 교수님을 비롯해 참가자분들에게 깊은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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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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