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그려낸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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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시티>는 '만화같은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실사판 만화'라고 해야 옳다. <씬시티>는 등장인물이나 배경, 그리고 이야기만을 원작만화에 기댄 것이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만화의 컷처럼 '그려냈다.' 이 '영화-만화'에서는 자동차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도로 위를 반쯤 날아다니는 것은 물론, 재장전 없이 무수히 뿜어져 나오는 총알은 흰 색 혹은 노란 피를 튀기며 몸을 꿰뚫고, 등장인물들은 악 문 이를 드러낸 채 문어체로 이야기한다. 그들이 입을 열 때 말 풍선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늘 '그림 같은' 비가 쏟아지는 이 '죄악의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 물리적 힘뿐이다. 이곳에서 권력은 정치인, 경찰,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의 동물적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정의'나 '법'은 등장인물들의 미소만큼이나 찾아보기 어렵고, 악한들이 거리에서 욕정과 살육의 눈을 희번덕거리지 않는 날은 화창한 날씨만큼 드물다. 작가가 이 '가상사회'를 창조한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오직 근육과 이빨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남성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 곳에서 여성들이 생존하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철저하게 약해짐으로써 악당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 '우리 편' 남성의 보호를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보다 강한 폭력으로 무장함으로써 그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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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원 공간에서 그려낸 2차원 세계 영화 <씬시티>의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프랭크 밀러 원작만화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전체적으로 흑백이지만, 간혹 붉은 색이 여인의 입술과 드레스를 채색하며 지나가기도 하고, 크게 뜬 눈동자를 푸른색으로 물들이기도 하며, 진노랑이 흉한 악당의 피부를 덮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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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도 인쇄기법은 만화의 출판비용을 줄이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흑백의 강렬한 대비와 드물게 사용되는 원색의 효과는 만화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한 페이지 당 두 색을 넘지 않는 절제된 색의 사용은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깊이를 강조하지 않는 배경과 얕은 조명은 영화의 장면들을 만화의 지면처럼 보이게 했다. 특히 스튜디오 촬영 후 합성된 배경화면은 이런 평면적 느낌을 더해준다. 프랭크 밀러의 만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판화를 생각해 보면 그의 스타일이 갖는 극적 효과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흑백이라도 흰 색과 검은 색 사이의 다양한 회색 톤을 사용하면 입체적이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밀러는 중간 톤을 사용하지 않는다.
 로드리게즈 감독은 밀러의 원작만화를 스토리보드로 이용해 충실하게 스크린으로 옮겼다. 위 이미지가 원작 만화, 아래가 이를 기초로 한 영화의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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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의 작품이 갖는 힘은 바로 이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에서 온다. 중간톤의 배제는 그림을 거칠고 단순하게 만들지만, 효과적인 생략과 극적인 표현에 더 없이 적합하다. 영화 <신시티>는 과장된 조명을 통해 명암의 대비를 강조함으로써 원작만화의 느낌을 살리고 있다. 위의 비교사진을 보면 영화가 얼마나 얼마나 충실하게 원작만화를 재현하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밀러의 만화를 스토리보드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원작자 밀러를 촬영때마다 현장에 불러 조언을 구하고 배우들과 의견을 교환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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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져 있듯이, 로드리게즈는 영화계 사람이 아닌 프랭크 밀러를 공동감독으로 올리기 위해서 감독조합을 탈퇴하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그는 타이틀과 크레딧 화면에서 자기 이름 앞에 '밀러 감독'을 내세웠으며, 영화제목까지 아예 "프랭크 밀러의 <씬시티>"라고 붙였다. 그는 영화를 위해 만화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만화를 위한 오마주로서 영화를 이용했던 것이다. '펄프픽션'과 타란티노의 영향
 밀러의 원작만화 <신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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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씬시티>는 두 가지 의미에서 '펄프 픽션(Pulp Fiction)'이라는 대중소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하나는 1950년대 미국대중소설에서 흔히 쓰이던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객원감독' 타란티노의 전작 <펄프픽션>의 이야기 구조를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옴니버스식 구성을 가지고 있는 밀러의 이 만화 시리즈는 '원시주의' 혹은 '마초주의'라 할 만한 남성적 폭력 및 과장된 여성성으로 채워져 있다. 밀러의 이 작품은 1970년대에 선보였지만, 50년대에 출판된 윌리엄 게인의 만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영화는 원작 만화 세 편을 기반으로 해서 전개되지만, 이야기가 도중에 끊기다가 나중에 다시 교묘하게 이어지는 방식은 타란티노의 <펄프픽션>과 유사하다. 옴니버스식으로 전개되는 세 편의 이야기는 서로 맞물리며 전개되다가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되돌아와 마무리된다. 영화에서 타란티노를 연상시키는 것은 이야기 구조만이 아니다. 많은 경우 희극적으로 과장되어 있지만, 폭력묘사에 있어 <씬시티>는 <킬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킬빌>이 '과잉'으로 인한 웃음을 유발할 만큼 상세하게 폭력이 묘사된 반면, <씬시티>는 오히려 단순화된 표현으로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씬시티>의 단순화되고 생략된 표현은 비현실적인 폭력장면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관객들은 이 '빈 부분'을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미지로 채워넣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장면. 영화 <신시티>는 원작만화의 '2도 인쇄' 기법을 효과적으로 차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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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3과 1/2편 영화는 베란다에서 도시의 밤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암흑에 잠긴 도시의 불빛 앞에 피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뒤로 한 남자가 다가온다.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짧지만 극적인 사건은 이후 진행되는 세 가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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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야기 "황색 악당(Yellow Bastard)"은 폭력적인 성도착자로부터 소녀를 보호하는 경찰관의 이야기다. 은퇴를 앞둔 노경찰 '하티건(브루스 윌리스)'은 고위정치인을 아버지로 둔 폭력적인 성추행범과 맞서 싸우다가 도리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다. 수감생활을 마친 그는 성숙한 여인(제시카 올바)으로 자란 그 소녀가 또 다시 악당의 목표물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두 번째 이야기 "힘든 작별(The Hard Goodbye)"은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긴 '야수'의 이야기다. 초인적인 힘을 가진 사내 '마브(미키 루크)'는 그녀의 목숨을 빼앗은 적을 찾아 복수에 나선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이 이야기는 미키 루크와 엘리야 우드(<반지의 제왕>의 '프로도')의 연기변신으로 인해 더욱 더 주목할만하다. 마지막의 "요란한 살인(The Big Fat Kill)"은 부패한 경찰과 맞서 싸우는 매춘부들의 이야기다. 의로운 사내 '드와이트(클라이브 오웬)'는 여자를 괴롭히는 타락한 경찰 '재키 보이(베니치오 델 토로)'와 맞서 여자 동료들과 일전을 벌인다. 영화는 다시 첫 번째 에피소드로 돌아가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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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만화를 영화로 옮기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그중 <씬시티>는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기록될 만 하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두 가지 극단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게 될 것이다. 영화의 형식에 주목하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찬사의 대상이 되겠지만, 내용에 주목하는 영화 팬들에게는 냉소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씬시티>는 스타일 하나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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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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