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지난 10일은 우리 부부의 18주년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지난해 결혼기념일 때는 아내에게 처음으로 20만원짜리 자수정 목걸이를 선물하여 아내를 깜짝 놀라게 하면서 우리 가족의 아침 식사 자리를 좀더 포근하고 오붓하게 만들었는데, 올해는 그냥 슬그머니 넘어갔습니다. 지난해 보석 가게에서 보아두었던 자수정 반지에 대한 기억이 없지 않아 아내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마음먹었던 자수정 반지에 대한 기억을 접을 뿐만 아니라 올해는 결혼기념일 관련한 아무런 행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경제 사정 때문이기 보다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처지에서 어머니를 의식한 탓이 더 클 것 같습니다.

지난해 결혼기념일을 지낸 며칠 후에 미국에서 사는 누이로부터 받은 메일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오라버니 결혼 17주년 에피소드는 진작에 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에서 읽었습니다. 20만원짜리 선물로 온 가족이 행복할 수 있는 따스한 정경이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더욱이 어머님이 소외되지 않고 늘 중요 조연이나 주연급으로 출연하고 계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이 구절에서 보듯 우리 집에서 어머니는 참으로 중요한 몫을 하고 계십니다. 올해 82세가 되셨는데도 모든 살림을 관장하십니다. 생활비 지출도 어머니 손에서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 우리 부부 사이의 어떤 일도 우리 부부만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에겐 비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 행사도 어머니가 함께 하셔야 하고, 내가 아내에게 자수정 반지를 선물하는 일도 온 가족에게 알려지고 모두의 박수를 받는 가운데서 전달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올해는 내가 결혼기념일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갔습니다. 어머니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탓이었습니다. 전에 한번 어머니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내 뇌리에 깊이 새겨진 탓이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10월 20일, 대전에서 사는 막내 동생 부부의 14주년 결혼기념일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가 아침에 동생에게 축하 전화를 해주었습니다. 내 축하 전화가 처음이 아닌데도 동생은 그때도 자신의 결혼기념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내게 고맙다는 말이야 했지만….

우리 가족의 아침식사 자리에서 내가 그 얘기를 했습니다. 나같이 50대 후반을 사는 구식 사람도 해마다 결혼기념일을 챙기는데 이제 40줄에 들어선 사람이 그렇게도 결혼기념일조차 까맣게 잊고 살 수 있느냐는 식의 말을 하니 아내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게 어머니 귀에는 좀 거슬렸나 봅니다.

"그까짓 결혼기념일이 뭐 그리 중요허다구…. 해마다 돌어오는 날인디…. 옛날엔 결혼기념일이란 건 아예 있지두 않었어. 나는 결혼을 헌 날이 언제였는지두 물러."

어머니의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우리 부부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결혼기념일에 대한 얘기가 어머니께는 송구스러운 것임을 좀더 확실하게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2>

이래저래 올해는 결혼기념일을 슬그머니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 날 아침참에 대전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물론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 축하 전화였습니다. 그 전화 때문에 어머니도 그 날이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셨습니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인 줄 알았더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내가 고깃국이라도 좀 끊일 걸…."

어머니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셨고, 나는 더럭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괜찮아요. 결혼기념일이 해마다 돌아오는 건데요, 뭐" 하고는, 당신 결혼하신 날을 전혀 기억조차 못하시는 어머니의 처지를 다시 상기하며 더 이상 결혼기념일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 오후에는 같은 연립주택 뒷동에서 사는 가운데제수씨로부터 축하 메일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면구스럽고 또 제수씨에게 미안한 마음을 무릅쓰고 그 메일의 한 대목을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잔잔한 미풍이 불다가도 갑자기 거센 폭풍으로 돌변했을 때도 모든 것들을 신앙 안에서 해결하려고 애쓰시는 두 분의 모습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참으로 예쁜 부부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참 신앙인이라면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 되는데….

두 분의 사시는 모습이 참으로 닮고 싶은 부부의 모습으로 저희 부부에게는 좋은 귀감이 되었습니다.

항상 사랑이 넘치시는 형님과 아주버님 덕분에 저나 우리 애들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큰어머니, 큰아버지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무뚝뚝한 제 남편을 대신해 남편 노릇까지, 때로는 아빠 이상의 사랑을 조카들에게도 쏟아주시는 모습을 보았을 땐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곁에서 살아오면서 참 많이 받고 살았다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그 은혜를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지….》


그런데 제수씨는 그런 고마운 축하 메일을 보낸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밤 9시쯤 전화로 우리 부부를 불러내었습니다. 정식으로 저녁 식사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으나 어머님 눈치도 살펴야 하고 또 바쁜 사정 때문에 그럴 수 없었노라고 했습니다. 저녁에 성당 신자들의 '다락방'이라는 기도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나서 꼭 전화를 드리고 싶었노라고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밤음식'에 대한 부담감이 없지 않았으나 사양할 수가 없더군요. 일찍 잠자리에 드신 어머니가 깨어나시지 않도록(이날따라 할머니 옆에 일찍 누운 아들녀석도 깨우지 않고) 우리 부부는 살그머니 밖으로 나갔습니다.

낮에 많이 내린 눈으로 바깥은 온통 은세계였습니다. 우리는 동네의 가까운 치킨 집으로 갔고, 모두 나와 있는 동생 가족과 어울려 맥주를 마시며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결혼기념일에 동생 부부에게(사실은 제수씨에게서 발동된 일이지만) 축하를 받는 것은 정말 고맙고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다음날 아침에 어머니로부터 걱정을 들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부부가 지난밤에 밖에 나가 밤음식을 먹고 온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밤음식에 대한 타박에 가까운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그 걱정이 단순한 것이 아님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단은 밤음식을 절제하고 살아야 하는 아들과 며느리의 건강 문제와 관련하는 걱정이시지만, 어머니의 그 타박 속에는 결혼기념일 행사를 언짢게 여기시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어머니의 그 걱정을 들으며, 한 남자와 만나 부부로 살아오시면서 한 번도 결혼기념일을 챙겨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결혼하신 날조차 잊고 살아오신 어머니의 처지를 다시 한번 떠올리고 더욱 송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며칠 전 21일은 가운데동생 부부의 15주년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5년 전 10주년 때는 '10'이라는 '마디숫자'의 의미를 살려서 우리 부부가 가족 외식 자리를 마련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난해는 21일이 바로 설 전날이어서 한창 장만하는 설음식을 놓고 대전에서 온 막내동생과 함께 가운데 동생 부부에게 14주년 결혼기념일 축하를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올해는 15주년이어서 '15'라는 마디숫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래서 내가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어머니께 넌지시 내 의향을 내비쳤습니다. 통닭을 세 마리 사다가 집에서 백숙을 해 가지고 두 형제 가족이 우리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즉각 반대를 했습니다.

"아이구, 그럴라믄 마늘두 무더기로 들어가야 허구 한바탕 법석을 떨어야 허는디, 그게 뭔 난리여. 결혼기념일이 뭐 그리 대단헌 날이라구 툭탁하면 결혼기념일을 찾었쌌는디야. 해년 대년 돌어오는 결혼기념일이 뭐 그리 중허다구…."

아내는 내 옆구리를 찔렀고 나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집에서 닭백숙을 해서 함께 저녁을 먹자는 것은 맨 처음 아내가 내게 제안을 한 일이었습니다. 방학 때라 집에 있는 아내가 도맡아 할 일이고, 그런 음식은 아내의 주특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리 반대하시니 우리 부부는 단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반응은 분명히 신경질적이었고 과잉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런 반응 또한 단순한 것이 아닐 터였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섭섭한 마음을 표시하고, 다시 아내가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내게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오늘이 뒷동 신랑 각시 결혼기념일이라매? 통닭 사다가 백숙 만들어서 같이 먹자구 허더니, 왜 여태 가만히 있디야?"

나는 그 순간 어머니의 또 다른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까 점심때의 그 일로 해서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미안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신 것일 터였습니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로도 간단한 암산은 척척하시고 성경 구절들을 암기하고 사시는 어머니가 치매기가 있는 노인 같은 말을 하실 리는 만무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얼른 기분 좋게 답변을 드렸습니다.

"집에서 일을 벌이면 제수씨도 결혼기념일에 설거지 수고를 헤야 허구 헤서요, 그냥 외식을 허려구요."
"외식을 허면 비용이 많이 나잖여?"
"중국 음식점으로 가서 애들 좋아허는 탕수육이나 시키구 간단허게 허지요, 뭐."
"그럼, 해 있을 때 얼릉 갔다 오너."

어머니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내는 뒷동 동생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최근에 다시 한번 읽었던 미국 누이동생의 일년 전 메일을 퍼뜩 떠올렸습니다. "어머님이 소외되지 않고 늘 중요 조연이나 주연급으로 출연하고 계시니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한 말….

어려웠던 시절 애옥살이 속에서 결혼일 한번 챙겨보지 못하고 아예 결혼하신 날조차 잊고 살아오신 분일망정 내 어머니는 오늘날 해마다 결혼기념일을 챙기고 사는 자식들 가운데서도 매사에 당당하게 '중요 조연이나 주연급으로 출연'을 하며 사시는 모습이 또 한번 확연하게 드러나는 셈이었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