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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한 가지 색다른 일을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후의 사람들에게 안겨줄 귀중한 선물을 마련하여 땅에 묻는 일이었습니다.

종교가 결부되는 이야기여서 많이 망설였습니다만, 종교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니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미리 구하면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천주교 대전교구 태안교회는 지난 해 2004년이 본당 설정 40주년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40이라는 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성서 상에 40이라는 수와 결부되는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옛날부터 40이라는 수를 기념하는 오랜 전통을 지녀왔지요.

당연히 우리 태안 성당도 본당 설정 40주년을 기념하게 되었답니다. 천주교회에서 '본당'이라 함은 사제(司祭)가 상주하는 교회를 이르는 말이지요. 태안교회는 1956년 서산 본당(현 서산 동문성당)관할의 공소(公所)로 출발해서 1964년 본당으로 승격 설정되면서 첫 주임신부가 부임을 했답니다. 그러니 2004년은 본당 설정 40주년이 되는 해였지요.

우리 태안 성당은 40주년을 알차게 잘 지내기 위해 이태 전부터 <40주년기념행사준비위원회>라는 한시적인 단체를 구성하고(공소 시절부터 가장 오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제가 위원장을 맡고), 나름대로 착실히 준비를 해왔지요.

그리고 40주년인 2004년 한 해 동안 여러 가지 의미 있는 행사를 벌였답니다. 그 여러 가지 행사들 중의 하나가 60년 후인 2064년, 본당 설정 100주년 때 사용할 미사주와 축하주를 60년 전인 오늘 미리 마련하여 땅에 묻는 일이었지요.

실은 이 일보다 먼저 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200년 후의 후손들에게 안겨줄 선물을 땅에 묻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태안 성당은 40주년 해에 새 성전 건축 공사에 착수하여 지금 한창 공사를 하고 있는데, 바닥 콘크리트 작업을 하던 지난해 가을 바닥의 한 곳에 여러 신자들로부터 기증 받은 양주 수십 병을 묻었지요. 올해 가을쯤에 완공될 새 성전이 200년은 유지되리라고 예상하고, 200년 후의 어느 시기에 이르러 성전을 다시 짓기 위해 노후한 성전을 허물게 될 때 바닥에서 200년 이상 묵은 양주를 꺼내어 축하주로 사용하고 또 판매를 하도록 하려는 뜻이었지요.

그 다음에 우리는 60년 후인 2064년 본당 설정 100주년 때 사용할 '축하주'를 마련하는 일을 했지요. 지난해 11월 24일 우리 충청도 지방의 이름 있는 양조회사를 찾아가서 꽤 많은 양의 여러 가지 술과 특수 용기(容器)를 기증 받았지요.

그런데 그 축하주는 아직 땅에 묻지 않고 있습니다. 새 성전의 한 곳에 묻으려는 계획은 잡아놓았는데, 아직 공사 진도가 거기까지는 가지 않은 탓이지요. 하지만 불원간 공사 진도가 거기에 이르면 그 축하주도 땅에 묻게 될 겁니다. 60년 후에 꺼내어져서 본당 설정 100주년을 경축하는 큰 행사 때 신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지역주민들이 함께 사용할 술이니, 그 술을 묻을 때의 기분 역시 매우 엄숙하고도 즐거울 것 같습니다.

지난 19일에도 술을 묻었습니다. 장소는 새 성전의 정문 계단 밑이었습니다. 역시 2064년 본당 설정 100주년 때 사용할 술이지만, 축하주와는 성격이 다른 술이랍니다. 즉 '미사주'를 묻은 거지요.

천주교는 미사 때 포도주를 사용합니다. 미사 때 사용하는 술이라 해서 '미사주'라고 부릅니다. 미사주는 전통적으로 포도주를 사용하는데, 1980년대 이전에는 외국에서 수입을 하거나 주로 왜관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제조한 포도주를 각 본당에 공급했지요.

그러다가 본당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한 1980년대 들어서는 미사주 사용량도 부쩍 늘어나서 포도주 공급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국내 유명 양조회사인 <동양맥주/현 두산주류BG>와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지요. 그 후부터는 <마주앙> 포도주가 전국의 모든 성당과 신학교와 수도원 등에 공급이 되고 있지요.

사람들은 대개 'OB맥주'로 잘 알려진 그 회사가 마주앙을 자체 개발 생산하면서 천주교 미사주로도 공급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천주교 미사주 공급을 전제 조건으로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사 신부님이 제조 기법을 그 회사에 전수해준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더군요.

천주교의 미사에서 미사주는 매우 중요하답니다. 미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최후의 만찬'으로부터 유래하지요. 예수님이 수난 전 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 하시면서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잔을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지요.

천주교 미사에서 포도주는 빵과 함께 '성체성사'를 이루는 것이랍니다. 사제가 미사 때 포도주와 빵을 축성함으로써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하는데, 그 성체성사에 대한 믿음은 2천년 천주교 신앙의 핵심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천주교 미사에서 빵으로 된 성체는 자격을 갖춘 신자들이 모두 함께 나누지만, 포도주로 된 성혈은 사제가 대표로 혼자 마신답니다. 그러니까 미사 한 번에 소용되는 포도주는 반 잔 정도, 아주 소량인 거지요. 그렇지만 매일같이 미사를 지내고 주일에는 적어도 세 번 이상 미사를 지내게 되니, 지속적인 사용으로 하여 포도주는 꽤 많이 소모되지요.

한국 천주교회에서 미사 때 사용되는 미사주는 연간 18만 병 정도라고 합니다. 해마다 미사주의 원료인 포도를 수확할 때는 마주앙 제조회사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포도에 대한 축성식과 미사를 지낸답니다. 그리고 ㈜두산주류BG 경산공장에 앉혀진 미사주는 충분한 숙성기간을 거친 뒤 전국 천주교 성당에 공급되는데, 대개는 3년 산 포도주이지요.

우리 태안 성당의 경우 일 년에 소모되는 포도주는 마주앙 열 상자, 60병쯤 된답니다. 마주앙 한 상자에는 여섯 병씩 들었는데, 우리는 지난 19일 40상자, 240병을 땅에 묻었습니다. 60년 후에 그것을 꺼내면, 미사주로만 사용할 경우 아마 3,4년 정도는 사용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판매를 한다면, 60년 이상 묵은 포도주이니 꽤 값이 나갈 테고….

비용은 90만원이 들었습니다. '40주년기념행사준비위원'들이 10만원씩 모아서 100만원을 만들었습니다. 90만원으로 50상자를 구입해서 지난 18일 본당 사무장님이 대전교구청 관리과로 직접 가서 차에 싣고 왔습니다. 본당 설정 40주년의 행사이므로 40상자를 묻기로 했습니다. 열 상자는 성전건축 시공회사 관계자들과 현장 근로자들에게 선물을 하고….

땅 속에서 60년이라는 긴 시간을 잘 견디도록 하기 위해 자매들이 여러 명 동원되어 부식 가능성이 있는 병들의 마개마다 비닐을 씌우고 테이프로 감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상자에 넣은 다음 상자를 통째로 비닐 포장을 했습니다. 이 일에는 올해 82세이신 내 어머니도 손을 보탰답니다.

새 성전의 정문 계단 아래 한 곳을 네모지게 판 다음 조약돌을 깔고 그 위에 비닐을 깔았습니다. 마주앙 40상자를 세워서 가지런히 놓고 비닐을 잘 덮은 다음 두꺼운 스티로폼과 판자로 덮었습니다. 마주앙 상자와 흙벽 사이에도 스티로폼 조각들을 단단히 찔러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흙을 덮었습니다. 차후에 바닥 콘크리트 작업을 할 때 함께 콘크리트로 덮으면 그 안에서 마주앙 포도주 40상자, 240병은 60년이라는 세월 동안 꼼짝 않고 잠을 잘 것입니다.

그리고 60년 후인 2064년의 1월 1일이나 8월 4일(본당 설정 기념일)에 꺼내어져서 그 날부터 미사주로 사용될 것입니다.

우리는 60년 후의 미사주를 땅에 묻으며 종이 한 장도 코팅을 해서 함께 묻었습니다. 그 종이에는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2064년 본당 설정 100주년 때 사용할 미사주를 60년 전인 오늘, 본당 설정 40주년기념행사의 하나로, 현재 건립 중인 새 성전의 정문 계단 밑에 묻습니다. 이 미사주로 봉헌되는 미사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신앙공동체에 가득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05년 1월 19일 / 제12대 주임신부 구본국(베난시오) / 사목회장 김용순(안드레아) / 40주년기념행사준비위원장 지요하(막시모) 외 위원 일동》

60년 전에 마련된 미사주로 미사를 지내는 2064년 신자들의 모습이며 성당 풍경들을 나름대로 상상해 봅니다. 여러 가지 상상이 가능하지만, 그것을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 같습니다. 60년 후의, 그리고 200년 후의 후손들에게 안겨질 선물을 우리가 오늘 마련해 놓았다는 사실이 정말 묘한 흥겨움을 갖게 합니다.

100주년 때의 미사주와 축하주를 오늘 마련한 우리 모두는 60년 후에는 한 사람도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다행히 나는 결혼을 늦게 해서 자식들을 늦게 본 덕에, 내 아이들은 자연 수명을 누린다면 어언 70대 노인들이 되어서 아비가 60년 전에 마련해 놓은 미사주를 접하고 특별히 마시기도 할지 모릅니다.

그 순간에는 내 자식들의 가슴에서 60년 전의 아련한 풍경들이 아릿한 그리움으로 여울질지도 모릅니다. 더불어 아비와 어미와 할머니의 60년 전 모습이 가물가물하면서도 사무치게 그리워져서 눈물이 핑 돌지도 모릅니다.

그것들을 상상하며 19일 미사주를 묻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이 일 역시 우리가 후손들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의 좋은 표징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후손들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에는 이 일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반드시 무엇을 마련하여 물려주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산천을 함부로 허물지 않고, 굳이 무엇을 만들려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물려주려고 하는 것도 후손들을 생각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환경을 깨끗이 보존하여 물려주는 것만큼 후손들에게 좋은 선물은 다시없으리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할 듯싶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만을 생각하지 않고 먼 훗날을 생각하는 안목을 스스로 기르고 권장하여 2세, 3세들에게 물려주는 것도 후손들을 위하는 일일 것입니다.

후손들에게 물질적인 유산보다는 정신적인 유산을 더 많이 남겨주려는 마음, 시대정신을 잘 헤아리며 역사 발전의 물꼬를 잘 가다듬고 확대시키려는 마음, 오늘의 우리가 훗날에는 어떻게 비쳐지고 평가될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두고 조심하며 사는 마음도 우리에게는 필요할 듯싶습니다.

60년 후인 100주년 때를 부분적으로나마 생각하면서 우리는 본당 설정 40주년 해를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2004년 한 해 동안 여러 가지 좋은 일들과 '신기록'들이 많았습니다. 해가 바뀐 시점에서 40주년의 마지막 행사로 60년 후인 100주년 때 사용할 미사주를 땅에 묻는 일을 하고 나서, 우리는 20일 저녁 신부님을 모시고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함께 하며 기쁘게 '해단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후손들과 먼 훗날을 생각하는 마음을 조금씩은 다시 가슴에 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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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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