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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보리밭. 곧 소쇄원 앞 보리밭이 이렇게 파랗게 새옷을 갈아 입겠군요. 저는 다음 주말에 그곳에 갑니다.
ⓒ 김규환
'정월대보름날 질면 그해 풍년이 든다'고 했다. 질컥거리는 것이 아니라 눈이 소복이 내려 대지를 덮어줘야 한다는 말이다.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산골 들녘은 봄바람과 섞여 귀때기가 날아갈 듯 매섭다.

가을에 심어 겨울을 나는 이모작 주작물인 보리는 뾰족뾰족 움을 틔워 세상 구경을 나가려다 깜짝 놀라 숨곤 하는데 눈이 녹아있으면 잎이 오글오글 타들어 가거나 서릿발을 못 이기고 붕붕 떠서 뿌리마저 말라 죽는 일이 잦다. 웃자람까지 방지하니 보름날 눈은 그토록 소중하다. 하얀 솜이불로 덮어주니 얼마나 포근하고 이불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는 김 서린 물방울은 얼마나 달콤할까.

남부지방은 벼농사만 끝내면 농한기가 무척이나 길었던 중북부지방과 달랐다. 벼농사에 보리와 밀농사가 겨울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으므로 논밭에 한겨울 한두 달이나 나가지 않을 뿐 매어 산다고 하는 게 맞다. 11월 말까지는 보리 따위를 갈고 벌써 2월이면 들녘에 나가 바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보름과 관련하여 눈이 잦으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 잣대는 두 가지였다. 강수량이 늘면 날이 풀릴 때 못자리에 물 잡기 편하다는 점과 눈 자체가 보온성이 뛰어나 보리와 밀 등의 뿌리가 튼실해 당장 춘궁기 전후로 거둘 것이 많다는 뜻이다. 봄과 가을은 수량만으로도 이렇게 차이가 크다.

이러니 겨울철에는 아이들이 보리밭을 가로질러 학교를 가도 아무 말이 없었다. 구불구불 양장굴곡(羊腸屈曲) 굽이굽이 문경새재 못지않았던 학교길 신작로, 마을 앞에서 보면 지척인 듯 눈으로 재면 한 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길로 가면 1.2km나 되지만 논둑과 보리밭을 밟고 가면 절반이 절약되어 학교 뒷길 개구멍으로 드나들던 그 시절은 퍽이나 정겹고 아름다운 시절이다.

늦가을부터 논농사가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점심때도 종이 울리자마자 집에 잽싸게 달려가 어머니께 밥 차려 달라고 해서 따뜻한 밥 먹고 뛰어서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다보면 아랫배가 울렁거려 옆구리마저 아팠다. 학교 가까이 있는 아이들의 특혜라고나 할까. 집에 다녀오고 나면 아직도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당당 멀었으니 우리 마을 아이들이 도착하면 축구 경기를 한 판 하고나서 오후 수업이 시작되기도 했으니 얼마나 좋은가.

보리밭. 보리밭 사이 길로 걷기보다 우린 보리를 밟고 다녔다. 겨울 보리밭은 제대로 깨지지 않은 흙덩이라 골짜기 눈에 빠지지만 않게 조심조심 걸으면 되는데 한 사람이 가면 그 뒤로 모두 그 길로 따라서 가기 때문에 새로운 길이 나기도 했다. 그게 지름길이었다.

▲ 엄동설한을 이겨낸 보리싹. 뿌리만 튼튼하면 걱정없답니다.
ⓒ 김규환
대보름만 지나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무척 바빠진다. 어른들은 미처 구하지 못한 씨앗을 구하고 연장을 고치고 새로 만든다. 논밭에 나갈 때마다 빈골(몸에 아무 것도 이거나 지고 있지 않은 상태)로 나가는 법이 없다. 삭을 대로 삭아 몽글몽글한 퇴비를 이고 지고, 석회를 운반한다. 장군과 동이에 인분과 오줌을 날라 뿌려주기도 한다.

“낼 보리밭에 가야헝께 딴짓거리들 허지 말고 어서 자라.”
“요것만 해놓구라우.”

아버지는 단호했다.

“안돼야! 언넝 불 꺼라.”
“째까만이라우.”

잠시 책을 윗목에다 올리느라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끼대 자지 않고 뭣들 한다냐.”

할 일이 태산이라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후~.”

호롱불마저 꺼버리니 끽소리도 못하도록 적막하다. 하현달만 문틈으로 조금 비출 뿐이다. 꾀를 부려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내일 들에 나가 고생할 생각이 밀려왔다.

▲ 물이 떨어지는 곳에 가면 이 때도 아침엔 영롱한 빛을 띠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저걸 따서 아이들에게 주었더니 신기하다며 잘도 먹습니다.
ⓒ 김규환
어머니와 누나가 밥을 하는 동안 아버지와 남자들은 한쪽에선 쇠죽 쑤고 바지게에 두엄을 잘게 부숴 얹는다. 아래채 두엄간에 있는 퇴비는 몇 번을 뒤집어 놓아 잘 썩어서인지 옅은 김을 솔솔 뿜어낸다.

소, 돼지 외양짚(외양간에 분뇨와 짚을 섞어 있는 퇴비의 1차 원료)에 사람, 염소 배설물을 한데 모으고 여름철에는 풋나무를 줄기째 섞어 1차 뜨면 의잔(비가 들이치지 않는 건물 안쪽)으로 들여와 2차 숙성 단계에 들어가니 발효가 진행됨에 따라 거무튀튀하던 것이 웬만한 물기와 냄새는 물론 나뭇가지까지 곰삭아 희뿌옇게 썩어간다.

달구지에 실어 나르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도 없으니 평소에 두엄을 미리 논밭에 내놓아야 하는 수고를 감수했다. 가득 싣고 바지게 위에 삽과 괭이, 쇠스랑을 올리고 밥을 먹었다. 낫과 망태도 준비한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나도 ‘망옷 짐’(망웃 짐이라고도 하는데 퇴비 짐을 말한다.)을 지고 집을 나섰다.

아직 땅이 풀리지 않았다. 내를 건너자 봇도랑에서 떨어지는 작은 폭포 나뭇가지와 풀잎에는 아침햇살을 찬란하게 받은 수정(水晶)처럼 맑은 얼음이 오돌토돌 동글동글 도사리고 있었다.

“누나, 쉬었다 가게.”
“왜 그려?”
“잉, 숨도 할딱거리고 쩌기 쩌거 따묵고 갈라고.”
“이따 따 묵으면 안 되까?”
“아따, 해름판에 오면 다 녹아불 것인디….”

짐을 바쳐놓고 얼음을 따는 동안 누나는 짚 가마니 채 퇴비를 이고서 기다리고 있다. 조심조심 두 가지를 꺾어 하나씩 입에 물었다. 입에 넣는 순간 이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덜 깬 잠이 확 달아나도록 시원했다. 이 때 말고 언제 우리가 아이스크림을 먹어봤던가. 기분도 상쾌했다.

▲ 일명 '보지감자'인데 식용으로는 쓰지 않습니다. 뿌리 모양새를 보고 그땐 아이들이 그렇게 불렀는데 정확한 종(種)의 이름을 모르겠네요.
ⓒ 김규환
재촉하여 가던 길을 갔다. 흙길을 걷는 동안 잠에서 깬 땅이 품어내는 입김이 서서히 걷히고 있다. 싸늘한 기운을 느끼며 보리논에 들어가자 낮은 골에서도 동사면만 녹았을 뿐 다른 쪽은 서리와 서릿발이 성성하다. 이 때 논두렁 밑 응달에 낀 서릿발을 주욱 밟는 기분은 청량감과 함께 온몸이 저릿하다.

아버지가 곱았던 손을 녹이려고 짚불을 피우는 사이 어머니는 벌써 일을 시작했다. 웃거름 비료를 실실 뿌리신다. 근처에 따뜻한 불이 타고 있다는 것 자체로 온화한 느낌이 드는데 우리들을 위한 배려까지 생각하신 것이지만 당신은 아버지는 불만 피워 놓으시고 어머니와 같은 일을 하셨다.

불을 쬔 우리는 세치 밖에 자라지 않은 보리 싹을 흙으로 덮어주기 위해 골과 이랑을 따라 일일이 괭이, 쇠스랑으로 큰 흙덩이를 팍팍 깨고 잘게 깬다. 부서진 흙을 긁어모아 보리 싹이 거의 묻히도록 북을 한다.

겨울에도 죽지 않은 어린 ‘삐비’ 같은 독새기풀과 보지감자(키는 3~4cm로 작고 아이 손톱만한 가는 잎엔 붉은 보랏빛 무늬가 있으며 뿌리는 불려놓은 콩알만 하고 호두 알맹이 같이 울퉁불퉁 제멋대로인데 야생감자이다. 아직껏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파릇파릇 벌써 제철을 맞았다. 괭이 날로 득득 긁어 놓지 않으면 언제 지네들 세상이라고 확 덮어버릴지 모른다.

어깨와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자 잠바를 벗어놓고 얼굴과 머리는 모자와 책보자기로 둘둘 말았다. 환하게 밝아지는 10시 무렵부터는 거센 봄바람이 몰아쳐 해질녘까지 세찬 흙바람이 불어 눈을 뜰 수가 없을 때가 많았다.

“툭!”
“툭!”

흙덩이를 쳐주고 고랑에 흙을 올리기를 반복했다. 두 살, 세 살 터울의 형제들은 서로 먼저 마치려고 대충대충 지나가는 통에 어른들 지청구를 듣긴 해도 신이 나 있다. 뒤돌아 한 줄씩 잡아나가며 후진을 거듭한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난 고랑이 몇 줄인지 세어서 어른들 몫과 각자 해나갈 양을 정하고는 일을 하지만 점심 먹고 나면 까먹기 일쑤였다.

동력식경운기가 들어온 뒤로는 널찍하게 고랑을 타서 먼저 보리씨 뿌리고 로터리를 치고 지나가면 그만인 것을 행여 씨 하나라도 덜 날까봐 골만 타달라고 해서 흙덩이 깼던 보리 갈기도 힘겨웠지만 폭이 넓어 북 하는 데도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무짠지나 싱건지를 우려 채를 만든 반찬에 김치와 멸치만 넣고 끓인 국이 다인 차림이지만 10시 반쯤 일찌감치 점심을 먹었다. 오랜만에 일을 하면서 먹으니 밥맛이 꿀맛이다. 고춧가루가 묻은 입술에 흙먼지와 바람이 불어와 부르틀 모양인지 쫙쫙 갈라진다.

▲ 보리배동. 보리가 팰 무렵이 가장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춘궁기- 보릿고개 때 사람들은 부황이 났더랬습니다.
ⓒ 김규환
아침에 시작하여 해질 때까지 온 종일 보리밭에 살았다. 내일은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이서 하겠지만 다음 주말에도 우린 다른 논으로 어른들을 따라 나가봐야 한다. 3월 초엔 봄보리를 수분이 적은 밭에 갈고 두어 번 더 북을 해주고 본격적으로 볼태기(넝쿨성 잡초. 타작을 해놓으면 보리에 까만 씨가 있는데 수매와 밥에 치명적이었다.)와 전쟁을 한다.

우린 그렇게 봄날엔 보리밭에서 살았다. 그래서인가.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이런 콧노래나 휘파람은 나오지 않는다. 보리는 70년대 사람들에겐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들었다 놨다하는 처절한 삶의 현장이었다.

보리가 패면 보리모가지 뽑아 줄기 단맛을 즐기고 보리이삭 꼬실라 먹던 추억은 단지 아이들 놀이가 아니었다. 꽁보리밥을 아직도 멀리하는 사람마저 있다. ‘밀껌’을 질겅질겅 씹어본 사람들은 가난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안다.

이랑에 물이 차지 않도록 삽을 들고 다니던 나날이 어디 한두 날이었던가.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기려면 벼농사보다 더 중요했다. 따라서 밀, 보리농사에 들인 공력은 엄청났다. 온 가족이 동원된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제 보리가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는 주곡(主穀)이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먼 옛날이야기도 아닌 80년대 초반에라야 비로소 허기에서 벗어났으니 왜 그때는 고생 고생하여 농사를 지어도 그리 먹을 게 없었을까. 이젠 남도(南道) 보리밭 구경하기 힘드니 이 또한 사람 맘을 상하게 한다.

일이 끝날 무렵 독새기를 바지게에 담아 집으로 가져와 씻어서 소에게 먹였다.

지금쯤 남녘 들판엔 보리가 어서 흙을 넣어달라고 아지랑이 꼬드겨 손짓을 할 것이다.
▲ 아! 보리밭에 가고 싶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잃어버린 고향풍경1>(하이미디어 刊)을 냈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대표이다. 올 연말 쯤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 山菜園>(cafe.daum.net/sanchaewon)을 만들 꿈을 현실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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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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