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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중순이 거의 지나고 있지만 아직 연초 분위기다.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분들이나 통화를 하게 되는 분들과는 지금도 서로 새해 인사를 나누곤 한다. 이런 연초 분위기와 새해 인사는 다가오는 설 명절까지는, 적어도 정월 대보름까지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연초에 축복을 참 많이 나누며 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복 많이 지으십시오"라는 인사말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고 덕담인가. 우리는 연초의 이런 큰 축복과 덕담을 돈 한푼 안 들이고, 전혀 근력도 안 쓰고 얼마든지 할 수가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큰 복인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인사가 바로 이 새해 축복 인사이다. 나는 올해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해 축복 인사를 꽤나 많이 하고 산다. 그 동안은 주로 114 전화 안내원에게 많이 했는데, 오늘은 서울 보훈병원의 원무과 직원과 전화예약 담당직원 등에게도 했다. 전화가 연결된 순간 용건을 말하기 전에 새해 축복 인사부터 건네면 거의 모든 이가 고마워하며 답례 인사를 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는 기분 좋은 상태로 통화를 마치게 된다. 내 쪽에서 먼저 새해 축복 인사를 건네고 통화를 하게 되면 전반적으로 좀더 좋은 분위기나 질감 속에서 안내를 받게 되는 것도 같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정반대의 경우가 있었다.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인데, 조금은 재미있기도 한 일이어서 한번 기록을 해 볼까 한다.

무슨 원고 작업을 하나 하다가 충남에서 가장 큰 도시의 '시민회관'으로 전화를 걸게 됐다. 그 시민회관의 개원 연도를 알아볼 일이 있어서였다. 전화번호를 몰라서 114 안내원에게 물어 보고(계제에 또 한번 114 안내원에게 새해 축복 인사를 하고) 또 곧바로 '1'를 눌러 자동 연결된 전화였다.

전화를 받은 이는 중년 남자 직원이었다. 50대 연령대임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나는 사람의 목소리가 얼굴보다도 더 명확하게 나이를 알게 해 준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서 나이를 느끼는 순간 혹시 '관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보세요"라는 한마디로 전화를 받는 그분께 우선 거기가 그 도시의 시민회관임을 확인한 다음 내 버릇대로 새해 축복 인사를 건네었다. "새해 복 많이 지으십시오"라고. 그러자 그쪽에서도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답례를 했다. "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거기까지는 서로 좋았다.

"저는 태안 사람입니다. 태안에서 드리는 전홥니다. 거기 00시민회관의 개원 연도를 좀 알고 싶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00시민회관의 개원 연도가 몇 년인지, 지금 좀 알 수 있을까요?"

나는 태안 사람 아무개라고, 내 이름까지 밝히려고 하다가 그것은 생략했다. 그 도시의 시민회관 개원 연도를 아는 일에 남의 동네 사람인 내 이름까지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 내가 태안 사람이라는 것을 밝힌 정도로 기본적인 예의는 차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개원 연도요? 글쎄요, 한 18년쯤 됐다구 허데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완전히 남 얘기하듯 하는, 시큰둥하기조차 한 태도였다. 나는 좀 의아스럽고 언짢아지는 기분을 참으며 다시 물었다. "18년쯤 됐다면…. 그럼, 정확히 몇 년일까요?"

그 다음에 이어진 대화는 이렇다. 바로 옆에서 아내가 통화를 들었기 때문에 아내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좀 더 정확하게 기록할 수가 있다.

"글쎄요, 그건 모르겠는데요. 그걸 지금 당장 알 수가 있나요."
"거기에 근무하시는 분이 자기 근무처의 개원 연도를 모르신다고요?"
"모를 수도 있잖겄대유? 근디 왜 그러슈?"
"내가 무슨 글을 쓰다가 00시민회관의 개원 연도를 좀 알 필요가 생겨서 그럽니다."
"누구신디 그러슈?"
"나, 소설 쓰는 아무개라는 사람이요."
"그럼, 진작에 처음부터 이름을 밝히셔야지, 글 쓰시는 분이 그런 예의도 모르슈?"
"예의요? 지금 예의라고 했나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왜 그렇게 겁주는 식으로 전화를 허슈?"
"뭐요? 겁주는 식으로? 아니, 거기 시민회관의 개원 연도를 물어보는 게 겁주는 전홥니까? 그리고 공직자가 그런 식으로 전화를 받아도 되는 겁니까?"
"지금은 청와대로두 그런 식으루는 전활 안 허는 법유."
"아니, 지금 여기에 청와대 얘기는 왜 나옵니까?"
"전화 끊어요. 이런 전화 받을 시간 읎으니께."

그리고 그 사람은 거칠게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서도 내 생전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통화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나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아내에게 저쪽의 말을 들려준 다음 다시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도저히 그대로 참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 전화를 받는 사람은 2, 30대로 느껴지는 젊은 직원이었다. 그 젊은 직원과 나 사이에 오고간 통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화 받았습니다. 00시민회관입니다."
"나, 방금 전에 통화를 한 태안 사람인데요. 지금 전화를 받으시는 분, 방금 전에 내가 다른 직원과 통화한 거, 들었습니까?"
"예, 들었습니다."
"그럼, 내가 다시 전화한 이유를 아시겠군요?"
"예, 압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선생님."
"내가 시장한테 전화를 하려다가 꾹 참고 다시 거기로 전화한 거요. 관장 좀 바꿔 주세요."
"지금 관장님은 안 계십니다."
"그럼, 방금 전에 나와 통화를 한 그 분이 관장님 아닙니까?"
"예, 아닙니다."
"그럼, 직원입니까? 직원이 확실합니까?"
"예.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 사람 좀 바꿔주시오."
"지금 자리에 없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 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래요…? 좋아요. 지금 전화 받으시는 젊은 직원의 태도 때문에 내가 양보하죠. 하지만 한마디하겠어요."
"예. 말씀하십시오."
"나도 나이 먹은 사람이지만, 젊으신 분이 그 나이 먹은 직원을 좀 잘 가르치세요. 나이를 어디로 먹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 가르쳐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
"그 사람한테 꼭 말해 주세요. 다음에 또 어떤 사람이 00시민회관의 개원 연도를 묻는 전화를 하게 되면, 즉 그 전화를 그 사람이 다시 받게 되면 그때도 오늘처럼 자기 근무처의 개원 연도도 모를 경우,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알아 가지고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라고 말예요. 그게 공직자의 기본적인 예의라고 말이요. 알겠습니까?"
"예…."
"그 사람이 나이 값한답시고 당신보다 윗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면 더 각별히 확실하게 가르치세요."

그리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나름대로 화풀이를 한 셈이긴 했지만 조금도 통쾌하거나 개운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 젊은 직원에게 괜히 나까지 내 나이가 창피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전화기 앞에서 맥없이 물러나며 아내에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도대체 사람은 나이를 어디로 먹는 거지?"
"그거야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요. 나이 먹는 자체는 다 똑같겠지만…."

재미있는 대답을 하면서 아내는 나를 위로하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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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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