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나리오상 시상을 위해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낸 중국의 아름다운 배우 장쯔이. (사진제공 Agence Saint-Clair Internationale)
축제는 끝났다. 인파로 들썩이던 프랑스의 대표적인 휴양도시 칸 해변도 예년의 평온을 되찾고 있다. 10여 일간의 항해를 접고 축제 객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지만 벌써부터 2006년 5월 17일~28일까지 열릴 제 59회 칸 영화제를 기약하는 성질 급한 이들도 있다.

지난 23일 영화전문지 <르 필므 프랑세>는 제 59회 칸을 빛낼 시네아스트의 이름을 공개했는데 칸의 단골손님이었으나 올해에는 결석했던 시네아스트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스페인의 악동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비롯해 유럽의 우디 앨런으로 불리는 난니 모레티, 아키 카우리스마키, 다케시 키타노 그리고 <상하이에서 온 여인>이라는 영화에서 니콜 키드만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왕가위가 그들이다. 현재 프랑스에서 출판 될 자신의 저서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이창동 감독과 임권택 감독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한다.

화려한 정치 선언도, 눈에 띄는 소란도 없이 세계 구석구석에서 찾아 온 거장들과 함께 오로지 작품만을 이야기 했던 올해의 칸 영화제는 어느 때보다 칸 본연의 모습에 충실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축제 인파가 한바탕 휩쓸고 간 자리에서 올해를 빛낸 거장들의 작품을 위주로 제 58회 칸 영화제가 남긴 발자취를 돌아본다.

관련
기사
[칸영화제] 막차 탄 홍상수, '별들의 전쟁'에서 이길까

황금종려상의 다르덴 형제 "이 상을 오브나스와 하눈에게 바친다"

세계 최대 영화 축제의 역사, 지구상에 개최되는 5대 행사 중의 하나, 지난 11일부터 세계의 시선을 집중시킨 제 58회 칸 영화제가 21일 서스펜스의 절정 황금종려상 시상식에 이어 22일 폐막됐다.

시상식 하루 전날인 20일 팔레 데 페스티발에서 만난 올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의 한 사람인 독일 감독 파티흐 아킨은 "결과를 귀띔해 줄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 단 한번도 칸에서 수상 경험이 없는 시네아스트에게 영광이 돌아갈 것"이라고 말해 영화제 시작부터 떠돌던 '신선한 바람'에 대한 예상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아킨이 흘린 정보 때문에 아모스 기타이, 짐 자무시,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더불어 한국의 홍상수 감독에 대한 기대가 커졌던 게 사실이다. 다르덴 형제에 앞서 시상식장에 입장한 사람이 바로 홍상수 감독이었던 까닭에 긴장감은 배가된 상태였다. 그러나 깜짝쇼는 일어나지 않았다.

예술적 완성도를 구비한 작품에 대한 요구가 어느 때 보다도 높았고 출품된 작품들의 수준도 이 요구를 유감없이 만족시켰으나 뭔가 한바탕 '소란'을 기대하는 대중 심리의 발로였을까. 막상 시상식을 통해 발표된 결과는 무미건조하기 까지 했다.

▲ <로제타(1999)>에 이어 6년만에 <더 키드>로 또다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장 피에르와 뤽 다르덴 형제. (사진제공 Agence Saint-Clair Internationale)
제 52회 칸영화제에서 <로제타>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바 있는 벨기에의 장 피에르와 뤽 다르덴 형제가 6년 만에 <더 키드>로 다시 한 번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이로써 다르덴 형제는 에밀 쿠스트리차, 이마무라 쇼헤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빌 오거스트와 함께 황금종려상 2회 수상의 드문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

황금종려상에 입을 맞춘 다르덴 형제는 지난 1월 5일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돼 현재에 이르고 있는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기자 플로랑스 오브나스와 그의 이라크 통역인 후세인 하눈에게 이 상을 바친다고 말했다. 1997년 영화 <약속>을 인연으로 오브나스와 다르덴 형제는 처음 만났고 오브나스는 <리베라시옹>에 다르덴 형제를 소개하며 이들의 발자취를 따르기도 했다. 지난 4월 초 칸 경쟁 부문에 자신들의 영화가 선정된 사실을 확인한 다르덴 형제는 즉시 오브나스에게 영화를 바칠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것은 오브나스의 황금종려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로제타>에 이어 또 다시 현실과 사회, 일상의 고단함에 닻을 내린 그다지 즐겁지 않은 영화 <더 키드>가 황금종려상에 선정된 데 불만을 품는 관객도 있다. 도둑질과 마약거래로 연명하는 비행소년 브뤼노(제레미 레니에 분)와 아기를 막 출산한 여자 친구 소니아의 이야기를 다룬 <더 키드>는 순간을 사는데 익숙한 소년이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아이까지 파는 극한의 비인간성을 부각시켜 그들의 전작과 다를 바 없는 '의도적인 암울함' '억지 감동' '최극단으로 몰고 가는 인간의 이중성' 등 혹평을 받으며 <로제타2>로 불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작업을 함께 해 온 유럽의 코엔, 다르덴 형제의 <더 키드>가 신랄한 네오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그들의 최고작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짐 자무시 "허우 샤오시엔, 나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 "다음에 봅시다" 황금종려상을 기대했던 걸까. 영화 <히든>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미카엘 하네케의 수상 인사말이다. (사진제공 Agence Saint-Clair Internationale)
시상식이 열리기 직전 붉은 양탄자를 오르던 다르덴 형제는 "작품 소개를 마치고 우리는 벨기에로 돌아갔으나 칸이 다시 불러 시상식에 참가하게 됐다"고 프랑스 TV 채널 <카날 플뤼스>를 통해 밝혀 이들의 수상을 짐작케 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많은 거장과 또 그들의 야심작이 경합을 벌인 올해의 칸이 다르덴 형제의 손을 들어준 것은 다소 심심한 구석이 있다.

아마도 짐 자무시의 <브로큰 플라워즈>,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에 관심을 집중시켰던 세계 언론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배신감이었을 것이다. "안이한 감상주의에 반대...승리한 것은 삶의 가혹함이다"라는 제목을 뽑은 22일자 이탈리아 일간지 <레퓌블리카>는 다르덴 형제의 황금종려상을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올해의 칸 영화제는 다큐멘터리도, 애니메이션도 저돌적인 반부시도 아닌 자무시, 벤더스, 크로넨버그, 하네케, 에고이앙, 허우 샤오시엔 등 수준작을 들고 찾아온 거장들의 만남이었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예년에 비해 화려함은 반감됐을지언정 대체로 뛰어난 작품과 무난한 수상 작품 선정은 '심사위원은 변해도 경쟁은 계속된다'는 칸의 전설을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때문에 화려함과 거리가 먼, 현실에 뿌리 내린 영화에 손을 들어 준 올해의 칸은 어느 때보다 높은 목소리로 '작가주의로의 회귀'를 외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 짐 자무시. 심사위원장 에밀 쿠스트리차는 짐 자무시의 <브로큰 플라워즈>를 황금종려상으로 꼽았으나 결국 2위에 해당하는 심사위원 대상에 그쳤다. (사진제공 Agence Saint-Clair Internationale)
<브로큰 플라워즈>로 황금종려상 후보로 점쳐지기도 했으나 2위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에 머문 미국 짐 자무시의 수상 소감은 올해 칸 영화제를 가장 명확히 정의했다는 평가다.

"위대한 시네아스트들과 겨뤘다는 것, 에고이앙, 벤더스, 크로넨버그… 당신들의 영화와 함께 영화를 소개한 일이 내게는 진정한 영광이었다"로 시작해 "허우 샤오시엔, 나는 당신의 제자입니다"로 맺은 자무시의 표현은 지난 23일자 <리베라시옹>에서 티에리 프레모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꼽은 '잊지 못할 수상소감'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지정학적 경향으로 보면 미약하나마 아시아 영화도 선전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중국의 왕샤오슈아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거장 허우 샤오시엔을 제치고 <상하이 드림즈>로 왕샤오슈아이가 수상한 심사위원상은 현재 폭발하는 중국 붐과 함께 아시아 신세대 시네아스트에 대한 칸의 환대로 해석되고 있다.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이스라엘 배우 한나 라슬로는 중동 분쟁에 포커스를 맞춘 아모스 기타이의 영화 <프리존>에서 택시 운전기사로 열연했다. 라슬로는 자신의 어머니를 비롯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희생자에 영광을 돌리며 "이제는 문제를 풀기 위해 앉아서 대화를 나눌 때"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번의 장례식>이라는 자신의 감독 데뷔작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토미 리 존스와 같은 영화로 시나리오 상을 받은 기에르모 아리아가. (사진제공 Agence Saint-Clair Internationale)
이번 시상식에서 가장 놀라운 소식은 <맨 인 블랙>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미국 배우 토미 리 존스가 건재를 과시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독 신고작으로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 번의 장례식>을 들고 칸을 찾은 토미 리 존스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남우주연상에 호명돼 천상 배우임을 확인시켰다.

<멜키아데스…>는 시나리오 상까지 수상해 올해 칸 영화제의 유일한 2관왕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멕시코인 불법체류자들이 겪는 냉혹한 현실을 그린 <멜키아데스…>의 시나리오를 쓴 기에르모 아리아가는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오늘도 국경을 넘고 있는 모든 멕시코인과 이 영광을 나누고 싶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열렬한 호응을 불러 일으켰으나 감독상에 만족해야 했던 <히든>의 미카엘 하네케는 "다음에 보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브로큰 플라워즈> <히든> <더 키드> 삼파전

▲ 피델 카스트로에 비유된, 그러나 착한 독재자라는 별명을 얻은 심사위원장 에밀 쿠스트리차와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 (사진제공 Agence Saint-Clair Internationale)
제 58회 칸 영화제 마지막 날인 22일 심사위원단은 기자회견을 통해 그간의 심사과정을 토로하는 기회를 가졌다. 지난해 <화씨 9/11>에 황금종려상을 안겨줘 논쟁을 일으켰던 심사위원단이 '작품 선정에 정치적 의도가 없었음'을 해명하고자 열었던 기자회견에 이어 두 번째다.

경쟁작 총 21편 중 4~5편에 관심을 가졌다고 전제한 에밀 쿠스트리차는 "관객의 취향과 예술적 완성도를 포함해 영화의 모든 역할을 총괄한 작품을 선정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쿠스트리차는 이어 "경쟁작에 오른 작품 중 적어도 4~5편이 황금종려상 자격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처음 에밀 쿠스트리차가 심사위원장으로 공개됐을 때 올해는 짐 자무시의 해가 아닐까 추측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실제 쿠스트리차는 끝까지 짐 자무시의 <브로큰 플라워즈>를 변호했었다고 심사위원단은 고백했다. 반면 쿠스트리차 다음으로 관심을 모았던 심사위원이자 프랑스 누벨바그의 대모 아녜스 바르다의 선택은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사위원의 공정한 심사를 강조한 에밀 쿠스트리차는 "황금종려상을 놓고 벌인 심사위원단의 논쟁은 <더 키드>와 <브로큰 플라워즈> <히든>으로 모아졌다"고 고백,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짐 자무시와 감독상의 미카엘 하네케가 황금종려상의 주역이 될 수도 있었음을 시사했다.

▲ 영화 <상하이 드림즈>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중국의 왕샤오슈아이 감독과 주연 배우 유안유안 가오. (사진제공 Agence Saint-Clair Internationale)
치열한 경쟁을 거친 세 작품 이외에 심사위원의 눈길을 끈 나머지 두 작품은 토미 리 존스의 <멜키아데스...>와 왕샤오슈아이의 <상하이 드림즈>로 알려졌다.

결국 심사위원단은 인류와 사회 문제를 언급하면서도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전반적으로 균형 있는 수상자 명단이었다고 평가했다. 비록 수상자 명단에는 들지 못했으나 빔 벤더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라스 폰 트리에 등이 가지고 온 작품들도 성공적인 영화제를 진행하는데 한 몫 했다고 쿠스트리차는 전했다.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작품 중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영화도 세 편 있었다.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시리즈 완결편인 <스타워즈3-시스의 복수>, 우디 앨런의 <매치 포인트>, 크리스티앙 카리옹의 <메리 크리스마스>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이 비평가들로부터 '매끄러운 영상과 심플한 화법'으로 호평 받았음에도 이렇다할 주목을 끌지 못한 점은 여전히 아쉬운 일이다.

한국영화가 비록 수상의 기쁨을 맛보지는 못했으나 현장에서 만난 독일 일간지 <디벨트> 문화부장 한스-게오로그 로덱은 "한국영화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며 "어쩌면 영-미의 영화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점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2005-05-24 17:35 ⓒ 2007 OhmyNews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