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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아내의 건강 문제

아내의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서울을 왕래하는 일이 최근에 있었습니다. 서울보훈병원과 여성의학 전문의(여성 한의사)가 있는 한의원을 찾아보는 일이었지요.

원래는 1월 18일 강남성모병원에서 자궁을 제거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21일 입원을 해서 22일 자궁적출 수술을 하자는 의사의 말도 들었습니다. 아내는 초등학교 교사라서 수술을 하게 되면 겨울방학 안에 해야 할 처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혹한 아내는 수술을 위한 여러 가지 검사를 거부하고 다음날 일단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날부터 우리 부부는 많은 고민을 했고, 잦은 설왕설래 중에 작은 다툼을 겪기도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다른 병원에서 다시 한 번 진단을 받아보기로 하고, 수술이 불가피할 경우에는 '보훈가족'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보훈병원'에서 수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24일, 이번에는 부부가 함께 서울보훈병원엘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자궁 근종들에 의해 자궁이 두꺼워져 있고 전체적으로 커져 있기 때문에 적출수술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단 31일 입원을 하고 2월 1일 수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위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습니다.

집에 내려와서는 자궁적출수술을 불가피한 일로 여기고 여러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아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행정실장을 한 자리에서 뵙고 의논을 드린 끝에 여러 가지 고마운 배려를 미리 얻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30일 오후에 일단 천안의 딸아이 원룸으로 가서 밤을 지내며 많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는 아내의 자궁적출수술을 보류하는 쪽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조직검사 결과가 암도 아니고 악성 종양도 아닌 것으로 나온다면, 지금 당장 하혈 등으로 고통을 겪는 것도 아니니, 일단 수술을 여름방학쯤으로 미뤄놓고 그 안에 다른 치료방법(한방요법)을 찾아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올해 고3이 되는 딸아이의 도움이 컸습니다. 딸아이는 일찍이 학교 도서관에서 어느 여성 한의사가 저술한 여성의 자궁에 관한 책을 읽은 기억을 떠올리며 부지런히 인터넷 검색을 했습니다. 나는 딸아이가 인터넷에서 찾아준 여성의 자궁 질병에 관한 다양하고도 상세한 정보들을 두루 읽으며 자궁적출수술만이 최선의 능사는 아니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내게 전화를 해준 둘째 누이동생의 조언 덕도 컸습니다. 아내와 동갑인 누이동생은 자궁적출수술 경험자였습니다. 40대 중반 시절에 심한 하혈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 폐경기까지 견뎌보라는 의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간곡히 원해서 수술을 받았노라고 했습니다.

나는 누이동생이 예전에 '빈궁마마'가 된 사실을 그 날 처음 알았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께 여쭤보니 어머니도 전혀 모르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내 누이는 올케언니를 자신 같은 '빈궁마마'로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내게 조언을 해주기 위해 자신이 '빈궁마마'라는 사실을 비로소 공개한 셈이었습니다.

다음날 우리 부부는 서울보훈병원에 가서 우선 조직검사 결과부터 알아보았습니다. 역시 암이나 악성 종양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의 수술 보류 의사를 담당 의사에게 얘기했습니다. 담당 의사는 일단 동의를 해주고 나서, 지금 당장 수술을 원한다고 해도 수술 조건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내의 몸에서 간수치도 나타나고 있고, 당뇨가 의심될 정도로 혈당수치도 높게 나오고 있고, 심전도도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보훈병원을 나와 마포에 있는 여성의학 전문의가 있는 한의원을 들른 다음 천안으로 내려오면서 우리 부부는 희망과 상심이 교차하는 마음을 안고 차창 밖의 난분분한 눈보라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지요.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그 동안 내 건강 문제에만 골몰하여 아내의 건강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온 내 실책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아들 녀석의 급성 맹장염

천안 딸아이의 원룸에서 또 하룻밤을 지내고 우리는 2월 1일 한낮에 천안을 출발했습니다. 전날 내린 눈이 급강하한 기온 속에서 꽁꽁 얼어붙었던 길바닥 사정을 생각해서 12시쯤에 출발을 했고, 전날 서울에도 함께 갔던 딸아이도 다시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1월 25일에서야 비로소 겨울방학을 얻은 딸아이가 앞으로도 설 연휴까지 열흘 동안은 집에 있게 된 사실이 우리 부부에게 흐뭇한 즐거움을 안겨 주더군요.

서해안고속도로 서산휴게소에 들렀습니다. 우동으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동을 먹을 때마다 갖게 되는 묘한 낭만적인 기분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 우동을 주문하려고 할 때 내 휴대폰이 울었습니다. 가운데 제수씨의 목소리였습니다. 올해 중3이 되는 내 아들 녀석이 급성 맹장염으로 서산의료원의 응급실에 가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포기하고 바삐 서산의료원으로 갔습니다. 아들 녀석은 응급실의 병상 위에서 새우처럼 바짝 고부라진 채 심한 고통을 겪고 있고, 그 옆에서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점심시간에 걸려서 아들 녀석은 응급실에서 한 시간도 더 지나서야 의사들을 볼 수 있었는데, 아들 녀석보다도 어머니의 마음고생이 더 큰 듯하더군요.

어머니는 오전 10시쯤 갑자기 거실 바닥을 뒹굴며 고통을 호소하는 손자 녀석을 마침 집에 있는 뒷동 작은아들을 급히 불러 차에 태우고 동네 내과의원에 갔다가 서산의료원으로 오는 동안 '삼년 감수'를 했노라고 했습니다.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손자 녀석을 보면서 대신 아파 줄 수도 없고, "애간장이 녹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안양 누님과 통화를 하면서도 '애간장이 녹는 것 같았다'는 말을 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어머니의 그것을 보고 "당신이 손수 키웠고 또 함께 살고 있는 손자여서 그럴 것"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그것은 어머니의 유별하신 천성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어머니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만약 내 아들 녀석이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 집에서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급성 맹장염 발병 증세를 일으켰다면 혼자 어찌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생각하면 아들 녀석이 수월하게 일찍 병원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 덕이었습니다.

내 아들 녀석은 친절하고 자상하신 외과 과장님의 집도로 곧 수술을 받았고, 입원실의 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남자 어른 환자들이 들어 있는 4인용 입원실은 아들 녀석과 나의 임시 거처가 되었습니다. 나는 아들 녀석의 병상에 달려 있는 작고 낮은 침상 위에서 잠을 자며 정성껏 간병을 했습니다. '서울보훈병원에서 마누라 간병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사흘 밤을 아들 녀석과 함께 잤습니다. 사흘째 밤에는 내가 함께 자지 않아도 될 것 같았지만 왠지 입원 기간 사흘 밤을 모두 아들 녀석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이틀째 밤에는 아들 녀석이 아빠의 잠을 깨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혼자서 화장실을 다녀오는 기특한 모습을 느끼며 흐뭇한 마음을 갖기도 했지요.

아들 녀석은 수술 나흘만인 4일 오전에 퇴원을 했습니다. 입원실의 남자 어른 환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병원을 나오면서 아들 녀석은 "좋은 경험을 한 것 같아요"라고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입원 기간이 고작 3박4일이었는데도 한참 만에 집에 가는 것 같다고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습니다.

3. 바닷물 위의 고니 가족을 보며

입춘의 날씨가 워낙 좋고 기분도 한없이 삼삼해서 곧장 집으로 가기가 싫었습니다. 서산과 태안의 중간 지점인 팔봉면 어송리 검문소 앞에서 방향을 틀었습니다. 한적한 풍경이 묘하게 안온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을 안겨주곤 하는 팔봉면소재지로 가서 농협 슈퍼마켓으로 부자가 함께 들어가 캔 맥주 하나와 오징어포, 두세 가지 과자를 샀지요.

▲ 태안읍 도내리 저수지 물이 온통 꽁꽁 얼어서 인근 바닷물 위에 앉은 고니 가족의 평화로운 모습
ⓒ 지요하
그리고 팔봉면 어송리와 태안읍 도내리 사이, 한 옆에 긴 저수지와 수십 개의 전신주들을 거느리고 아스라이 뻗은 곧바른 길,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길을 다시 밟았습니다. 일단 저수지와 바다 사이의 제방 앞에 차를 놓고, 가까운 바닷물 위에 떠서 한가롭게 노니는 고니 가족(부모 새와 세 마리의 새끼들)의 모습을 잠시 보며 사진도 찍었지요. 그 고니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가족의 온전한 모습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고….

그리고 지난해 11월 만추의 저녁놀 속에서 우리 두 형제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한때를 즐겼던 야산 기슭의 바위로 다시 가서 부자가 마주앉아 과자를 먹으며 저수지의 두꺼운 얼음 위에서 '얼음낚시'를 하고 있는 수십 명 낚시꾼들의 모습을 구경했습니다.

나로서는 바닷물 위에 떠서 노니는 고니 가족도, 저수지 얼음 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수십 명 얼음 낚시꾼들의 모습도 처음 보는 풍경이었지요. 우리 부자는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과자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같은 고장에 살면서도 도내리 겨울 저수지의 '얼음낚시' 풍경을 처음 보았다
ⓒ 지요하
"저 고니를 백조라고도 하지요? 참 크고 멋진 새네요."
"아빠는 고니 가족이 호수나 저수지가 아닌 바닷물 위에 떠 있는 것을 오늘 처음 본다. 아마도 저수지 물이 꽁꽁 얼어서 고니들이 할 수 없이 바닷물 위에 앉은 것 같다. 바닷물 위에서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저 고니도 천연기념일이지요?"
"천연기념물로 보호를 하는 새지만, 밀렵꾼들 등쌀에 저 고니들도 무사하지를 못해."

그리고 나는 며칠 전 고장의 한 상조회 모임 자리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친목회원들 가운데도 밀렵꾼들이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청둥오리들을 잡고 너구리와 고라니를 잡아서 누구들에게 몇 마리를 주고 어떻게 요리해 먹었는지를 자못 자랑스럽게 노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곤혹스러운 내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급기야는 그들과 가벼운 입씨름을 하기도 했고….

"저 고니 가족들도 자연재해나 어떤 화를 입어 불시에 '결손 가정'이 될 수도 있어. 저 평화스러운 모습의 고니 가족에게 어떤 사고가 생겨서 그만 결손 가정이 된다면, 우리 사람이 보기에도 얼마나 안타깝고 불균형적인 모습이겠니."
"사람이나 동물이나 가정의 불행한 모습은 똑같이 마음 아픈 거라는 말을 하시려는 거죠?"
"사람에게는 이웃들의 가정을, 또 동물 가족도 따뜻한 눈으로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이 참으로 필요하고도 소중한 거라는 말을 하려는 거야, 아빠는."
"그럼, 언젠가 처럼 오늘도 여기에다 과자를 좀 남겨놓고 갈까요? 어떤 동물이든지 와서 주워 먹게…."

이런 아들 녀석의 말에 기특함을 느끼며 나는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내가 있어 아들 녀석이 있고 아들 녀석이 있어 내가 존재한다는, 우리 가족 모두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라는, 또 이 세상의 모든 이들과 삼라만상이 다 함께 그렇게 소중한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조금은 모호하면서도 확실한 생각이 다시금 내 뇌리에서 영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입춘의 다사로운 햇살이 좀 더 포근해지는 것 같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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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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