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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박주가리 아가리를 벌리자 날 채비를 한다.
ⓒ sigoli 고향
봄바람엔 된바람이 뒤섞여 있었다. 어찌나 세던지 책보를 얼굴에 감싸고 집으로 돌아왔다. 책보를 어깨에 둘러멘 채 행랑채로 갔다. 돼지는 "꽥꽥" 울어대고 소는 외양간 구유를 모난 뿔로 빗장이 풀리도록 들이받고 있다.

어른들이 없는 집은 내 차지다. 비설거지와 짐승들 밥 주는 것까지 아무나 집에 붙어 있는 사람 몫이니 일단은 보채는 놈부터 잠재워야 한다. 멱따는 소리가 더 싫었다.

양동이로 구정물 통을 휘저어 아래까지 뒤섞어 구정물 안에 있는 밥알과 뼈다귀, 김치쪼가리를 듬뿍 퍼서 한 통 쓰윽 붓고 사료 한 바가지를 줬더니 코로 거품 콧방귀를 뀌며 쪽쪽 빨아대니 한 놈은 잠잠하다.

여전히 2년째 나와 함께 놀았던 수소 부사리는 집채를 허물어버릴 듯이 온 힘을 다해 외양간을 뒤흔들고 있다. 쇠죽을 한 바가지 퍼주고 나자 입맛이 까칠까칠한 듯 두어 번 먹어보고는 주둥이를 푹 처박더니 바깥으로 한꺼번에 쏟아내고 만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먹다가 남기면 될 것을 밀어버리다니. 작두로 짚여물 썰기가 보통 일인가? 부지깽이를 찾다가 잡히는 대로 헛간에 세워진 지게 작대기로 대가리를 사정없이 두 대를 후려갈기자 뒤쪽으로 물러서서 주인을 노려보고 있다. 싹싹 쓸어 먹을 때까지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한숨 돌리고 났더니 무척 배가 고팠다. 미지근한 밥을 한 그릇 덜어 쉬어빠진 김치와 싱건지를 우려 만든 채를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똑 떨어뜨려 둘둘 비벼서 배를 채웠다. 배고플 참이라 꿀맛이었다.

먹는 사이 미리 불이나 때고 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 병아리랑 노는 일, 대밭에 가서 마 뿌리를 캐든가, 화살촉을 만들까 온갖 잡념이 뒤섞여 있다. 따뜻한 뒷골 장가네 묏동 오르는 길에 처박혀 한잠 자도 좋을 날이다.

▲ 이건 암소인데 수소 부사리는 정말 먹여살리기 쉽지 않았다. 성미가 고약해 논갈이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 sigoli 고향
어둠침침한 정지를 나오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토록 풋내를 맡겠다고 하니 도리가 없잖은가. 논두렁 밭두렁에 가봐야 아직 낫으로 풀을 벨 수는 없다. 말라비틀어진 새싹이랬자 파릇파릇 죽은 풀 사이에 숨어 뾰족하게 고개를 내밀 뿐이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집 누렁이는 새 밥 달라고 조른다. 새 봄에 새 풀이 났으니 지푸라기만으로 쇠죽을 쒀주면 먹지 않겠다며 은근히 졸라댄다. 투정이 아이들보다 더하다.

이 무렵이면 사람도 묵은지에 손사래를 절레절레 저을 때라 이해가 가지만 봄바람 마구 거세게 불어대니 얼굴이 찢길 듯하고 손이 짝짝 갈라지는 아픔을 견디면서까지 들로 나가라 하면 정말이지 야속하기 짝이 없다.

한편으론 부사리든 암소든 외양간에 갇혀 있으면서도 어찌 그리 바깥세상 돌아가는 판, 계절 변화를 잘도 아는지 참으로 신기하다. 대견했다. 친구보다 더 속에 있는 말을 자주 주고받고 서로 마음을 더 잘 알아차렸던 사이인지라 소가 앙탈부리기 전에 '이만한 봉사쯤 하지 못할까?' 생각하고 길을 나서기 일쑤였던 어린 나날이었다.

▲ 박주가리 넝쿨에 제비초리 같은 열매 안쪽에 잔뜩 씨앗, 낙하산을 품고 있을 테지. 며칠 전 고향에 갔다가 행운을 만났다.
ⓒ sigoli 고향
이른 봄날에는 꼴망태보다 삼태기나 바구니를 들고나가는 게 예사였다. 그날은 싸리로 만든 삼태기에 호미와 무딘 낫을 챙겨 따스한 햇볕이 모이는 양지바른 곳이나 냇가를 찾아 나섰다. 때 이른 봄풀을 나물 캐듯 뿌리째 캤다. 웅덩이에 있는 풀도 예외가 아니다. 개밥나무 버들강아지도 몇 줌 훑었다.

하다 보면 뭐든 욕심이 생기는 법인데 어느새 나는 냇가 깽번(강변의 고향말)을 따라 큰집 논 장구배미까지 와 있었다. 장갑을 끼지 않았던 터라 손이 시리기가 말이 아니었지만 이왕 나온 김에 이삼일 치는 해갈 요량이었다. 미워하는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소를 사랑하는 마음이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새싹보다 더 치열해졌다.

어린 나는 소가 무럭무럭 커서 우리 집 부자 되게 해달라는 것보다 그냥 소랑 같이 지내는 게 좋았다. 다 자라서 우리 집을 떠나갈 때 눈물을 글썽이던 소년이었다. 강아지보다 더 정성을 쏟으며 그토록 아끼던 소가 내겐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기도 했다.

그래도 '명강수'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다. 미루나무가 줄줄이 서 있는 주변에서 논두렁과 아직 물이 차지 않은 봇도랑과 냇가를 부산을 떨며 오가다가 드렁칡처럼 가시덤불이 있는 코딱지만한 언덕에 이르렀다.

'야, 이거 빡주가리네! 그래, 낙하산.'

▲ 씨아수머니 세 개를 따서 손에 올린다.
ⓒ sigoli 고향
박주가리는 하수오와 비슷하다. 줄기만 보면 쉬 구분이 가지 않지만 뿌리를 캐 보면 하수오가 마처럼 둥근 데 반해 박주가리는 잔디뿌리보다 약간 굵고 오뉴월 연분홍 꽃을 피우는 메꽃 뿌리밖에 되지 않지만 이 뿌리를 캐서 구워 먹기도 했던 반가운 녀석이다.

평소엔 눈에 잘 띄지도 않다가 세상이 말라비틀어지는 2월과 3월에 사위질빵 씨앗과 억새꽃이 훨훨 이승을 떠나 땅으로 묻힐 무렵 홍합처럼 잘록한 씨앗주머니를 벌려 창공을 갈라 샛바람에 떨며 백아산 상공을 날 채비를 한다.

낙하산! 나는 어렸을 때 수도 없이 보았다. 백아산 마당바위(756m)에도 헬기장이 있고 그쪽을 바라보는 곡성군과 경계 억새밭 차일봉(약 690m)에 헬리콥터뿐만 아니라 비행기가 이념의 탈을 게워내는 장면을 해마다 너덧 번은 지켜보았다.

독수리훈련 때는 화순 북면 백아산 일대는 정말이지 세상에 있는 모든 공비(共匪)가 고향 마을을 아수라장을 만들기라도 한 듯 그들을 잡으러 떠 있는 둥근 낙하산이 2~3분 사이가 멀다 하고 200개가 넘게 떠 있었다. 차일봉에서 지금은 대형 저수지에 갇혀버린 극락골짜기 상공을 둥둥 떠 있다가 급기야 마을 앞 들판에 내리는 낙하산.

그 낙하산을 개고 부랴부랴 얼굴에 숯검덩이를 칠하고 모자와 옷에 철마다 다른 풀과 나뭇잎으로 위장하여 민가로 내려오던 국군 아저씨가 무슨 꿍꿍이속으로 접근하는지도 모르던 때다.

항차 그들 뒤를 졸졸 따르고 낙하산 타면 무섭지 않느냐 묻기라도 할라치면 대검을 쑥 뽑아대는 무섭디 무서운 장병들 뒤를 마을 위쪽에서 어귀까지 배웅했던 터라 낙하산은 패러글라이딩보다 익숙했다.

▲ 펼치는 순간 이승을 떠나 행복의 무덤으로 들어가려는 걸까?
ⓒ sigoli 고향
아가리를 곧 벌려 우리 곁을 떠나갈 박주가리를 만났다. 물총새 부리 같기도 하고 뱁새만한 단단하게 마른 씨앗을 가득 품고 있는 박주가리 넝쿨이 나무에 주렁주렁 걸려 있다. 씨앗주머니는 어림잡아 서른 개가 넘었다.

'햐~ 참말로 저거 다 따면 대단하겠는데.'

삼태기를 내동댕이쳐놓고 덤불에 들어가 하얀 줄기를 마구 잡아당겼다. 하나를 당길 때마다 예닐곱 개가 따라왔다. 찔레나무 가시에 찔리는 것도 아랑곳않고 한참 동안 몰두해 있었다.

'볼만 할 것이여!'라는 생각뿐이었다. 몇 개는 너무 높이 타고 올라가 포기하기로 했다. 대충 세어보니 스물두어 개는 족히 된다.

세 개를 들고 아가리를 살며시 벌렸다. 까면서 뭉쳐 있는 올을 살살 건드리다가 밖으로 나오자 입으로 "후~" "후~" 불었다. 이때 아이들이 비눗물 거품을 날리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둥둥 동동 내 곁을 떠나간 300여 개 낙하산이 하늘을 하얗게 수놓았다. 거미줄만큼 가늘고 비단결같이 부드럽고 하얀 낙하산이다. 내 몸에도 붙고 나뭇가지에도 엉기고 하늘에 더 많이 떠서 해질녘 불그스름한 햇살과 어울린다. 작은 학(鶴) 떼 군무가 펼쳐졌다.

"야, 더 멀리 날아. 땅에는 내려오지 말고 나르라니까."

▲ 날자 날자 날자꾸나. 금빛 햇살과 어울려 내 곁을 떠나갔더이다.
ⓒ sigoli 고향
나머지를 높은 논두렁 위로 가지고 올라갔다. 이젠 다섯 개씩 까면서 바람에 실어 보냈다. 한 손엔 박주가리가 들려 있고 다른 한 손으론 훠이훠이 날려 보냈으니 누군가 멀리서 나를 보았다면 '저놈이 미쳤거나 돌지 않았으면 실성을 했을 것이다'고 단정했을지도 모르도록 낙하산 날리는 재미에 폭 빠져 있었다.

얼마를 지체했을까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세 개를 남겨 부산히 돌아왔다. 삼태기째 동네 앞 도랑에 담가 흙을 깔끔하게 씻어 잘게 썰어 여물에 같이 섞어서 쇠죽을 쒀주었다. 그날 이후 오랜만에 나물죽을 맛본 소는 입맛을 되찾아 잘도 먹어댔다.

다섯 살 아래 동생에게 줬더니 방안을 명주실로 깔아놓아 이불에 덕지덕지 붙여놓아 떼어내느라 애를 먹었다. 그걸 찾아 5년을 헤맸고 실로 30년만에 얼마 전 고향에서 다시 만났으니 폴짝폴짝 뛰지 않고 배기겠는가. 추억이란 이토록 우리 DNA를 강하게 자극하는 힘을 가졌다.

▲ 한 개만 까도 씨앗이 무척이나 많다. 봄바람을 타면 주위는 온통 자연 낙하산이 뜨게 된다.
ⓒ sigoli 고향

▲ 그토록 내 세포를 맘껏 간질이던 낙하산 하나
ⓒ sigoli 고향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시민, 농민과 함께 고향신문을 만들고 있다.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에 가면 추억과 고향의 맛을 맘껏 훔쳐 먹을수 있다.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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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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